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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림 - 1994-2005 Travel Notes
이병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해라. 시간이 없다.
사랑을 자꾸 벽에다가 걸어두지만 말고 만지고, 입고 그리고 얼굴에 문대라.
사랑은 기다려주지 않으며,
내릴 곳을 몰라 종점까지 가게 된다 할지라도 아무 보상이 없으며
오히려 핑계를 준비하는 당신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사랑해라. 정각에 도착한 그 사랑에 늦으면 안 된다.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기차다.
함께 타지 않으면 같은 풍경을나란히 볼 수 없는 것.
나란히 표를 끊지 않으면 따로 앉을 수밖에 없는 것.
서로 마음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같은 역에 내릴수도 없는 것.
그 후로 영원히 영영 어긋나고 마는 것.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세상을 이해하는 법을,
우주를 바라보는 방법을 익히게 될 것이다.
그러다 어쩌면, 세상을 껴안다가 문득 그를 껴안고,
당신 자신을 껴안는 착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 기분에 울컥해지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사랑은 아무 준비가 돼 있지 않은 당신에게 많은 걸 쏟아놓을 것이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 세상을 원하는 색으로 물들이는 기적을
당신은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이병률 시인의 <찬란>이라는 시집을 읽으면서 그는 천부적인 시인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의 언어가 그의 생각이 나를 사로잡을만큼 황홀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끌림>이라는 산문집 역시 그의 카메라 렌즈에 비춘 도시가 사람들이 나를 사로잡는다. 물론 그의 글도 나를 끌리게 만들었다.
집에 가기 싫어 여관에 간다.
집을 1백미터 앞두고 무슨 일인지 나는 발길을 돌려
1백미터를 걸어내려와 여관에 든다.
집에 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집에없어 쓸쓸한 것도 아닌데
오늘도 난 여관 신세를 지기로 한다.
(중략)
모든 확률이 존재하는 여관, 방,
그 낯선 곳에서 나는 잠시 어딘가로부터
멀리 떠나온 기분에 젖어보는 것이다. 사치하는 것이다.
'아줌마, 저 있던 방, 1박 더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한다. 그러면서 밖으로 나가는 내게
어딜 나갔다 오겠냐고 묻는다.
'네, 집에 좀 다녀오려구요.'
집을 벗어나면서부터 집이 아닌 다른 곳을 동경하며 살았던 적이 있다. 지금은 아이들과 남편, 이렇게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긴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단 생각을 할때가 가끔 있다. 연애할때부터 남편은 내게 역마살이 낀 것 같다고 말하곤 했었다. 그땐 그냥 웃어 넘기고 말았는데, 내겐 집을 떠나 살아야할 어떤 운명의 끈 같은게 연결되어 있는게 아닐까하는 의심을 가끔 하곤 한다.
집을 1백미터 앞에 두고 여관 신세를 진다는 글을 읽으며 나도 가끔 그런 낯설음을 즐기고 싶어하는 사람이란 걸 새삼 깨달았다. 어디 가까운 곳이라도, 아니 어디 먼 곳이라도 떠나보자고 남편을 조르고 또 졸라보는데 남편은 한 곳에 안주해 있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다. 결혼전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말이다.
빠듯한 생활비의 일부를 잘라내어 적금을 들어 놓은 아줌마는 언제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그 언젠가가 언제가 될지는 아직 불확실하지만, 언제든 떠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세상은 넓고 가보지 못한 곳 또한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은 아줌마는 책 한권에 실린 사진과 글을 통해 위로와 위안을 받고 있다. 그 언제 떠날 날을 기약하면서 말이다. 아, 정말 떠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