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울과 소피
상상력이란 늘 즐겁다. 나는 차가 꽉 막혀있는 버스안에 있을 때, 지각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늘 버스위를 날아가는 상상을 하곤 했던 것 같다.
영화가 처음 시작했을 때 사실은 실망했었다. 여태까지 봐왔던 디즈니등 헐리우드식(?)의 애니와는 전혀 다른.. 마치 <빨간 머리 앤>을 연상시키는 간소? 하면서도 대충 그린 것 같은 그래픽과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대충 그린 것 같은 주인공들의 외모. 에이.. 몇 장 안 그렸구나. ㅋㅋ 역시 사람은 어떤 것에든 반복하며 익숙해지면서 고정관념에 빠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곧 나의 상상 속에만 살아있던 "날아다니는 남자친구"가 나타나면서 나의 이런 투덜거림은 환성으로 바뀌었다. 더군다나 걸어다니며 삐그덕 삐그덕 혀를 날름거리는 성이란! 놀랍다 놀라워. 난 영화가 시작한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불평했고, 불평한지 채 5분도 되지 않아 놀라움과 두근거림으로 하울과 소피에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아, 인간의 간사함이란..^^;)
난 사실 이 애니의 내용이랄지, 감독의 메시지랄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난 다만 내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은 상상력의 세계들이 물이 넘치는 우물에서 물을 길러내는 것처럼 흘러나오기 시작했는데, 너무나 매력적인 소스들에 가슴이 뛰었다.
늘 언제나 하울에겐 익숙하고 낯익은 존재였던 소피가 하울을 만나는 장면은 너무 멋지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렇지 않을까? 한 사람에게는 그렇게 기다리던 사람을 드디어 만난 것이고, 한 사람에게는 전혀 중요하지도, 예쁘지도 않은 자신에게 우연히, 길에서, 매력적인 연인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하늘을 나는 남자친구라니! 할머니에서 원래의 소피로 변하기 전이라도, 그 때부터 이미 소피의 마음은 할머니가 아닌 꿈많은 소녀로 변해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 하늘을 나는 남자친구라니..ㅡㅡ;)
내가 느낀 많은 것들은 이미 너무나 많은 분들이 좋은 글들을 통해 이야기해주셨고, 나도 깊이 동감하는 바람에 같은 이야기를 또 하기는 좀 뒷북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 사실 이 리뷰를 쓸까 말까 많이 고민했지만, 이제는 이야기를 해도 이미 볼 사람들은 거의 다 봐서 영화 속 장면을 이야기해도 spoiler가 될 위험은 적은 것 같아서 몇자 적기로 했다.
<하울...>을 보며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상상력의 세계는 바로, 손잡이를 돌리면 바뀌는 성이다. 다리가 달린 성이 혓바닥을 날리며(ㅋㅋ) 돌아다니는 것도 놀라운데, 손잡이를 돌리면 바깥 세상이 변한다니. 어쩌면 내 마음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똑같은 상황이라 해도, 내 마음 속에 있는 어떤 손잡이를 돌리느냐에 따라서 세상은 밝아지기도 하고, 전쟁터가 되기도 하며 깊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빠져드는가 하면 의무와 책임으로 가득한 일터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상상력이 그다지 놀랄만한 것도 아닌 듯도 하다. 하지만, 누가 감히 생각해 내겠는가 그런 집을! (그런 집만 있다면.. ^^ 날아다니는 남자친구 데리고 산다)
자신의 꿈을 위해, 자신의 호기심을 위해, 영혼을 팔아 버린 하울을 보면서... 마법이 빠져 쭈그랑 할머니가 되어버린 황야의 마녀를 보면서, 하울을 갖기 위해서 온 세계의 전쟁을 마다않는 왕궁의 마녀를 보면서.. 무엇보다 지켜야 할 것은 역시 마음이 아닐까 생각했다. 세상이 흘러가는 섭리에 자신을 맡기며 받아들이는 지혜도 함께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울 자신과도 같았던 집이 무너짐으로 나는 하울이 죽는 줄만 알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를 구성하는 여러가지는 사실 껍데기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우리의 사회적 위치, 우리의 가정, 내가 이룬 학업, 명예, 돈. 뭐가 되든...
그것이 비록 무너지고 없어지더라도, 혹은 아주아주 조금만 남더라도 우리의 영혼이 살아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살릴 힘만 있다면 우리는 죽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혼이지 그것을 둘러싼 껍데기가 아닌 것이다. 내가,내 영혼이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나의 마음을 지키고 소중히 아껴 줄 소피를 찾는다면 불가능하지만도 않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손잡이를 돌리면 배경이 바뀌며 어디든 가고 싶은 곳에 모든 것을 가지고 갈 수 있는 매력적인 하울의 성도 하울의 영혼보다는 중요하지 않다. 아깝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