햇반과 김치를 사온 남자는 1미터 남짓밖에 안 되는 그녀의 짧은 씽크대 앞에 서서
붙박이 찬장의 위아래 문을 모두 열어보더니,
거의 아무것도 해먹지를 않는 부엌이구만, 하고 중얼거렸다.
(...) 아니 무슨 사람 사는 집에 프라이팬 하나가 없어? 진짜 없어?
(...) 남자는 프라이팬 대신 하나밖에 없는 라면용 편수냄비를 찾아내 가스버너 위에 올렸다.
기름 없어? 기름?
(...) 남자는 할 수 없다는 듯 달군 냄비에 그대로 김치를 쏟아붓다가
손목에 살짝 스냅을 주어 김치봉지를 꺾었다.
내가 왜 김치를 다 안 넣는지 알아?
아뇨.
남자는 이유를 말하는 대신 냄비에 햇반 두 그릇을 넣고 일회용 숟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이건 뭐 김치볶음밥이 아니라 김치찜밥이 되겠네, 라고 투덜거렸다.
떡처럼 켜를 이룬 밥 밑에서 김치가 지글거리며 타는 냄새를 풍겼다. 경이로운 냄새였다.

                                                               --  권여선 '가을이 오면' 22~ 25쪽에서 발췌.


어느 날인가 같은 과 남학생에게서 담배를 한 대 얻어 맛있게 피우는 모습이
어찌나 깊은 인상을 줬는지 글을 좀 쓸지도 모르겠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지도교수의 소개로  한달 반 동안 모 출판사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로라.
"주제 파악을 못한다"(어떤 글의 주제를 파악 못한다는 말인지,
인간이 변변찮다는 뜻인지 모르겠지만.....)는 이유로 그나마 짤리고
몇 푼 안되는 수고비를 확인하다가 충격으로 길거리에서 넘어지는데.

그녀는 외모든 성격이든 우아함이나 화사함이나 상냥함이라는 여성의 덕목과는
거리가 먼, 그래서 자신의 너무 예쁘고 튀는 이름이 항상 부끄러운,
늙다리 전문대 학생이다.

--그녀는 장 속에 박힌 장아찌처럼 되도록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죽은 듯 살아가기를,
아니 차라리 삭아가기를  원했다.(16쪽)

넘어져 크게 다친 자신을 부축하여 근처의 정형외과로 데려다준 모르는 남자가
말없이 사라지더니, 어느 여름날 혼자 사는 그녀의 옥탑방을 찾아온다.
그 날 길에서 주웠다면서 빈 지갑을 손에 들고.

밥을 한끼라도 사는 게 도리가 아니냐며.

근래에 읽은 그 어느 소설의 그 어느 장면보다 가슴 설레는 장면이었다.
로라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가난하고 못생기고 외로운 처녀다.
길에서 그렇게 우연히 만난 남자는 허우대는 멀쩡하고 얼굴은 멀끔하지만
그동안 세상에서 어떻게 굴러먹었는지 짐작이 될 정도로 얼굴이  두껍다.
그는 그 반반한 낯짝을 무기로 여자들을 등치며 간신히 살아가는 듯.
"장 속에 박힌 장아찌처럼 박혀 죽은 듯 살아가기를 바라는" 소원밖에 없는 로라는
그런 남자와 함께 일회용 숟가락으로 퍼먹는 햇반김치볶음밥도 황홀하다.

남자가 담배 한 개비를 꺼내더니 망설임 없이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둘은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그녀는 스물일곱 해 인생에 남자와 이토록 정답게
같이 앉아 있어본 적이 없는 듯했다. 도대체 어떤 남자가 그녀에게 한 대 피웁시다라든가,
통째로 놓고 다같이 먹는 거야라든가, 매우면 물 떠먹고 같은 경이로운 말들을 할까.
남자는 담배꽁초를 햇반 그릇에 눌러 끄며  지갑을 내밀 때처럼 불쑥 이렇게 물었다.
그쪽은 뭐 좋아해? 이름은 어떻게 되고?(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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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오면'의 로라 비슷한 심정(?)으로 세상을 오래 떠돌았던 것 같은 나는
위와 같은 장면이 나오면 바로 내가 여주인공인 듯 빠져들어 읽는 경향이 있다.
가령 영화 <우묵배미의 사랑>에서의 여관 풍경.
홍상수의 영화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술집이나 밥집 등에서의 뭐 그런
시금털털한 장면들과 속이 빤히 보이는 남녀의 수작들.

로라의 인생에 하나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반건달 애인이 생긴 게 얼마나 좋은지,
겨드랑이에서 시큼한 땀냄새를 풍기며 모르는 여자의 부엌에서 프라이팬도 식용유도 없어
냄비에 김치를 붓고 밥과 함께 들들 덖는 그 유능한 사내가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위의 장면에서 그 엉터리김치볶음밥 냄새는 또 얼마나 내 콧구멍을 간질였는지.

"나이 드니까 맛없는 걸 먹고 나면 화가 나!"('분홍리본의 시절' ) 같은
하나도 안 웃기는 대사에  낄낄거리며 일곱 편의 단편을 게걸스럽게 단숨에 읽어치웠다.
리뷰를 쓰고 싶었는데, 또 온갖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을까봐
제일 인상 깊었던 소설의 장면을 하나 소개하는 것으로 그친다.









소설가 권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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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4 14: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달래 2007-03-14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 있는데, 느낌이 괜찮네요. 이 작가, 이 작품... ^^
엉터리 김치볶음밥...

로드무비 2007-03-14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페인 님, 오래 전부터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첫 장편 <푸르른 틈새>를 재밌게 읽었거든요.
반지하나 옥탑방, 술자리, 그리고 진절머리나는 인간의
어떤 면모 등에 대한 묘사가 탁월해요.
윤대녕 소설과는 또 다르지요?^^
(님의 리뷰 기대해도 되죠?)

이렇게 은근히 님, 일부러(!) 야박하게 넣었습니다.
혹여라도 부담 느끼실까봐.
소설가 김지원에 대한 그의 글이 참 좋았어요.^^

2007-03-14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우맘 2007-03-14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녀치마의 작가죠? 그때 차력당 선정도서로 읽고 나서 강하게 각인이 되어 있는데....신간이 나왔나? 얼른 담아야겠어요.^^

2007-03-14 17: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분홍달 2007-03-14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궁금하게 만드는 리뷰네요 함 읽어 봐야겠어요^^

얼음장수 2007-03-14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약콩이 끓는 동안을 쓴 그 권여선인가요? 읽으면서 작가의 힘이 느껴진다라는 인상을 받았는데 로드무비님의 추천도 있고 하니 관심을 더 관심을 가져봐야겠어요~

2007-03-14 1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3-14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치를 왜 다 안 넣은 건지 님, 심오한 뜻이 있답니다.
밥과 김치가 익고 나서 나중에 남은 김치를 넣어주면
아삭아삭 씹히는 식감이 좋은 김치와 부드러운 김치가 섞여
볶음밥이 더 맛나다는 거죠.
저도 제 이름 끝글자의 모음 'ㅗ'가 'ㅜ'가 아닌 게
무지 아쉬웠습니다.^^
(이름을 제게 끝까지 안 가르쳐주셨던 것 같은데요. ㅎㅎ 그런 사연이...)

얼음장수 님, 네, 맞습니다.
'약콩이 끓는 동안'도 재밌게 읽었어요.
전 그의 모든 단편이 다 재밌었는데 그게 또
취향 혹은 연령의 문제와도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긴 해요.^^

부용 님, 제가 옮겨 적은 저 부분을 읽고 땡기신다면
읽어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이번 주말에는 님, 잘 알겠습니다.
아픈 데는 ..가 최고, 간사한 인간의 마음을 그리도 잘 헤아리시니!
그런데 어제부로 깨깟이 다 나아서 양심상 그럴 수가 없네요.ㅋㅋ

진/우맘 님, 그때 님도 리뷰 쓰셨죠?
비발 님께 처녀치마를 선정도서로 해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그 책이 좋으셨다면 이 소설집도 확실합니다.^^


비로그인 2007-03-14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제 읽어보려고요. 기대가 큽니다^^

에로이카 2007-03-15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화가 나는 이유가 제가 이제 나이가 먹었기 때문이군요... 엉엉...

로드무비 2007-03-15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 님, 전 옛날부터 그랬는데.ㅋㅋ
나이 드니 더 심해지긴 했어요.
거의 울분을 느낄 정도.^^
(울지 마시라요.)

바람난책 님, 안녕하세요?
기대 너무 많이 하고 읽으면 실망하실까봐 약간 걱정.
아무튼 좋은 시간 되시길요.^^

2007-03-16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16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3-16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해 황순원 문학상 수상 작품집에서 읽었던 단편이네요. 불편함이 매력으로 다가오던 작품이어서 작가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새로 단편집이 나왔나 보네요. 저도 보관함에 담아 넣으렵니다.^^

로드무비 2007-03-16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토코이 님, '가을이 오면'이 황순원 문학상 후보작에 올랐군요.
몰랐습니다. 그런데 아마도 수상은 못했나 봅니다?
불편함이 매력으로 다가왔다니 흥미롭습니다.^^

2007-03-16 15: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16 1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7-03-17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우고 남은 말들 님, 좋았어요. 고마웠고요.
한 번 독자는 영원한 독자, 아시죠?
그 역할을 계속 하게 해주세요.
아마도 '사리' 같은 무엇을 원하시는 게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담아요, 님, 가끔 독수리타법으로나마 한 자 한 자
옮겨 적어보고 싶은 글이 있어요.
26쪽의 장면이 바로 그랬답니다.^^

2007-03-22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23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3-25 2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