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올지 모를 희망 말고 지금 행복했으면 - 모든 순간 소중한 나에게 건네는 헤세의 위로
송정림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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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같은 시간을 산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렇다. 가만히 서로의 속 사정을 들여다보면 다르다. 누군가 과거를 살고 누군가 오지 않은 미래에 붙잡혀 산다. 딱히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거니까. 하지만 과거와 미래를 사는 이들 대부분은 즐겁거나 행복하지 않다. 내 주변에서도 그렇다. 어떤 이는 대화를 할 때마다 부족했던 과거에 속상해하고 어떤 이는 노후만 걱정한다. 그들에게 송정림의 『언제 올지 모를 희망 말고 지금 행복했으면』을 건넨다면 이게 뭐냐는 표정을 지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행복을 원하지만 정작 행복에 대해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내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내가 누구와 있을 때 행복한지, 나를 아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그러니 우선 나를 보자. 친구 하나는 남들을 부러워한 했던 시간이 많았다고 했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면서 타인처럼 사는 게 아니라 나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친구는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이 나이에 알게 되었다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내 인생을 타인에게 묻는 일은 의미 없다. 나는 내가 잘 안다. 내 안에 내 담당 코치가 있다. 나에게 묻고 나에게 맞는 목표를 정하면 된다. 타인에게 내 꿈을 기대는 것도 부질없다. 스스로 꿈을 세우고 그 꿈을 향해 걸어가면 된다. (45쪽)


웹소설 연재를 마친 저자처럼 뭔가 도전하는 일은 누군가 강요해서 될 수 없다. 내가 원해서, 내가 스스로 찾아야 가능하다. 나이를 먹으면서 좋아하는 일도 줄어들고, 하고 싶은 일들도 줄어드는 걸 느낄 때 서글퍼진다. 대신에 욕심이 줄어들고 마음이 넓어지면 좋으려만 그도 아니니까. 그럴 때 나무나 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 자리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것들이 주는 위로와 힘이 크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을 갖게 된다. 저자의 이런 문장에 깊이 공감하며 나를 추스른다.


사람은 떠나도 자연은 거기 그대로 있다. 자연은 언제나 시린 마음에 어깨를 내줄 준비를 하고 있다. 자연에 위로받기 위해서는 자연을 느끼는 힘을 기르는 게 중요하다. (93쪽)


헤세의 문장을 따라 그것이 주는 울림과 사색을 자신의 생각과 일상에 접목시킨 저자의 글은 움츠린 모두를 응원하고 다독인다. 때로 알 수 없는 분노로 스스로를 자책하고 헤매는 이에게 그 마음속을 가만히 들여다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가장 중요한 게 나의 마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사실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고 돌본 이가 몇이나 될까.


나의 과거, 현재, 미래를 결정하는 모든 것. 나를 이루는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마음이다. 내 마음은 결국 나만이 알 수 있다는 말은 나의 길은 나만이 정할 수 있다는 말. (138~139쪽)


그 숱한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힘들었을 시간들. 사랑, 연민, 괴로움, 슬픔, 분노, 질투, 시기, 미움, 그 모든 것의 시작 또한 나의 마음일 것이다. 살면서 점점 나를 아는 게 힘들다. 그러니 뒤늦게 나를 돌보느라 상대에게 소홀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나의 마음부터 어루만지고 안아주는 게 필요하다고 느낀다. 어쩌면 이런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많아지는 게 나이 듦의 지혜일지도 모른다. 늙음은 피할 수 없으니 그 늙음에 대한 기대를 갖는 일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아니,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게 삶이니 충분히 기대할만하다.


더 넓어진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더 깊어진 생각으로 인생을 바라보고 더 맑은 시선으로 세상을 대하는 일, 그게 나이를 먹는 일이라면, 늙음은 더 이상 슬픈 일이 아니다. (267쪽)


모두가 언제 올지 모를 희망 말고 지금 행복했으면 좋겠다. 현재를 사는 인생, 나를 사는 인생, 그것이 주는 기쁨과 행복을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주변의 가족과 친구의 지금을 응원하고 사랑하는 일, 우리가 누리고 해야 할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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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보는 마음
김유담 지음 / 민음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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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돌봄은 같은 것일까? 상대가 나를 사랑한다는 건 알겠지만 돌본 적은 없었다는 느낌, 돌봄을 받으면서도 그 행위에 사랑이 담겼다고 확신할 수 없었던 순간들이 있다. 사느라 항상 바빴던 엄마와 입원한 나를 간병했던 작은 엄마를 통해서다. 어쩌면 사랑과 돌봄은 별개의 것인지도 모른다.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게 중요하다.


김유담의 소설집 『돌보는 마음』에 수록된 10편의 이야기엔 다양한 세대의 여성이 등장한다. 돌봄을 받고, 누군가를 돌보며 살아가는 여성을 통해 삶과 돌봄의 변화를 생각한다. 돌봄이 여성의 몫이라는 인식은 출산과 육아 때문이다. 아이를 낳는 일을 그렇지만 키우는 일은 다르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는 여성에게 돌봄을 강요한다.


표제작 「돌보는 마음」은 마흔이 넘어 출산 한 미연이 복직을 위해 베이비 시터를 구하는 과정을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미연은 주어진 육아휴직을 다 쓸 수 있지만 경력 단절로 이어질 뻔한 결말을 알고 있다. 고액을 지불하고 베이비 시터를 구했지만 믿을 수 없어 CCTV로 확인한다. 베이비 시터의 잘못된 행실을 알고도 자신이 아이를 돌보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갖고 있다. 왜 미연은 그래야만 하는가.


미연처럼 엄마가 되면서 부여받은 혼란스러운 돌봄 의식은 아이를 낳은 산모들이 같은 공간에서 겪는 감정을 다룬 「조리원 천국」, 육아의 도움을 얻기 위해 친해진 이웃에게서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을 들려주는 「내 이웃과의 거리」, 사고로 아이를 잃은 직장동료와의 재회를 그린 「연주의 절반」을 통해서도 만날 수 있다. 똑같이 아이를 출산했지만 모유 수유로 엄마의 능력을 구분하고 직접 이유식을 만들고 최저가 소비를 위해 잠을 줄이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최선을 다했지만 사고로 아이를 잃자 모든 책임은 엄마에게 돌아온다.


돌봄은 엄마로 대표되는 여성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있다. 그러나 여전히 엄마이자 며느리에게로 이어진다. 요양병원에 입원한 외할머니를 간병하는 「대추」속 며느리, 결혼 후 주말을 시댁에서 지내는 게 마땅하다는 「안(安)」속 화자의 시어머니와 큰 엄마는 모두 며느리의 역할을 강조한다.


「대추」의 할머니는 외손녀인 ‘나’가 사간 대추는 외면하고 외삼촌이 팔아버린 자신의 집 대추나무 대추가 먹고 싶다고 한다. 손자인 ‘영석’은 흔쾌히 그 대추를 가져다주겠다며 남의 집 대추를 훔친다. 그러나 영석의 마음엔 할머니가 빨리 돌아가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할머니를 간병하는 며느리인 엄마를 위해서 말이다.


「안(安)」의 ‘윤미’는 바쁜 엄마를 대신해 어린 시절 큰엄마의 돌봄으로 자랐다. 그런 큰엄마의 부고에 놀랐고 담담한 사촌 새언니가 서운하다. 시댁을 위해 희생한 큰 엄마의 삶이 정답이 아니라는 걸 성장하면서 느끼고 결혼 후 절감하면서 ‘윤미’는 딸과 며느리에 대한 차별이 아무렇지 않은 시모가 불편하다. 그게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남편 ‘공’도 마찬가지다.


공의 할머니가 공의 어머니에게 물리고, 공의 어머니가 내게 물리는 삶. 그러면서도 요즘 여자들은 옛날에 비해 팔자가 늘어졌다는 평가를 윗세대 여성에게 받는 삶……. 그것은 대물림이라기보다는 ‘되물림’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나. 아니면 되풀이나 되갚음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 「안(安)」, 48쪽)


가족을 돌보느라 희생하고 정작 자신의 삶을 돌보지 못한 여성의 삶은 우리네 이야기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삶이 변화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여성에게 돌봄과 책임을 부여하고 돌봄 노동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지금껏 다양한 세대의 여성에게 돌봄은 받은 사회가 이제는 그들에게 돌봄을 돌려줄 때다. 소설을 읽으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적극적인 제도의 도입과 참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걸.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돌봄이 이토록 어렵단 말인가. 답답한 마음이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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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4-25 10: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개인의 헌신에 돌봄을 맡기는 전통적인 사회는 아닌데... 최소한 사람답게 존중받는 것에 관심을 둔다면 우선순위가 달라질텐데요.ㅠㅠ 저도 답답한 마음입니다.

자목련 2022-04-27 08:50   좋아요 1 | URL
어쩌면 앞으로는 스스로를 돌보는 사회가 될 것 같아요. 그래서 두렵기도 하고요
그에 따른 제도와 정책이 균형을 이루는 사회가 되면 좋겠어요.
 
바라;봄 - 정신과 의사의 일상 사유 심리학
김건종 지음 / 포르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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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마주하는 물건과 풍경이 어느 순간 감동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매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거기 그 자리에 항상 존재하는 게 대단하게 느껴진다. 타자는 변한 게 없고 내가 변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생각이 변하는 순간은 어떻게 오는 걸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공부를 해야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상의 사유는 쉬운 듯 보입지만 어렵고 힘들다. 정신건강의학 전문의 김건종의 에세이 『바라;봄』은 그런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사유를 전한다.


그가 바라보는 것들을 함께 보고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는 순간 조금씩 사유가 확장되는 걸 느낀다. 아마도 이 책을 만난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정신건강의학 전문의이라는 직업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가 사물과 사람을 향한 시선은 따뜻하면서도 다정하다. 살피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알아보고 바라보는 모든 것들은 그의 개인적인 일상이면서도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 깊게 공감한다.


병원을 찾는 이들을 상대하며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 두 아들을 키우며 경험하는 것들, 산책을 하고 바다를 보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포착한 순간을 기록한 담담하면서도 솔직한 문장이 치유로 다가오는 건 그가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을 하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가로수’를 시작으로 마지막 ‘흉내’까지 사물을 바라보고 단어를 바라보고 행동을 바라보며 기록한 문장은 일기처럼 은밀하면서도 안내처럼 꺼릴 게 없다. 그가 바라본 것들의 어느 하나를 꼬집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편안하고 좋다. 특히 주택을 손질하며 두 아들과의 지내는 일상이 허물없이 다가온다. 사고가 성장하는 큰아들과 나누는 대화, 활동량이 많은 작은아들의 모습을 보며 추억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


넘치는 생을 마음껏 낭비할 수 있는 부유한 시간을 아이는 살고 있구나. 우리 모두가 한때 누렸던 순수한 과잉의 기쁨. 오로지 놀이 속에서 어른들도 잠깐씩 이 순간으로 되돌아온다. (「날뛰다」, 중에서)


있는 그대로 감정을 표출하는 아이를 통해 그 시간이 아이에게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운 순간인지 알게 된다. 코로나로 인해 밖이 아닌 안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는 아이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이 함께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언제나 나를 매혹시키는 뒷모습에 대한 그의 사유는 나의 뒷모습을 상상하게 만든다. 내가 볼 수 없는 나의 마음을 누군가 알아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까지도.


뒷모습은 준비할 수도 없고, 조절할 수도 없고, 꾸밀 수도 없다. 항상 활짝 열려있어서 얼굴 표정처럼 닫을 수도 없다. 팔다리 휘둘러 방어할 수도 없다. 말이 없기에 침묵의 온도가 느껴지고, 표정이 없기에 온몸이 말하고, 무력하기에 오히려 존재 자체가 오롯이 떠오른다. 우리가 한 사람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이다. (「뒷모습」, 중에서)


쉽고 친근하게 읽다가도 이런 부분에서는 감탄하고 그의 상담실에 입장한 기분이 든다. 고민하고 걱정하던 것들이 사사로운 감정에 불과하며 앞으로 주어진 삶에 충실해야 한다고 전하는 강한 어조가 들린다고 할까. 삶의 균형을 잡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죽음을 생각하면 한없이 감사한 삶이라는 걸 알면서도 정작 그것을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


한 눈으로는 변화를 추구하면서 다른 한 눈으로는 영원히 바뀌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한 눈으로는 우리가 내일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수용하면서 다른 한 눈으로는 오 년이고 십 년이고 살 것처럼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렇게 얼굴에 나란히 자리한 두 눈으로 우리는 정반대의 세계를 보며, 그 모순의 관계 속에서 삶의 균형이 지탱된다. (「양안」, 중에서)


내가 두 눈으로 보는 것들은 얼마나 정확할까. 때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건 아닐까. 무언가를 바라봄에는 그런 고찰도 필요할 것이다. 바라볼 수 있다는 게 당연한 게 아니며 감사할 일이라는 사실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볼 수 있는 것들을 언제라도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당연하게 맞이한 오늘이 누군가 간절하게 바란 내일이라는 것처럼. 현재의 순간에 충실하라는 메시지를 전하지 않더라도 기억해야 한다.


피어나는 것들은 다 그렇다. 불꽃도, 향기도, 웃음도, 홍조도, 사랑도, 그렇게 잠깐 제 몸을 태워 빛을 내고 스러진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 피어나기에 애달프다. 그래서 소중하다. (「피어나다」, 중에서)


보통의 일상이 주는 기쁨을 만끽하면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사유가 가득한 책이다. 복잡하고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주변을 둘러보면 어떨까. 그리고 마주한 풍경과 눈을 맞춰봐도 좋을 봄이다. 저자가 바라본 사물과 단어를 따라 그에 따른 나의 시선을 기록해도 좋을 것이다. 하나를 바라보는 각자의 시선은 저마다 다르고 그것들은 모두 고유하고 특별하고 소중하다. 이 봄을 바라보는 나만의 바라봄을 간직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으로 남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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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22 소설 보다
김병운.위수정.이주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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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 하는지 안다고 확신하는 일은 어렵다. 기준을 모르기도 하고 그것은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내가 아니라 내가 보는 나는 항상 흔들리니까. 『소설 보다 : 봄 2022』 수록된 세 편의 소설은 어쩌면 그런 정체성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나를 알아가는 일, 나에 대한 확실과 불확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이들은 모습은 고민의 종류만 다를 뿐 우리와 같다.


김병운의 「윤광호」는 화자인 ‘나’가 ‘윤광호’라는 인물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다. 소설은 폐암으로 투병하다 죽은 윤광호의 소식을 시작으로 과거 그와 알고 지냈던 시간을 소환한다. ‘나’와 윤광호는 게이 인권운동을 하는 단체에서 처음 만났고 둘 다 게이였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일찍 커밍아웃을 한 광호와 달리 ‘나’는 그들 무리에서만 소속감을 느끼고 안정감을 얻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음지에서는 그들과 같은 사람이지만 밖으로 나와서는 굳이 그걸 말해야 한다고 인식하지 않았다. 2010년을 생각하면 ‘나’의 태도는 그들에게도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다.


‘나’는 글을 쓰고자 했지만 결코 자신의 이야기를 쓰지 않을 거라 했던 ‘나’에게 광호는 쓰게 될 거라고 말했다. 단체에서 퀴어 문학을 읽는 모임을 해보자는 광호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도 그와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 이유도 그런 맥락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이야기이자 자신의 이야기를 쓰게 된다. 소설에서 이광수의 「윤광호」가 등장하는데 읽지 않는 단편이라 그와 김병운의 「윤광호」가 연결되는 부분이 인상적으로 남는다. 어느 시대를 살든 우리는 비슷한 고민을 하며 산다는 것. 중요한 건 시간의 문제라는 광호의 말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 어떤 일은 때로 많은 시간을 감내해야 하므로. 물론 무작정 시간이 기다리기를 바라서는 안 되고 소설 속 광호처럼 약자와 소수에 대한 차별 폐지와 인권을 위해 연대하는 활동을 기반을 하겠지만. ‘나’의 말처럼 현재 우리 사회는 광호 씨 같은 이가 더욱 필요하고 그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우리가 더욱 필요하다는 걸 느낀다.


광호 씨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우리에게 필요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윤광호」, 33쪽)


김병운의 「윤광호」가 사회적인 인식 개선과 동시에 개인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위수정의 「아무도」는 조금 더 개인의 내밀한 감정을 다룬다. ‘나’는 남편 수형과 별거를 시작했고 그 이유는 수형이 아닌 그 사람을 사랑해서다. 하지만 별거가 이혼 후 그 사람과의 결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혼자 지내면서 직장에 나가고 동료와 수다를 떨고 가족과 관계를 이어간다. 다만 사랑이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과거 아버지의 외도를 목격한 시절을 떠올린다. 누가 봐도 가정에 충실한 아버지였기에 ‘나’는 그 이후로 아버지를 신뢰할 수 없었다. 아버지 역시 가정을 버리지 않았고 여전히 어머니와 잘 지낸다. ‘나’가 사랑하는 그 사람도 가정이 있다. 소설에서 ‘나’가 숨이 막힐 때까지 달리기를 하고 노숙자가 되고 싶은 마음과 물과 상비약도 없는 집은 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 겪는 혼란과 양가감정은 독자에게 당신은 어떠냐고 묻는 듯하다.


어떤 마음은 없는 듯, 죽이고 사는 게 어른인 거지. 그렇지? 그런데 어째서 당신들은 미래가 당연히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건가? 그러나 이 모든 말을 나는 할 수 없었다. ( 「아무도」, 88쪽)


그럴 거면 남편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이혼을 하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부모처럼 누구도 ‘나’에게 어떤 강요도 할 수 없다.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꿈에서 빨리 깨고 싶지 않은 ‘나’. 어쩌면 그래서 고독하고 쓸쓸한 ‘나’에게 연민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아무도」라는 제목이 주는 텅 빈 공허감처럼.


이주혜의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는 수술대 위에 오른 53세 여성 구은정의 21그램의 영혼으로 자신의 몸을 살펴보며 시작한다. 한 번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돌보지 못한 몸. 은정이 여성을 상징하는 자궁 적출 수술을 받는 설정은 또 다른 상징으로 이어진다. 여성이 아닌 인간 구은정의 몸이 되는 일. 고등학교 졸업 이후 가구회사에 일하며 가장 역할을 해 온 거구의 은정을 향한 직장 동료의 시선들. 그런 은정을 동반해 일본 출장길에 오르며 일본에 있는 연인을 만난 사장, 둘 사이의 소문을 감당하는 몫은 은정이었다. 은정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직장 선배 소희 언니만 있으면 좋았다. 하지만 소희도 다른 이들처럼 은정을 대했다.


나는 회복실 천장에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있지도 않을 영의 뺨을 어루만졌다. 21그램 더하기 자궁의 무게만큼 가벼워진 내 몸이 억울하게 뺨을 맞대고 있었다. 나는 그런 내 몸을 구해줄 생각도 없이 그저 이런저런 것들의 무게가 궁금했다. (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136쪽)


은정은 앞선 세대의 K- 장녀였다. 그녀의 감정이나 사랑은 존중받지 못했고 스스로를 돌보는 대신 누군가를 돌보거나 돌봄의 도구였다. 그러니 텅 빈 자루 같은 몸에서 벗어난 은정의 영혼은 자유롭고 평안하다. 은정을 짓눌렀던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은정 자신을 위한 삶을 살기를 바라며 화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 역시 여성이고 여전히 내가 누구인지,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라고 여기면 조금 괜찮아질까.


나를 아는 일이 어려운 만큼 누군가를 안다는 일 역시 그러하다. 아는 척 하지 말고 알아가려고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말하는 『소설 보다 : 봄 2022』. 공감하고 연대하며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봄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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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트리플 8
최진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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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어른으로 살지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냥 어른이 빨리 되고 싶었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이나 꿈같은 게 없었다.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게 싫었지만 담임한테 대들 수 없었고 막연하게 대학에 들어가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수동적인 삶이었다. 나는 없고 남들처럼 사는 시간만 있었다. 그래서 십 대 조카와 이야기를 할 때 이모랑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을까. 십 대의 일상을 들려주는 최진영의 『일주일』을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부족한 어른인지 느끼며 조카의 기분을 생각했다.


어쩌면 이 소설을 읽는 어른 가운데 어떤 이는 어쩌겠니, 세상이 그런 걸 하며 아이들을 달래려고 할지도 모른다. 세상을 바꾸거나 인식의 변화를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말이다. 아이들의 마음에서 공감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냥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처럼 어른이 되고서야 그때의 답답함과 슬픔을 조금 알게 되었을 테니까.


최진영의 소설에서 만난 청소년은 주변에서 흔하게 마주하는 아이들이다. 어린 시절 같은 유치원에 다니며 함께 일요일마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나’, ‘도우’, ‘민주’가 성장하면서 변화한 모습을 보여주는 「일요일」. 각기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세 명의 일상은 일요일에도 만나기 어렵다. 특목고에 간 도우와 일반고에 간 민주와 다르게 특성화고에 간 ‘나’는 실습생이 되어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사회에 나온다. 가장 낮고 취약한 자리에서 위험에 노출된 채 일요일에도 쉬지 못한다. 빨리 자립하려고 선택한 학교는 안전한 고용에 대한 학습이 아닌 취업률만 높이려 아이들은 현장에 내보내고 문제가 생겼을 때 아이들을 지켜주지 않았다.


돈 버는 일이 힘들다고 말할 수는 있어. 사람이 일을 하다 보면 그렇게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먹고사는 일이 원래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어. (「일요일」, 47쪽)


‘나’의 불안은 누구의 책임일까. 어른과 사회의 잘못이다. 그런 미안함은 자신만의 비밀문자를 남기고 사라진 ‘지형’과 ‘나’의 이야기 「수요일」에서도 마찬가지다. 입시로 찌든 학교생활, 실패는 용납하지 않는 부모, 그 안에서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지형인 사라지고 남겨진 ‘나’는 ‘지형’이 보호자라 부르는 엄마에게 추궁을 당한다. 자신의 잘못과 아이가 느꼈을 아픔과 고통은 헤아리지 못하는 보호자는 어른의 표본일까 두렵다. 그 시절을 지나왔다고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건 얼마나 무책임한가.


그런 의미에서 학교를 자퇴하고 자신만의 계획으로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나’와 무조건 반대가 아니라 대화를 협의점을 찾는 엄마의 이야기 「금요일」은 조금이나마 희망적이며 위안을 준다. 학교에서 경험하는 불공정과 불합리한 제도에 목소리를 내는 게 당연한 일인데도 왕따와 학교폭력에 대해 방관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건 아닐까.


『일주일』속 청소년은 실재하는 십 대다. 그래서 더 아프고 가혹하게 다가오는 소설이다. 뉴스에 등장하는 안타까운 죽음의 주인공이며 지금도 든든한 울타리 없는 일터에서 일하고 누구에게도 답답한 현실을 토해내지 못해 아파하고 버티는 우리의 아이들이다. 이런 소설을 읽지 않았더라면 금세 잊히고 말았을 걸 알기에. 부족한 어른이라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세상은 평평하지 않고 울퉁불퉁하다. 누구는 웅덩이에 있고 누구는 언덕에 있다. 각자 다른 세상에서 어쨌든 노력하며 아무튼 불공평하게 살고 있다. 그러니 제발 세상이 좋아졌다느니 젊은 애들이 문제라느니 그런 말은 하지 않으면 좋겠어. (「일요일」, 26쪽)


돌이켜보면 그 시절이 가장 빛나고 영롱했다. 분명 지금의 아이들도 그러할 텐데, 우리는 자꾸만 무엇을 놓치고 실수를 반복한다. 더 나은 세상을 원하면서 더 나은 쪽으로 가기를 원하면서 아이들의 바람도 다르지 않다는 걸 왜 어른들은 방관하는가. 반성의 시간이 길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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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4-20 1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특성화고 실습생들의 여러 차례의 죽음에 대한 기사가 나올 때마다 분노와 무력감을 번번히 느낍니다. 이 시대의 10대들이 안정감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는 사회는 어려운걸까요? 어른으로서 마음이 아픕니다.

자목련 2022-04-22 10:38   좋아요 1 | URL
어른이 제대로 이끌지 못하는 현실, 부끄럽지요.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놓치는 게 아닐까 싶어요.

mini74 2022-04-20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을 착취하는 사회가 참 슬프네요.ㅠㅠ

자목련 2022-04-22 10:35   좋아요 1 | URL
네, 고통을 안겨준 일들이 소설로 다시 복기 되는 사회, 아프네요.

물감 2022-04-20 11: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진영의 작품을 읽으면 과거로 꼭 돌아가게 되더라고요. 되게 묘한 작가에요🙂

자목련 2022-04-22 10:34   좋아요 3 | URL
물감 님의 댓글로 보니 정말 그런 것 같네요. 제가 읽은 최진영의 소설이...

새파랑 2022-05-07 0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당선 축하드려요. 예전에도 최진영 작가님 글로 당선되셨던거 같은 기억이 있네요 ㅋ (아닌가? ㅎㅎ) 즐거운 주말보내시길 바랍니다~!!

자목련 2022-05-09 09:10   좋아요 1 | URL
새파랑 님, 감사하빈다. 저도 축하드려요.
최진영 작가의 소설은 뭔가 묘한 끌림이 있어요. 좋아하는 것과는 살짝 다르다고 할까요. ㅎ

mini74 2022-05-07 0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디 자목련님 *^^*

자목련 2022-05-09 09:09   좋아요 1 | URL
저도 축하드려요.
맑은 5월 이어가세요^^

thkang1001 2022-05-07 1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보내세요!

자목련 2022-05-09 09:0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즐겁고 기쁜 하루 이어가세요^^

서니데이 2022-05-07 17: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자목련 2022-05-09 09:08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 님, 감사합니다.
환한 하루 시작하세요^^

러블리땡 2022-05-08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력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ㅎㅎ 트리플시리지 정말 좋아하는데 ㅎㅎ 잘 읽고 갑니다

자목련 2022-05-09 09:08   좋아요 1 | URL
감사해요. 트리플 시리즈, 저도 더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강나루 2022-05-08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편안한 밤 보내세요.

자목련 2022-05-09 09:07   좋아요 2 | URL
강나루 님, 감사합니다.
저도 축하드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