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mannerist > 목적론을 상실한 순수예술지상주의의 초상

한 예술가의 항변
2차 세계대전 당시 베를린 필하모니의 상임지휘자였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히틀러의 생일 전야제 공연 지휘, 국내외 공연 등의 연주 활동을 통해 나치 문화 정책에 협력한 혐의로 전후 전범 재판에 서게 된다. 나치당이 독일을 접수하기 전에도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푸르트벵글러는 마음만 먹었다면 다른 국가로 망명하여 그의 음악활동을 충분히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독일에 남아 나치 음악 정책에 부합하는 활동을 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한다.
“나치 치하의 독일만큼 베토벤의 음악이 필요한 곳이 어디에 있는가?”
전범재판관들은 저 진술을 꽤나 설득력 있게 받아들인 모양이다. 푸르트벵글러가 다시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로 복귀하고 숱한 명연을 남기며 전후 독일 음악계의 재건에 힘쓰다 1954년 세상을 떠난 걸 보면 말이다. 나는 지금, 그 재판관들의 추궁이 멈춘 지점에서 심문을 재개하려 한다. 그 진술 속에 나타는 그 ‘필요’의 주체는 누구이고,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이경분의 책을 준거로 삼아 저 물음을 검토해보면 정치권력 앞에 무기력했던 한 예술가의 울분 섞인 목소리는 푸르트벵글러가 의도한 순음악적 관점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진실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망명 음악, 나치 음악’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1933년 히틀러의 나치당 집권 이후 유대인, 공산주의, 좌파 진영에 대한 박해를 피해 망명한 음악가들과 이를 피하지 못하고 집단수용소에서 희생된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을 ‘망명’과 ‘집단수용소’라는 외적 환경과 결부시켜 설명한 1, 2장이 이 책의 한 축을 이룬다. 그리고 나치 치하의 독일에 남아있던 예술가들의 행태를 협력, 침묵, 동조로 나누어 설명하면서 나치의 음악 정책에 대해 상술한 3장이 다른 한 축을 이룬다. 마지막 4장에서는 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 음악계의 양상과 과거 청산에 대해 간략히 기술하고 있다. 이중 가장 주목할 만한 곳은 나치의 음악 정책과 그 테두리 안에서 그 당시 독일의 음악가들이 취한 행적에 대해 기술한 3장이다. ‘예술은 예술일 뿐’, ‘예술은 그 자체로서 가치를 지닌다’는 예술지상주의적 관점이 파시즘 체제 하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안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치의 음악 정책
저자는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베토벤이 어떻게 수용되고 이해되었는지 주목한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패배감에 휩싸인 독일인들에게 히틀러는 스스로 민족 지도자를 자처하며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종족인 아리아인에게 걸맞는 강력한 독일 제국을 건설할 것을 약속했다. 이 정치적 선전을 국민들에게 설득시키는 데 동원된 것은 논리적이고 구체적인 실현 방안이 아니었다. 나치는 말과 논리로 독일인들을 설득시키고 그들의 동의를 얻어내지 않았다. 아리아인 우월의식과 인종 차별 등 논리가 아니라 감정에 호소하는 선전과 이를 적절히 뒷받침하는 활동, 특히 인간의 감성을 쥐고 흔드는 음악의 힘에 기대어 국민들의 의심을 믿음으로, 회의를 동의로 대체시켰다. 이때 베토벤과 그의 음악은 독일인의 우월성에 대한 근거가 되었다.
Deine zauber binder wieder 험한 현실이 갈라 놓았던 자들을
Was die mode streg geteilt 신비로운 그대의 힘은 다시 결합시킨다.
Alle menschenwerden brüder 그대의 고요한 나래가 멈추는 곳
Wo dein sanfter flügel weilt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4악장 중 환희의 송가 일부)
푸르트벵글러가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4악장 ‘환희의 송가’
바그너의 악극을 공연하는 바이로이트 극장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52년 재개관할때의 공연으로, 가장 유명한 합창 연주 중 하나다.

히틀러 생일 전야제 공연에서의 프루트벵글러. 이날도 그와 베를린 필하모니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연주했다. 왼쪽 아래 박수치는 사람들 중 맨 왼쪽이 히틀러이다.
베토벤의 감동적인 음악은 나치 치하에서 시도 때도 없이 울려퍼졌다. 제국 당대회에서 히틀러가 등장할 때에 에그몬트 서곡이, 바그너 악극 축제 개막식과 히틀러 생일 전야제, 나치가 주최한 숱한 문화 행사에 베토벤의 교향곡은 울려퍼졌다. 이 과정에서 감동적인 교향곡을 작곡한 베토벤의 위대함은 독일 민족의 위대함으로,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미학적 감수성은 아리아인들만이 타고 난 능력으로 치환되었다. 나치 독일의 베토벤 컬트 현상은 고전시대 절대음악에 평생을 바친 작곡자를 민족의 영웅으로 둔갑시켜 독일 민족의 우월성과 자긍심을 고취시키는데만 머무르지 않는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6000여명의 베를린 중, 고등학생이 동원되어 울려 퍼진 “환희의 송가”와 당시 독일 악단의 수준 높은 베토벤 연주는 나치 정부의 진정한 속셈을 가리는 알리바이 구실을 한다. 대내적으로 유태인과 공산주의자, 좌파 진영에 무자비한 탄압을 자행하고 대외적으로 오스트리아를 무력 합병하는 폭력 파쇼 정권의 바람막이 구실을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라 외치는 베토벤 교향곡이 톡톡히 해낸 것이다. 그 최악의 예는 집단수용소와 게토에서 울려 퍼지던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일 것이다. 수용소의 나치 간부들은 자기 구역 하의 유대인, 반체제 인사들을 모아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수용소와 게토의 질서유지와 대외 이미지 향상에 악용하기도 했다. 적십자 같은 국제 구호 협회의 수용소 방문 때 각 게토별로 조직된 악단이 연주를 하여 조사단의 눈을 흐렸던 것이다.
베토벤은 서양고전음악사에 있어서 국경이라는 한계성에 얽매임 없이 음악언어의 보편성을 추구했던 고전시대의 마지막 작곡가이다. 그가 쉴러의 시에 부쳐 환희의 송가를 작곡했을 때 가장 중심이 된 “모든 인간은 형제가 되노라”란 구절은 18세기 프랑스 혁명 이후 전 유럽에 휘몰아친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이념에 기반해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시대적 배경과 그에 따른 해석과는 정 반대편에 서서 20세기 초 베토벤은 국수주의적으로 해석되어 나치 독일의 정권에 기대했다. ‘모든 형제’에 유태인과 공산주의자, 좌파 진영이 왜 배제되는가에 대한 물음 하나 없이 말이다. 시대적, 정치적 성격에서 가치 중심적인 음악이 특정 이념을 지닌 진영의 악용에 속수무책으로 열려 있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왔던 길을 되짚어 전범 재판에 선 푸르트벵글러의 항변을 다시 들어보자.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나치 치하의 독일은 베토벤의 음악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히틀러와 괴벨스가 소리 높여 외쳤던 ‘아리아인의 우월성’을 국민들에게 주입시켜 영광된 민족의 미래를 약속하는 나치당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수단으로, 대외적으로 독일 내에 팽배한 배제의 논리, 파시즘을 위장하는 가면으로, 그리고 집단 수용소 내의 통제와 이미지 조작의 도구로 말이다. “음악가로서 오로지 최고 수준의 음악만 할 수 있다면 주위의 정치적 문제들은 상관하지 않겠다(p. 122)”는 푸르트벵글러 개인이 독일 내의 유대인 음악가를 보호하려 애쓰고 나치가 금지시킨 음악을 푸르트벵글러 개인이 가끔 연주했다 할지언정, 2차세계대전 중 동맹국, 점령지로의 연주 여행을 다니는 그에게 괴벨스가 “그는 이제 진짜 쇼비니스트가 되었다”라는 기쁨의 메모를 남긴 이상, 순수라는 말에 매달리는 예술가들의 한계는 명확하다 하겠다.
저자가 ‘베토벤 컬트’라고까지 지칭했을 만큼 나치들이 베토벤의 음악을 그들의 목적에 따라 타락하게 이용했던 것과는 달리 현대 음악은 철저히 배제했고 재즈 음악은 겉으로 금지하며 뒤로 허용하는 모순적 행태를 보였다. 그 이유를 저자는 나치당의 음악관에서 찾는다.
먼저 재즈 음악관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미국의 하류 문화이자 동물과 다름없는 흑인들의 저속한 음악이란 이유로 나치는 재즈를 공식적으로 배척하였다. 거쉰 같은 유태인이 현대음악뿐만 아니라 재즈 음악에 남다른 두각을 보이자 나치는 이를 ‘흑인 = 재즈 = 유태인 = 현대 무조음악’으로까지 비약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재즈 음악이 암암리에 인기를 끌고 전시 체제 하에서 군인들과 시민들의 긴장 완화와 재충전에 도움이 된다는데 그들은 주목하였다. 그 뿐 아니라, 이를 금지시킬 경우 재즈 음악을 듣기 위해 적성국의 방송을 찾아 들을 염려가 있었다. 그래서 괴벨스는 독일 춤 유흥 오케스트라를 창립하여 재즈 풍이 가미된 대중음악 악단을 설립했고 이를 선전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때 저 악단은 오리지널 재즈 음악이 아닌, 재즈 풍이 가미된 독일 음악을 연주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재즈 음악의 저속하고 위험한 요소-물론 나치의 음악관에 비추어 볼 때-를 한 번 걸러서 공급한 것이다. 인종차별적인 나치의 기본 이념에 맞지 않는 문화까지 필요에 따라서 활용한 나치의 문화정책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나치 문화부장관 괴벨스는 1933년 11월, <제국문화협회 창립문>에서 “독일 음악”은 “낭만적이고 비밀스러운 운명의 힘”을 과시하는 한편 “영적 투쟁에서 투쟁적 행동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선언했다.(p.145)”
괴벨스의 이 언급에서 저자는 두 가지를 지적한다. 아리아인의 혈통 속에 올바른 음악을 감상하고 창조할 능력이 내재되어 있으며, 따라서 음악은 역사와 사회와는 관련 없는 운명적인 것이라는 점이 그 첫째이다. 음악관이 사고 과정을 거쳐 얻어지는 게 아니라 혈통 속에 내재되어있다는 관점은 음악에 대한 분석적이고 이성적인 수용 자세를 배제시킨다. 그 관점에 걸맞는 감상 행위는 그저 즉각적인 악상의 변화에 도취하고 열광하는 지극히 감성적인 자세이다. 음악이 흐를 때 아무 생각없이 귀를 열고 몸과 마음을 맡기고 즐기면 되는 것이다. 이는 나치가 원했던 인간관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나치의 정책을 행동에 옮기는 데 적극적으로 음악을 이용해야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음악을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분리시켜 시공을 초월하는 낭만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는 음악의 감정적 측면만을 강조하려는 것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이성의 기능이 약화되어 사고할 능력이 없는 인간들이야말로 나치의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때문이다. 낭만적인 감정에 마취되어 허둥대는 인간들을 만드는 것에 바로 감정에 호소하는 음악의 중요한 역할이 있었다.(p. 148)”
나치가 현대음악을 “부패의 병원균”으로 본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귓가에 쉽게 걸리지 않는 12음계, 무조음악, 불협화음, 전 시대의 악적 구성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현대음악은 필연적으로 “왜 음악가들이 이런 음악을?”, 다시 말해 “왜?”라는 물음을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왜?”라는 물음은 파시즘이 요구하는 인간상의 성격에 정 반대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역사 청산의 문제
이시하라 신타로 같은 일본 극우파 인사들이 철마다 소위 ‘망언’을 뱉어놓을 때마다 한국인들은 비분강개한다. 이때 꼭 비교가 되는 것이 전후 과거 청산에 대한 두 전범 국가, 일본과 독일의 대조적인 자세이다. 그런데 학교 교육에서 철저한 비판적 역사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독일에서조차 나치 당원이었던 카라얀이 전후 독일의 베를린 필 종신지휘자의 자리에 앉고, 나치 정권에 협력했던 인사들이 예술계의 중책에 자리잡고 전후 독일의 예술계를 쥐락펴락한 것은, 그리고 1990년대에 들어서야 과거 청산 문제가 대두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전후 소련과 미국이 냉전 관계로 돌아서면서 전후 자유로운 분위기는 꺾이고 좌파 지식인 예술가들은 다시 비난받게 된다. 게다가, ‘그저 자기 위치에서 자기의 일을 최선을 다해 했을 뿐인’ 대다수 독일 국민은 그들의 정부가 저지른 죄상을 납득하기 힘들 뿐더러 자신들의 침묵이 이를 용인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도 없었다. 음악은 이렇게 한 눈에 들여다보이지 않는 복잡한 현실을 잊고 삶의 욕구를 불러 일으키는 수단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음악에 대한 이성적인 분석보다는 그 소리의 아름다움을 통해 감정 정화를 이끌어내는 음악 청취 행태는 나치 문화정책이 추구했던 청취 자세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카라얀을 비롯한 예술지상주의자들이 전시 독일에서 누렸던 지위를 그대로 누릴 수 있었다. 땔감과 식량을 아껴가며 연주회에 참석했던 전후 독일인들은 이를 통해 전후의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했지만 동시에 전시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음악가들의 몰역사성에는 반성 없이 면죄부를 주게 된다.

전쟁 후부터 20세기말까지 독일뿐 아니라 전세계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출세를 위해 1933년 나치당에 자발적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정치 행동과 예술 행동이 확연히 구분된다는 것이 자명의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왕왕 예술 행동을 정치에까지 연장시키는 과오를 범하는 수가 많다. … 예술가가 정치에 참가될 때 얻은 것이란 정치의 실패뿐이요, 잃은 것은 예술뿐인 것이다.(김성태, 음악건설의 제언. <혁명> 제 1권 창간호, 혁명동지사 1946년 1월)”
저런 순수예술지상주의적 관점을 지니고 있던 한국 양악계의 거목 김성태는 일제시대 경성후생악단에서 지휘, 편곡 등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저 경성후생악단의 성격은 다음과 같다.
“전시하에 후생음악을 목적으로 하는 음악 행사라면 구체적 형식의 그것에 비하여 적어도 아래와 같은 대조의 조화가 있어야 한다.
- 예술지상주의에서 국가지상주의로
- 지휘 본위에서 대중 본위로
- 개인 중심주의에서 대동아공영주의로
- 영리주의에서 멸사봉공주의로
등인 바 물론 이 네 가지 조건에 합당하지 못하는 음악 행사는 현시하에서는 용납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박경호, 경성후생악단의 공연 후감, 매일신보 1946년 6월 16일자)”
정치에 휘둘림 없이 예술만을 하겠다던 전시 독일과 식민지 한국의 예술가들은 그들의 순진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파시즘 체제 옹호에 기여했다. 정치적 영역에서 가치중립적인 예술은 이런 악용에 속수무책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항상 열려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1930년 바이로이트 공연에 초청받아 바그너의 악극을 지휘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집권 이후 같은 음악제의 바그너 음악을 지휘하길 거부했던 토스카니니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신의 예술적 행위가 정치적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을 경우 단호히 선을 그어 자신의 예술을 보호하는 것이 순수예술지상주의에 기반한 행동이 아닐까?

평생에 걸쳐 반 파시즘, 반 나치주의 입장을 고수했던 지휘자 아루투로 토스카니니(Artuo Toscanini)
매년 연말이면 지난 한해를 떠나보내고 희망찬 새해를 맞자는 의미의 송년음악회 레파토리로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이, 4악장의 ‘환희의 노래’가 세계 각처에서 연주된다. 같은 곡은 나치 독일 치하에서 히틀러의 생일 전야제 공연에서 ‘위대한 독일 민족의 지도자’를 찬양하는데 사용되었는가 하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1989년 포츠담 광장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의 지휘로 독일의 통일을 축하하고 서방자유진영의 최후의 승리를 선언하는 데 울려퍼지기도 했다(환희의 노래에 등장하는 환희[Freude]라는 단어를 레너드 번스타인은 이 연주에서 자유[Freiheit]라는 말로 대체하였다는데 주목하라). 순수예술지상주의자들의 말처럼 예술 자체는 지극히 가치중립적이기 때문에 어디에서도, 누구에 의해서도, 어떤 목적에 의해서도 이용될 수 있다. 그렇다고 저런 악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인류의 문화 유산을 폐기시키는 것도 올바른 태도는 아닐 것이다. 감상자 개개인이 인간 본연의 감성을 자극하는 예술 감상의 영역과 정치적 영역을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친일 예술인들의 행적을 옹호하는 논리로 흔히 제시되는 것이 저 순수예술주의에 기반한 재능론과 기여론이다. 친일 행위의 연장에서 나온 작품들이 기법상 한국 고유의 미적 가치를 높이는 데 기여를 했다면 그 나름의 가치를 가진다는 논지이다. 예술의 궁극적 가치가 작가의 세계관과 독자의 정신적 교감에 있다는 것을 무시한 철저히 무시한 관점이다. 예술가들의 예술 행위가 ‘무엇을 위해서’라는 목적론에 눈감은 채 순수라는 말로 포장될 때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은 특정 이데올로그들의 악용이다. 이경분의 두껍지 않은 책은 나치 시대의 음악을 통해 이 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