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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몽 ㅣ 혜원 월드베스트 36
김만중 지음 / 혜원출판사 / 1998년 8월
평점 :
<九雲夢>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자 몇이나 될까? 예전에도 잘 넘어가지 않는 책장 앞에서 변명처럼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시 국문학 공부하는 이상 제대로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안고 책장을 넘기려니, 손놀림이 더욱 더뎌진다. 그러다, 문득... 이러고 있는 내 모습이 진정 나인가, 아닌가를 생각하게 되자, 책장이 술술 잘 넘어갔다.
성진이 양소유로 환생하여 여덟 낭자들과의 인연을 맺어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재미 그 자체였다. 웃음도 나고, 긴장도 되고, 부럽기도 하고, 괜히 멋있게 느껴지기도 했다. 서포의 문장력 때문인지 양소유의 다재다능한 능력들은 마치 눈앞에서 펼치지는 듯한 매력남의 인상을 남긴다. 또, 우아한 난양공주와 정소저, 꾀많은 가춘운, 순정파 진채봉, 똑소리나는 계섬월, 단호한 용기를 지닌 적경홍, 신비로운 백능파, 멋진 검객 심요연에 이르는 여성들의 모습은 모두 내가 한번쯤 꿈꾸어온 이상적인 여인상이기도 했다.
이들을 둘러싼 다른 인물들도 매우 개성적이었는데, 태후로서의 엄격함과 자애로움을 갖춘 황태후라든가, 정많고 호탕한 정십상랑의 모습들을 김만중은 매우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더군다나, 군데군데 전체소설의 구조를 완성시키는 복선들이 눈에 띄었는데, 육관대사가 등장하는 장면들이 그것이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나타나 소유에게 넌지시 암시를 주고 떠나거나, 아니면 소유에게 성진의 삶을 기억하는지를 묻는 장면들은 참으로 절묘하다.
김만중이 장주의 胡蝶之夢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형상화낸 것은, 그가 높은 관념의 세계를 상상해내는 탁월한 사유체계를 가졌기 때문인 듯 싶다. 요즘 떠들썩하게 대중의 아부에 편승하여 노자나 금강경을 강의하는 도올이 구운몽의 높은 상징성을 제대로 알까 싶다. 그는 대중의 입맛에 맞게 성인의 말씀을 끌어내리는 데에는 탁월하나, 대중의 사유를 성인의 말씀으로 가기 위한 단계로 끌어올려주는 깨달음의 세계를 제시하지는 못하니..., 구운몽에 담긴 김만중의 목소리는 그에 비하면 참으로 깊고 오묘하다.
김만중은 <九雲夢>의 결말에서 만족함이 없는 세속적 삶을 깨닫고, 본성(本性)으로 도(道)를 얻어야 함을 말하였다. 흔히들 세속적 삶을 깨닫는 것을 깊은 산 속에 처박혀 혼자만의 세계에 몰입하는 것인 양 착각한다. 하지만, 세속적 삶을 살아보지 않고서 어찌 그것의 허무함을 알리요? 세속적 삶 속에서 주어진 본분을 다하고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최대한 즐기며 인생에 혼신을 다하는 자만이, 그 다음에 찾아오는 허상에 대한 깨달음(이도저도 아닌 상태의 혼란이 아닌, 헛것과 본성이 자연스럽게 구분되어 자유롭게 처신하는 경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비가 곧 장주요, 장주가 곧 나비일 수 있는 것이다. 나비로서의 삶에 충실하여 그 기쁨을 누려야 달콤한 꿈에서 개운하게 깨고, 장주로서 나비의 꿈을 깊이 깨달아야 다시 나비가 되는 꿈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九雲夢>은 나비의 꿈을 강조한 것도 아니요, 장주의 깨달음을 강조한 것도 아닌 듯 싶다. 장주의 깨달음 운운하며 속세의 삶을 비난하고 천시하는 자들에게는 나비의 꿈이 주는 에너지가 전달될 것이오, 속세의 삶에 도취되어 도(道)의 세계를 부정하는 쾌락주의자들에게는 장주의 깨달음이 계시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로베르토 베니니가 감독하고 주연한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 (Life Is Beautiful)'를 보면 아들 죠수아를 위해 천진난만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아버지 귀도가 등장한다. 그는 죠수아의 눈높이에 맞추어 인생을 논하고 설계해준다. 육관대사가 성진에게 베푼 뜻있는 환생체험은 귀도의 거짓말 같다. 그리고, 내가 사는 삶도 누군가가 내 존재를 깊이 염두에 두어 베풀어주는 나비의 춤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니, <九雲夢>덕택에 '인생이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