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함을 지향하지만 마음이 복잡하다. 밀물처럼 밀려온 근심과 걱정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지 않는다. 밀물처럼 책도 도착했다. 설물처럼 빠져나가지 않아도 되는 것들. 아니, 빠져나가서는 안 된다. 연휴 시작 적에 주문한 책이다. 소설, 시, 에세이. 언제나 그렇듯 골고루 읽으려고 주문했다. 읽으려고!


모두 반가운 책이다. 좋아하는 김혜진 작가의 장편소설이 제일 반갑고 허연의 시집과 시인 유계영의 에세이는 제목을 보자 구매했다. 허연 시집은 나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 땡스투는 appletreeje 님에게. 그리고 표지에 반한 소설보다 시리즈. 올해의 소설 보다 시리즈의 표지는 다음 계절을 기다리고 기대하게 만든다. 그래서 올해의 소설보다는 계속 내 곁에 머무를 게 될 것이다. 제일 먼저 허연의 시집을 펼쳤다. 목차에서 가장 먼저 찾게 된 시는 표제작이지만 이번 시집에는 여러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우선 이런 시.

나도 나방 한 마리를 밟아 죽였다

궁금했으니까

고통 속에서만 하는 짓만이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점차 나빠지는 이야기

난 몇 가지 종류의 계절을 경험한다

나쁜 계절과 나빠질 계절

상처 수집가들이 급할 건 없다

지구의 축은 이미 기울어져 있으니까

올 것은 반드시 오고

죽을 것은 반드시 죽는다

나는 통증에 시달리며 이 구역의 계절을 만든다

슬픔에도 기술이 있다

다 죽고 나면 계절은 성당이 된다

새로 내리는 비는

슬픈 챔피언들을 불러 모은다

이 계절에는

속된 세상을 등지는 나무들이 있었다

(「계절감」, 전문)




허연의 시가 좋아서, 하나 더. 어느 시절의 내 마음 같아서. 시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라고 할까. 반갑고 좋은 책처럼 그런 일상을 살기로 한다.


자전거는 지나가고 빗물은 떨어진다

알면 쓸쓸해지고 알면 상처받는 일들을

나는 애써 들여다보려 했었다

누가 졌는지 누가 이겼는지

굳이 알 필요도 없으면서

그걸 꼭 찾아봤다

맨홀로 달려가는 빗물의 고집을

뻔히 알면서도 그 끝을 보고 싶어 했고

레몬이 땅에 떨어져 다은 몸을 받는 게

당연한 줄 알면서도

괜히 상념에 잠겼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면

살고 싶다는 생각은

죽고 싶다는 결말로 변해 있곤 했다

오늘 지나쳤던

담장 밑에 장미가 떨어져 있는 것도

애당초 내 탓 같았다

누군가 입관하는 밤에

개들만 깨어나 짖는 밤에

소독약 냄새를 맡으며 결심한다

이제

나를 위해

장미를 위해 모른 척하기로 한다

해오던 일을 여전히 하는 생명들을

그냥 모른 척하기로 한다

(「생(生)을 모른 척하기로 한다」, 전문)





반갑고 좋은 책처럼 그런 일상을 살기로 한다. 반갑고 좋은 것을 찾는 일. 친구의 바뀐 프로필을 확대하며 미소 짓는 일, 갑자기 생긴 원두를 갈아 내려마시는 조금 긴 시간, 점심에 무얼 먹을까 고민하고, 처음 알게 된 꽃을 선물하고 주문하는 일, 드라마의 다음 회를 기다리는 일. 소소하지만 대단한 일상으로 마음을 간단하고 단순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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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25-10-14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땡스투~ 감사합니다! 좋은 책들을 함께 읽는 기쁨까지요~

자목련 2025-10-27 13:09   좋아요 0 | URL
답글이 늦었습니다.
허연 시집, 좋아요^^

책읽는나무 2025-10-14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 김혜진 작가의 신간 나온 소식을 보고 장바구니에서 보관함으로 왔다 갔다 하다가 보관함으로 넣었더랬는데…역시 자목련 님은 구입하셨군요.^^
소설 보다 가을 편의 표지를 보고 예상치 못한 과실이라 좀 놀랐었는데 그래서 더 예쁜 것 같아요. 겨울 편은 또 어떤 표지일지? 저도 무척 기다리는 중입니다.
인용해 주신 시를 읽고 있자니 종일 내리는 가을비 덕분인지 시를 읽기에 적당한 계절이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자목련 님도 모쪼록 환절기 감기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자목련 2025-10-27 13:10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 저는 책은 냉큼 구매하는데, 읽기는(먼 산~~)
소설 보다 겨울은 귤이 아닐까 싶어요 ㅎㅎ
자꾸 좋아하는 작가의 책과 궁금한 책이 나와서 구매만 자꾸 하고 있어요, 큰 일이에요!

구단씨 2025-10-14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설 보다 시리즈를 수집(?)하는 중입니다.
올해 출간 작품 표지가 너무 예뻐요.

자목련 2025-10-27 13:11   좋아요 0 | URL
올해는 특히 표지가 예뻐서 표지가 구매로 이어지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 같아요 ㅎㅎ

2025-10-22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10-27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