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밥헬퍼 > 불확정된 여행을 가는 신앙인이 준비하는 것

창12:1/벧전1;13-25 읽기-모리아를 향하여

1.사진작가 빌 콜만의 사진을 몇 점 보려고 합니다. 이 가을이 어떤 색으로 다가오는지 느껴보십시오.



여기는 아미쉬공동체라는 미국의 청교도 마을입니다. 옛날 그대로의 삶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진들을 가만히 보면 ‘길’과 여행이라는 주제가 담겨 있는 듯 합니다. 가을이 되면 하고 싶은 일도 많이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여행일 것입니다. 꼭 어디를 정하지는 않아도 발길 닿는대로 가고 싶은 그런 여행입니다. 하지만 이 여행은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목적지와 준비가 없이 가는 길이 그리 간단하겠습니까?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야말로 목적지를 정하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지시하는 땅’으로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어떻게 길을 떠나야 할지, 언제쯤 도착할지 어느 것 하나 알지 못한 채로 길을 떠나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꼭 어떤 길을 보아야만 가겠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과 거리가 있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이 불확정의 길을 걸어갔다는 데에 아브람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다만 이처럼 불확정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준비해 두어야 할 것은 있습니다. 


2.

첫번째는 근신입니다. 근신은 ‘마음의 허리를 동인다는 것’인데 이것은 ‘마음’을 굳게 하거나 흔들림이 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재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신속함과 담대함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내적인 긴장상태를 항상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행동의 밑바탕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 소망은 다름아닌 ‘은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베푸심과 부르심을 기대하는 것이지요. 결국 모든 것이 가벼운 상태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이 너무 무거운 상태로 있으면 안되는 것은 재빠르게 움직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불확정의 길을 가는 데에는 운동을 통해 몸을 가볍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몸이 무거운 사람들은 운동을 하십시오. 항상 몸을 가벼운 상태로 유지하십시오.  


두번째는 구별입니다. 구별은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세상을 닮지 않고, 하나님을 닮는다는 것입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가까이 하는 것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 속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세상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닮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하나님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구별되어. 세상에 편만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과 구별되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구별짓는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하고 있는 행동입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하는 일말입니다. 사회학에서는 ‘구별짓기’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유별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위축되곤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미 모든 것에서 자신을 다른 사람과 구별짓고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유별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타인과 구별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별지으면서도 동질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또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와같이 구별되나 동질감을 갖고 살아가는 삶의 단면이 바로 ‘친구를 사귀는 것’입니다. 친구의 존재는 자신과 구별되지만 동질감을 갖는 대상입니다. 사람이 평생 살면서 좋은 친구 3명만 있으면 성공적인 삶이라고하는 것은 빈말이 아닙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는 좋은 친구가 필요합니다. 좋은 친구란 자신을 늘 비춰볼 수 있는 존재입니다. 맨날 돈만 빌려가고 안갚거나 폐만끼치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미 좋은 친구가 3명 있습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그런데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친구들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친구들을 다시 찾으십시오. 잊었다면 다시 친구를 사귀십시오. 아내와 남편이 좋은 친구로, 부모와 자식이 좋은 친구가 되는 것이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좋은 예가 되는 것입니다.

  불확정한 길을 걸어가는 여행에서는 ‘친구’의 존재가 꼭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걷는 여행은 홀로가면서 또 같이 걸어가는 길입니다.  


세 번째는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이란 무엇인가를 경외하는데서 오는 존경심입니다. 정말 존경할 수밖에 없는 존재는 우리의 내면을 꿰뚫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발적인 두려움을 갖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입견으로 보지 않고 우리의 행동과 내면의 동기를 통해 우리를 살펴보십니다. 사무엘상 16장7절에서처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이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는 말이 바로 그 뜻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를 내면과 실제 삶으로 살펴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갖는 삶이란 곧 ‘절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예의바름’과 관계된 말입니다.  ‘절제’의 반대편에 있는 말은 ‘욕심’입니다. 성경에서 절제와 비슷한 말을 하나 고르라면 그것은 ‘자유함’입니다. 절제는 땅의 욕심을 버리고 자유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금이나 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 곧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 전체를 대신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한 방송에서 '한국사회를 말한다'는 주제로 한국교회의 현재 상황을 언급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방송이 있기 전에 방송국 앞에서 방송을 해서는 안된다는 시위가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시위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막상 그 내용을 보고나니 이 생각이 더욱 굳어졌습니다. 오히려 그 내용을 통해 한국교회는 이 사회가 교회에 대하 갖고 있는 생각과 기대가 무엇인지를 더 잘 알 수 있으며 건강한 교회들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었다면 그렇게 많은 군중들이 시위하기 보다는 방송이 끝난 후 교계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방송상의 문제를 분명하게 제기하는 것이 더 지혜로운 것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제가 개인적인 견해를 이 설교에 담아 말하는 것은  이 일을 보고 한국교회가 아직도 자기 절제의 훈련이 덜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절제는 사람을 사랑하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경은 두려운 삶과 마음으로 형제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을 같이 권면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차로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갑니다. 그것은 자신 안에 더 많은 욕심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을 갖는 존재는 자신을 절제합니다. 자신을 절제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더욱 더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제는 ‘정’으로 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정은 오히려 더 쉽게 끊어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자신을 더욱 더 많이 내어주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을 훈련하고 연습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불확정한 길을 걸어가는 데 있어서 준비할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절제의 삶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3.신앙은 정해진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불확정한 길을 가는 삶입니다. 그러니 늘 자신을 가볍게 하여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차비를 하고, 좋은 친구를 사귀어두고, 더욱 더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절제하며 사랑하는 삶을 훈련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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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na 2004-10-04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리 생각해도 구구절절 맞는 말씀이다. 특히 가볍게 살아야 한다는 점과, 친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 신앙의 길은 확신과 자신감에 찬 화려하고 금빛 찬란한 길이 아니라 불확실한 길을 걸으며 평안한 마음으로 담담히 일상적인 일을 감당하는 별다를 것 없는 가운데 특별한 지혜가 살아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