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밥헬퍼 > 교회, 그 본질의 회복
에베소서1:15-23 읽기
교회, 하나님의 비전에 담긴 비밀
에베소서는 에베소라는 이방인들의 땅에 바울이 깊은 애정을 가지고 목회한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이 작은 교회를 향한 편지 속에는 온 우주의 비밀을 담고 있는 교회의 참된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함께 나눈 말씀처럼 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이 세상에 갈라진 채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통일되는, 하나로 모여지는 비밀이 있고 그것이 이미 영원한 시간 속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곳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외형적으로 연약한 교회였지만 그들에게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굳건한 믿음이 생겨났고, 교회공동체의 구성원들 사이에 깊은 사랑의 교제가 쌓여갔습니다.
슈바르츠가 실시한 자연적 교회 성장에 관한 조사에서 교회의 크고 작음은 외형으로만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에베소 교회도 그러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어떻게 구체적인 실천으로 드러나는가와 그 신앙공동체 구성원들이 어떻게 긴밀하게 서로 교제를 가지며 얽혀져 있는가?하는 것에 의해 건강한 교회가 드러날 것입니다. 온 우주를 담고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교회의 크기와 관계없이 동일하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교회가 커진다고 그 외형이 커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 땅의 교회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이미 온 우주를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감추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잘 드러날 수 있는 도구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제 에베소 교회의 믿음과 교제를 생각하면 할수록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와 함께 그들이 교회의 큰 비밀을 더욱 잘 간직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15-23절에는 이렇게 기도하는 기도의 내용과 그 기도의 내용을 통해 더욱 새롭게 드러나는 교회 안에 담긴 비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앙의 양면성으로서 '믿는 것’과 ‘아는 것’의 문제
먼저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내용은 당시의 에베소 교회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의 비밀에 참여한 우리들도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직도 신앙인들 사이에서 정리되지 않은 논쟁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에 있어서 지식이 중요하냐, 아니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머리만 커지는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신앙이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경공부나, 설교가 지적으로 흐를 때 많이 지적합니다. 감동은 없고 이성적으로만 판단하게 되는 그런 신앙에 대한 회의입니다. 참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교회가 뜨거우냐, 미지근하냐?라는 판단을 내릴 때에도 이러한 사실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는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모든 일을 다 그만두게 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주일 예배 때 듣는 말씀이 공부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봉사하는 일에만 몰두하게 합니다. 또 어떤 교회는 알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계속해서 가르칩니다. 성경도 가르치고 신앙인의 삶도 가르칩니다. 거의 매일 강좌를 열어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몰려듭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통계는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고 주일 예배의 목사 설교에만 모든 것을 강조하며 봉사와 헌신에만 몰두하게 될 때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이 점점 무엇인가 아쉬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지적 욕구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입니다. 반면에 지적인 노력을 강조하는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대단한 만족감을 누리면서 생활하지만 반면에 어떤 일을 실천할 수 있는 열정이 약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상황판단과 분석, 그리고 어떤 일에 대한 계획 등등은 논리정연하게 잘 할 수 있지만 막상 일을 하려고 하면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합니다. 자신이 비전이 명확하게 발견되는 일에만 참여하는 상황이 생기게 됩니다. 교회가 공동체라기보다는 그저 한사람, 한사람이 자기의 신앙유지에만 몰두하게 되는 그런 결과가 된 것입니다.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특별하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어떤 일이 진행될 때 그 일이 끝날 때까지 도대체 그 일이 자신의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일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교회 소식에 대해 별 관심없기 때문에 ‘참 좋은 일이구나“생각하면서도그 일이 자신의 교회에서 이루어진 일인지를 모르는 예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재의 교회의 상황에서 우리는 에베소서의 기도에 주목해야 하는데 기도하는 내용의 핵심은 ‘아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더 잘 믿기를’, 또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재정이 풍부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 교회가 무엇인가를 ‘잘 알기를’기도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이상과 그 놀라운 비밀이 제대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이 ‘앎의 문제’ 온전해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머리만 커지는 신앙인’은 문제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머리도 커지지 않은 신앙인’은 분명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잘 알아가기를
이제 우리가 본문을 통해 듣게 되는 가장 중요한 앎의 문제는 하나님을 더욱 잘 알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단순히 믿는 일이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열정이 잘 드러내기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큰 신앙을 갖고 있는가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 다시 말해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야 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믿는다는 것보다 안다는 것은 더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신앙인들치고 하나님을 못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 부딪히면 하나님을 잘 알 수 없다고 하소연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그러신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그처럼 잘 믿고 있는데 왜 하나님은 그런 행동을 하시는 것일까?도대체 내가 믿고 것은 제대로 된 것인가?하는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책을 통해서도 완전하게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의 지적인 노력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실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 안에 이러한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와 그 말씀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을 제대로 발견하는 것입니다. 성경 구석구석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본래 성품과 모습을 막연히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입니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의 차이는 믿는 것은 나와 직접 관계없는 일이 될 가능성이 높지만 아는 것은 그것이 나와 직접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제일 머리만 커진 신앙인은 무조건 믿는다는 사람입니다.
이 지혜와 계시의 영을 통해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알도록 하실 때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마음눈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이 ‘마음눈’이 밝아진다는 것이 인간이 최고의 지식을 가진 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이 지식이 머리 안에 담겨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최고의 경지는 그것을 머리에 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담겨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의 육안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눈을 열어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을 머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으로 읽고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무조건 믿는 신앙이 아니라 그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깨닫고 그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그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그런 지식인 것입니다.
교회의 놀라운 비밀 속에 참여한 우리들은 그 비밀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계시의 영을 받아 우리의 마음눈을 밝게 해서 우리가 지금 바라보야 할 것을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눈이 밝아지기를
본문은 계속해서 기도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눈이 밝아지게 될 때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3가지의 사실에 대해 구체적인 지식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눈을 밝히 열어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첫째, 소명 그 부르심을 아는 것
하나님이 왜 나를 부르셨는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어떤 기대를 갖고 계시는 것인가?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내 마음 눈을 열어 하나님의 나를 부르신 소망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의미를 고민하는 것에서 나아가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어떤 기대를 이루실려고 하는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나는 왜 하나님에 의해 붙잡혀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되었는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기에 나를 부르신 것인지 그것을 알도록 마음 눈을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여러분을 부르셨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실 때 어떤 자격을 생각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초대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을 때 하나님이 갖고 계셨던 소망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어릴적 제가 다닌 교회의 어른들은 가난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그 때 많은 분들이 늘 고민하며 생각했습니다. ‘왜 하나님을 믿는데 우리처럼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만 모이게 했을까?’ 교회의 일을 의논하다보면 그런 점이 아쉬울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경제적인 면에서, 사회의 지위면에서, 학력면에서 만약 다른 어떤 것으로 우리를 살펴본다면 하나님이 나를 부르실 이유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을 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소망은 나로 하여금 아브라함처럼 복의 근원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더 궁극적인 소망은 이 세상이 나를 통해서 어떤 환경에서든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분이라는 것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구약의 욥기 1장과 2장에는 하나님과 사탄이 등장하여 대화를 합니다. 이스라엘 지혜문학의 절정인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욥이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제대로 섬겼다는 점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욥기를 통한 신앙의 지혜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데에는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제기하는 문제입니다. 사탄이 하나님을 향해 욥을 시험의 대상으로 삼아 이야기하는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어떤 보상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잘 믿으면 복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고난을 잘 견디면 후한 보상으로, 고난 중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으면 그 보상으로 하나님이 반드시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미리 알고서 그 보상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신앙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대는 이것과는 좀 다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나를 제대로 믿는 사람들은 그런 보상과는 관계없이 나를 섬기고 나의 삶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탄의 주장과 하나님의 주장이 대결하는 장이 바로 욥기의 세계입니다. 아무런 보상이 없이도 하나님이 온 우주의 통치자이시므로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부르실 때 가진 하나님의 기대와 소망은 우리가 어떤 댓가가 주어지는 것과는 관계없이 이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난과 부유함, 명예와 평범한 삶과는 관계없는 그런 기대인 것입니다.
둘째, 교회의 궁극적 목적을 아는 것
우리의 마음눈이 밝아지면 신앙공동체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기업이 얼마나 풍성한 것인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성도 안에서’라는 표현입니다. 마음 눈이 밝아져 우리가 제대로 갖게 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업’, 즉 ‘유산’이 개인으로만이 아니라 ‘성도 안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주어지는 가장 큰 기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다시말해 ‘천국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지금 우리는 천국의 삶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국은 곧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그것은 죽음 이후에 우리가 갈 수 있다는 죽음을 이기기 위한 방법으로서, 우리를 위안하는 그런 죽음 이후의 땅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계, 즉 샬롬이라는 온전한 평화가 지배하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갇힌 자도 없고, 눈물도 없으며,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영원한 기쁨과 소망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찬송가222장 ‘보아라 즐거운 우리 집’은 참 아름다운 가사와 곡조로 우리의 삶을 천국과 연결지어 주고 있습니다. “보아라 즐거운 우리집 밝고도 거룩한 천국에, 거룩한 백성들 거기서 영원히 영광에 살겠네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거운 집에서 거기서 거기서 영원히 영광에 살겠네”
부르면 부를수록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 되새기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삶의 현장은 어떠합니까? 지금 이 세계는 악과 폭력, 거짓, 살인, 가난, 집없음, 식량의 낭비와 부족이 공존하고, 성의 구별이 사라지고, 성이 남용되어 혼란한 세계가 지속되지 않습니까? 공정해야 할 법은 더욱 법을 이용해 자신의 유익을 채우기 위해 혈안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작은 집을 버리고 더욱 큰 집을 향해 전진합니다. 지금도 이 땅에는 햇볕도 들지 않은 지하에서 하루하루의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계가 이렇게 험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의 법칙이 아니라 자본주의 법칙 또는 극단적인 사회주의의 사고를 가지고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 땅의 신앙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그들의 마음눈을 밝혀 우리에게 주어질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제대로 보고 있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1970년 이후 이 땅에 거대하게 성장한 많은 교회들은 겨우 30년도 지나지 않아 그 안에 감추어진 거짓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질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아니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예들입니다. 그래도 ‘ 그렇게 성장한 교회들인걸’, ‘거기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보면 뭔가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것이지’, ‘성장도 못하는 주제에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런 말을 해서 곤란하지만 한국의 장자교단이라고 하는 ‘총회’의 현장을 직접 참관한 사람들은 더 이상 한국 교회에 소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저는 교회의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아마 나에게 좋은 이야기, 그저 유익한 이야기 다 좋은 것이 좋은 거니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 나에게 나도 알고 있는 상식적인 이야기를 자기만 아는척하거나, 또 뭔가 고상한 것을 아는 척하며 가르칠려고 할 때 기분나쁜 표정으로 ‘설교하지마’라고 말합니다. 설교는 무엇입니까? 우리 시대의 설교는 그런 비아냥거리거나,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억지로 듣게하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뜻하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험한 세상을 살면서도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나라 속에 있음을 알고 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협하는 모든 악의 세력들의 존재가 나의 죄 때문인 것을 알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나를 구원하셔서 나를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할 증인으로 세우셨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있는 거룩한 신앙공동체 안에서 그 소망을 늘 발견하는 것입니다. 혼자만의 신앙이 아니라 다른 신앙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사는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온전한 평화를 누리는 천국의 삶을 기대하며 나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 우주의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그 분이 피조물로서 이 땅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하나님이 가진 능력의 크기를 아는 것
마음의 눈이 밝아져 하나님의 능력의 크기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의 크기에 대해 본문은 좀 더 구체적인 예들을 부연설명해 줍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크기는 세가지 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것이 죽음이라는 인간의 최고 한계를 넘어셨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이 하나님의 능력의 크기입니다. 세상 어떤 것이 죽음을 넘어서서 다시 살아나게 하는 능력을 보여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 능력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바로 내 안에서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삶을 영원토록 이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 빨리 죽어 떠나버려야지’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이 삶이 영원하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그에게 새로운 삶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모든 만물이 그 발아래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이 세상의 모든 세력이 굴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크기는 이 세상의 모든 세력이 그의 이름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눈 앞에는 더 큰 세력으로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 앞에 머리를 숙일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거대한 테러의 참사를 경험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무엇을 생각합니까? 하나님은 이 처참한 현실 속에서 무엇을 생각하며 계실까?하는 것입니다. 수 천명의 생명이 한꺼번에 사라져버린 이 일을 보며 많은 사람들은 그 속에 악의 존재가 있다는 것과 유명한 예언가의 예언의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많은 나라들이 미국을 동정합니다. 미국은 더욱 더 전쟁의 위협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온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사라지는 일 속에 미국의 존재는 엄연히 살아있습니다. 그들이 팔아넘긴 무기는 지금도 아프카니스탄에서 미국을 향해 서 있습니다. 자신들이 팔아넘긴 무기와 자신들이 대치하고 있는 미국의 현실을 우리는 제대로 읽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곳곳에서 미국 사람들에 의해 사라져간 수많은 목숨들은 수천명을 넘습니다. 하지만 그 때도 이 세계는 아무도 단 한마디의 목소리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미군에 의해 처참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지만 그때도 우리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은 모두가 미국이 옳고 그 상대방은 나쁘다는 논리에 얽매여 있습니다. 부시는 다시한번 연방의회연설에서 모든 나라들에게 미국편에 서든지, 테러범들의 편에 서든지 양단간에 결정하라고 재촉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이 세계는 지금 악의 위협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죄가 만들어 낸 죄의 결과입니다. 사진에 악의 형상이 나타나고 어떤 숫자가 악마의 숫자를 감추고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 우리는 나로부터 생겨난 죄의 결과가 거대한 빌딩이 무너지고 인종간에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죄의 세력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악이 이기는 것 같지만, 그러나 악은 반드시 멸절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악 그 자체든 스스로 선한 척하는 악이든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악의 세력 속에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스스로를 구별하고 자신을 정결하게 지켜내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의 영을 통해 마음의 눈을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의 크기에 관한 세 번째 측면은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세우신 것에서 나타납니다. 교회는 온 우주의 축소판입니다. 이 안에는 모든 것이 가득 차 있습니다. 교회는 이 땅의 갈라진 모든 것이 통일되고 회복되는 역사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비밀이 가득한 곳입니다. 바로 이 교회가 하나님의 능력의 크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 분의 몸입니다. 이 교회 안에 모든 세계가 있고, 이 세계 안에 교회가 있으면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 모든 세계가 있다는 것과 이 교회가 이 세계 안에 있다는 사실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모든 세계의 비밀이 있음과 동시에 우리교회는 이 산본에 금정동에 이 상가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를 비현실적인 존재로 생각해서도 안되고 교회를 그저 사람들의 모임 정도로만 생각해서도 안되며, 교회를 한 개인, 한 개인으로만 생각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런 의미를 지니면서도 모든 만물이 충만한 교회는 이 땅에, 이 지역에 이 공간에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회의 성육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가 이 땅에 이렇게 몸을 입고 이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이 교회가 이 땅의 삶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 험하고, 죄로 가득찬 땅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는 존재로 당당하게 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대해 배척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당대의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대속제물로 주신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이 땅의 문제에 대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교회의 전통은 그러한 교회의 본질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거대한 교회는 늘 폐쇄되어있고 사람들은 주거환경에서 교회가 없는 곳을 선호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기 때문에 배척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지난 번에 말씀드린 동양학에 근거한 종교학자인 오강남교수의 “예수는 없다‘라는 반기독교적 사상의 책이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는 것은 교회의 현 주소를 알게 해 줍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와같은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아는 지식이 없으면서도 그처럼 능숙하고 현란한 문장으로 ’예수는 없다‘를 쓸 수 있는 것은 다 교회를 통해 얻은 얄팍한 지식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르 제대로 아는 지식이 없이도 그처럼 많은 사람들에 읽힐 수 있는 책을 써 낸 일에 대한 책임은 지금의 교회에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런 책을 금서로 지정할 수 없는 이유는 교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하나님의 비밀을 세상에 드러내는 사람들
에베소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이 기도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교회의 현실을 이겨낼 지혜가 담겨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되어 우리의 마음눈이 밝아져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무궁무진한 비밀을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를 향하도록 깨어 기도하는 것과 온전하게 예배하는 교회의 실천을 다시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