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슬 시티
김성령 지음 / 코리아닷컴(Korea.com)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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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따라 취향은 제각각이고 좋은 소설의 기준도 제각각일 것이나 한 가지 만은 대부분 동의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좋은 작품에서는 그 세계와 함께 인물들이 살아서 움직인다. 작가들의 인터뷰를 보다보면 등장인물이 무슨 일을 벌일지 자신도 모르겠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작가 자신이 쓰고 만들어놓은 인물들과 이야기임에도 때론 그들 스스로도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게 좋은 소설이 아닐까? 탄탄한 설정과 잘 만들어진 캐릭터가 작가의 틀 안에 머무르지 않고 살아서 움직이는 순간, 그것들이 씨실과 날실로 엮이어 수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닐까? 필자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아니러니 한것은 명작을 읽을때는 오히려 이러한 점들을 잘 느끼지 못하고 평작을 통해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항상 곁에 있을때는 소중함을 모르다가 잃고 난 뒤에서야 절실하게 깨닫는 것처럼...

 

[바이슬 시티]는 작가만이 있는 소설이라고 느껴진다. 작가의 생각과 언어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캐릭터들은 작가가 그어놓은 선 위를 꼭두각시처럼 밟아 나간다. 돌출행동이 없으니 위기또한 있을리 만무하다. 개연성 없는 이벤트들은 독자에게 다가오지 못하고 작가와 꼭두각시 캐릭터에 의해 완성되어 버린다.

 

설정또한 단순하다. ‘왜'와 ‘어떻게'가 빠진채 미국의 한복판에 외부와 완전히 격리된, 그러면서도 민주주의 체제하에 있는 거대 도시를 떠억하니 심어놨다. 그리고 ‘대통령'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른다는 한마디로 ‘바이슬 시티' 존재 자체, 그리고 내부에서 벌어지는 모순되는 일들을 모두 합리화 해버린다. 그냥 책 소개에서의 설정만을 보면 꽤나 독특한 설정이긴 하다. 알려지지 않은 목적으로 격리되어 세워진 도시. 안개처럼 깔리는 음모의 기운이 느껴지면서 무언가 커다란 미스테리가 함께 할 것 같다. 그러나 정작 뚜껑을 열어보면 ‘왜'도 없고 ‘어떻게'도 없어 전혀 설득력이 없다. 다가오지가 않는다. 현대의 우화로서, 또는 [눈먼자들의 도시]와 같은 사고실험으로서의 작품이라면 이러한 설정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가, 제한된 상황에서 어떤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것이 중요할테니 말이다. 하지만 [바이슬 시티]는 이도 저도 아닌 그냥 일반 소설이다. SF도 환타지도 아니다.

 

어쩌면 한 바구니에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고 한 것일까? 어떻게 보면 제한된 공간이라는 설정은 어떤 사고실험의 의도라고 볼 수도 있고, 이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현대 사회 부조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으니 우화적인 요소를 갖추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단지 그렇게 볼 수도 있을 뿐이다. 끊임없이 ‘외부'와 차단되어 있다던가 ‘지배당’의 세뇌가 어떻다던가 이야기 하고는 있지만 그 안에 사람들의 모습은 그냥 우리 도시의 사람들과 별다 바가 없다. 이러한 환경이라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모순을 찾아볼 수 없다. 아니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제한'적인 공간, ‘격리'된 도시를 느낄수가 없다. 그저 이러저러한 상황이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산문이나 지식 교양서적이 아닌 다음에야 그 상황을 느낄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소설인 것이다. [바이슬 시티]의 이야기는 이러한 제약위에 성립되는 것인데도 가장 근본이 되는 이 부분이 설득력이 없다보니 이후의 이야기도 그저 미리 놓여진 레일위를 평이하게 달려갈 뿐이다. 한 가지 더 아쉬운 것은 미스테리적인 요소를 살려내지 못한 것이다. 물론 이 소설은 추리소설도 스릴러 소설도 아니다. 그러나 이미 가지고 있는 장점을 사용하지 않을 이유는 전혀 없었다. 격리된 도시라는 설정에서 미스테리의 요소는 이미 주어진 것이다. 이를 좀더 활용했더라면 완성도는 일단 둘째 치고라도 독자의 몰입도를 높여 좀더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잘 전달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막에, 황무지에 생명력 넘치는 밀림이 펼쳐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근본 지질이 약한 땅 위에 선 캐릭터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을것이다. 캐릭터가 살아 움직이지 못하니 하나하나 작가의 손으로 옮겨줄 수 밖에 없을테고 그러다 보니 이야기는 모두 작가의 의도대로만 흘러갈 수 밖에 없었으리라. 이렇게 작품에서 작가는 신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자신의 작품에서 작가가 신이 된다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은 없으리라. 문제가 있다면 독자들에게까지 신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바이슬 시티]는 확실히 15세의 나이에 보이기 힘든 예리한 사회 인식이 담겨 있기는 하다. 대범한 상상력에 더해 5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의 작품을 두달만에 집필했다는 것은 작가의 범상치 않는 필력을 짐작하게도 해준다. 그러나 그 뿐 아직 자신만의 색깔도 보이지 않고 독자를 끌어들이는 흡인력도 부족하다. 무엇보다 소설로서의 완성도가 모자란다고 생각한다. 확실히 작가 '김성령'은 작가로서의 가능성은 결코 모자라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가능성만 가지고 사라져간 작가들이 얼마나 많을까? [바이슬 시티]는 좋은 재료를 가지고 볼 품 없는 작품이 나온 격이다. 훌륭한 장인이라면 길가의 돌맹이를 가지고도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만들 수 있는 법이다.

 

필자는 완성작을 가진 작가들을 높이 평가한다. 완성도가 어떻다든가 재미가 어떻다든가 하는점을 떠나서 하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써 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을 함부로 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필자의 입장에서 더구나 전문 비평가는 고사하고 관련 교육도 받아보지 못한 입장에서 하나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필자의 생각의 틀렸을까 심히 두렵다. 무엇보다 부끄럽다. 그러나 처음부터 느낀대로 두들겨 보자고 시작한 리뷰였으니 그저 읽고 느낌대로 두들기려고 노력할 뿐이고, 이번 [바이슬 시티]의 느낌은 앞서와 같다. 다만 산고의 고통끝에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어놓은 작가에게 좋은 말을 써주지 못해 죄송할 다름이다. 작가 '김성령'이 제련된 언어와 완성도로 돌아오기만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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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터스 블랙 로맨스 클럽
리사 프라이스 지음, 박효정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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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신 그대로일 때 가장 솔직하지 못하다. 그에게 가면을 주어 보라. 그러면 그가 네게 진실을 말할 것이다"

- 오스카 와일드 -

 

 

오랜만에 마지막 장까지 숨가쁘게 달린 소설이다. ‘쉿~!’ 미모의 소녀가 은밀한 세계로 초대하는 듯한 모습으로 표지를 장식한 ‘리사 프라이스'의 [스타터스]는 SF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500페이지라는 제법 두툼한 분량 내내 긴장감을 유지하는 미스테리로 독자를 잡아끈다.

 

근미래. 치사율 100%의 또다른 상호 파괴 무기인 생물학 폭탄이 미국에 떨어지면서 2년에 걸친 태평양 연안국 전쟁은 승전국이 없는 전쟁으로 결말지어지고, 백신을 미처 맞지 못한 사람들, 대부분의 중장년층이 전쟁의 여파로 사라진다. 이제 미국의 얼굴은 '엔더'라고 불리는80세 이상의 노인들과 ‘엔더(Ender)’보다 더 적은 수의 '스타터(Starter)'라고 불리는 10대 이하의 청소년들로 바뀐다.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수명이 200세까지 늘어난 세계. 기득권층이자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엔더들은 자신들의 일거리 보존을 위해 재빠르게 연장자 고용 보호법을 만들고, 미성년자들의 취업은 불법으로 규정된 상황에서 전쟁으로 보호자를 잃은 ‘스타터'들은 길거리로 내몰려 집행관들을 피해 살아가거나 비인간적인 수용소에서 19세가 될때까지 강제노역으로 살아가게 된다.

 

주인공 캘리는 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다. 아픈 동생에게 약은커녕 밥조차 제대로 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몰리자 결국, 그 저의가 의심스러운 ‘프라임 데스티네이션'과 계약을 맺게 된다 . 그들의 사업은 ‘신체 대여'! 직장을 가질 수 없는 ‘스타터'의 싱싱한 육체를 부유한 ‘엔더’들에게 고가에 대여하는 사업이다. 생존을 위한 그녀의 선택은 과연 어떤 결과를 낳게 될까?


네트워크를 통한 인체 점유라는 소재는. 제법 진지한 철학적 문제를 담아낼 수 있었으나 블록버스터의 프레임에 묻혀 비운에 사그러진 영화 [써로게이트(Surrogates)](개인적으로는 정말 괜찮은 SF 수작이 될 수 있었던 작품인데 아쉬워요. 영화로는 치명적이게도 재미가 없었단 말이죠. ㅡㅡ;;)와 [게이머], 그리고 미드 [돌 하우스(Doll House)] 등을 떠오르게 한다. 아! 그러고보니 초대박 흥행 신화를 써내려간 ‘제임스 카메룬' 감독의 [아바타]도 비슷한 설정을 채용했었다.

 

SF 팬으로서 이렇게 인간의 정신을 제어하는 설정은 라이트 세이버와 초광속의 우주 여행에 비해 비록 시각적인 자극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지적인 자극은 더 강한 소재가 아닐까 싶다. 필자는 물질세계의 극단에 이르러서야 정신세계의 깊은 탐구가 이루어 지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인데, 일단 먹고는 살아야 고민도 하는 법 아닌가? 실제로 빔 무기나 우주 여행등은 부분적으로나마 현재도 실행되고 있는 현실에서 [스타워즈]나 [스타트렉]의 세계가 [스타터스]의 세계보다는 더 가까운 미래라는 것이 더 논리적일 것인데도, 오히려 이러한 ‘정신 제어'의 세계가 훨씬더 현실감 있는 근미래로 느껴지는것은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리사 프라이스'는 이러한 근미래형의 소재를 잘 활용한데다 주인공이 그대로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끌고가는 1인칭 시점의 장점 또한 잘 살려내, 현장감과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끝까지 미스테리의 구도를 유지하여 읽는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양극화의 현상을 전쟁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경제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도 중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장년층을 삭제함으로써 더욱  간명하게, 극단화된 세상을 만들어낸 작가의 대담한 센스는 칭찬을 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어디서 이렇게 뛰어난 작가들과 새로운 이야기들이 속속 등장하는지 이거야 말로 커다란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한가지 아쉬웠던 점이라면 이야기의 결말이다. 스포일러가 될 듯 하여 차마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뭔가 그 헐리우드식의 ‘인기있으면 속편으로 돌아올께' 식의 트릿한 마무리는 심히 아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스타터스]의 세계에 미련이 남아서일까? 독특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뛰어난 재능을 지닌 작가가 자신의 작품세계의 근간으로 삼을만큼의 독창성과 확장성을 지닌 세계관은 아니라고 느껴지는 바, 확실하게 이야기의 결말을 짓거나 혹은 독자에게 확실하게 남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하나의 작품과 세계관을 완성시켜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만약 후속작을 염두에 두었다면 그건 그거대로 확실하게 이어지는 이야기를 암시할 수도 있었을텐데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결말을 냄으로써 작가의 얄팍한 계산만 보여주는 듯 하여 그 결말에의 아쉬움은 금할 길이 없다.

 

제멋대로 별점은 재미있다에 4, 외형및 편집에 3, 소장가치에 3 대충 평균 3점 주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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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우정 - 전신마비 백만장자와 무일푼 백수가 만드는 감동실화!
필립 포조 디 보르고 지음, 최복현 옮김 / 작은씨앗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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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부패된 채로 죽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압델은 내가 마치 자신에게 부여된
지상 최대의 과제라도 되는 듯 잠시도 관심으 끈을
놓지 않고 끊임없이 나를 보살펴 주었다.
또한 그는 아주 작은 신호에도 주의를 기울이며
내가 곤란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는 답답한 병원에 감금되다시피 있을 때면
기발한 방법으로 나를 석방시켜 주었고,
내가 약해질 때마다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줗었다.
내가 의기소침해 있거나 우울해질 때면
그는 기필코 나를 웃게 만들었다.
그는 나의 사랑스러운 ‘악마지기'다

 

[1%의 우정]은 1998년과 2004년에 각각 프랑스에서 출간된, 글라이더 사고로 전신이 마비된 백만장자 ‘필립 포조 디 보르고'의 자전적 에세이인 [두 번째의 숨결]과 [악마지기]를 한권으로 묶어낸 책이다. 국내 개봉한 영화 [언터처블: 1%의 우정] 처럼 표지도 광고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영화화 책 둘다 본 입장에서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이 책은 영화의 원작은 아니다. 영화는 두 주인공 ‘필립'과 ‘압델'의 캐릭터와 [악마지기]에서의 모티브를 가지고 영화화 한 것이다. 영화는 주인공이 처해있는 상황에 비해 유쾌하고 담담하게 그들의 우정을 그려낸 수작이었지만 책은 자전적 에세이 답게 ‘필립 포조 디 보르고'의 절망과 희망, 사랑과 우정등의 감정을 스스로의 감정에 충실하게 서술하고 있는 느낌이다.

 

[악마지기]는 주로 ‘압델'과의 우정을 그리고 [두 번째 숨결]은 그의 평생의 사랑인 ‘베아트리스'와 자신의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두 이야기를 읽으며 필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생각했다. ‘베아트리스'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도 사랑이지만 ‘압델'과의 우정은 정말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정화가 아닐까? ‘압델'의 분방한 캐릭터는 영화에서도 제법 엽기적이었지만 책에서는 경악스럽기까지 하다. 눈감고 운전하다 추돌사고, 그것도 사지 마비인 그의 친구와 함께 타고 있음에도 수차례 추돌 사고를 내는 것 하며 요양하러 간 수도원에서 여자를 꼬시기도 하고, 정말 못말린다. 그러나 ‘필립'은 그가 잘못했다는 말을 단 한차례도 하지 않는다. 그를 한 인간으로서 존중하고 그의 생명력과 자유분방함을 사랑한다. 필자가 만약 그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오래전에 해고였을텐데 말이다. 그의 ‘악마지기' ‘압델' 또한 처음으로 그에게서 가족을 느꼈다며 그와 함께 진정한 우정을 이어간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들은 영화처럼 유쾌하기만 한 것도 아니요 계속해서 희망과 깨닳음만을 이야기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에세이는 그가 처한 상황답게 우울의 그림자가 에세이 전반에 희미하게 깔려있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반복해서 찾아오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삶과 사랑과 가족과 우정을 이야기한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백만장자이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에서도 삶과 사랑을 이야기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돈이 없다면 단지 생명을 연명하는 것만으로도 벅찰테니. 그러나 가진것이 크면 잃은것 또한 큰법. 자신의 사고에 이어 그의 사랑까지 비운에 가버린 절망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그의 정신은 그의 이야기 속에서 결코 삿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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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894년 여름 - 오스트리아인 헤세-바르텍의 여행기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 지음, 정현규 옮김, 한철호 감수 / 책과함께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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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오스트리아 여행가인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이 1894년 여름에 조선을 다녀가 1895년 독일에서 출간한 여행기를 번역한 것으로, 서양인의 눈으로 본 개항기 조선의 사회, 문화 보고서다.

 

 

 

이렇게 꽤나 기대감을 갖게 한 책은 그러나 총칼의 무력에 기반한 우월감에 젖어 있는 오만한 유럽인의 편향적이고 왜곡된 시선이 전면에 흐르는 매우 실망스러운 여행기였다. 여행기라는것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것을 적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여름 한철 고작 몇개월로는 절대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일들이 마치 직접 보고 겪은듯이 묘사되어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에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은 일부분 뿐이고 태반이 자료를 참고하거나 다른 이에게서 듣고 적은 것이다. 더구나 어디서 어디까지가 들은 이야기이고 어디까지가 자신이 겪은 일인지 그리고 느끼고 생각한 것인지 구분이 안된다. 전부 다 자신의 경험처럼 쓰여져 있는데 여기서부터 저자를 믿을 수 없다.

 

기술의 발달로 과거만큼 세계 각국의 문화적 차이가 크지 않은 현대에도 타국에 잠깐 들른 정도로 그 나라를 이해한다고 말하면 어불성설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100여년전의 외국인이 한철, 그것도 서울에서만 체류한 것으로 우리나라를 제대로 볼 수 있을리 만무하니 그의 여행기에서 보이는 다양한 오류는 어느 정도 감안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을 적어야 하는 여행기에, 그것도 조선을 다룬 서적이 타인의 보고로 된 책밖에 없어서 직접 방문 했다는 주제에 거의 태반이 남에게서 들은 이야기라는 것은 기본적인 성실성이 의심스러운 것이다.

 

더구나 저자는 제대로된 역사인식도 없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히 교양이 있거나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다. 비록 여행기 곳곳에서 꽤나 날카로운 인식과 풍부한 견문이 엿보이고 제법 세세한 사항을 성실하게 기록한 부분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저자가 참고한 자료와 이야기 대부분이 조선 현지인이 아닌 중국과 일본 그리고 얼마 안되는 조선 주재의 유럽 영사들에게서 들었다는것을 확연히 알 수 있는데, 이렇게 외국인의, 그것도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중국과 일본 그것도 아니면 총칼과 대포로 쇄국을 뚫고 들어온 유럽 열강의 편향된 시각으로 색칠되어 있는 자료를 기반으로 한 이 여행기에 신뢰가 갈리 없는 것이다. 애초에 편견에 가득찬 잘못된 여행가이드를 읽고 여행을 한 셈이다. 그것도 아무 비판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데다가 여행 자체도 매우 짧은 기간에 극히 일부의 지역만을 다녀갔을 뿐이니, 저자가 여행 경험만 많을 뿐 얼마나 한심한 헛똑똑이인지 이로써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스운것은 저자가 끊임없이 우리나라를 미개한 나라로 표현하는 것이다. 중세부터 시작해서 19세기까지 페스트로 인해 수천만의 사망자를 기록하고, 목욕 문화 자체가 없어 몸에서 나는 냄새를 가리기 위해 향수를 개발한 동네에서 온 주제에 조선의 거리와 집들이 지저분 하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과 조선의 기후환경도 고려하지 못하는 한심한 소견으로 일본 집들의 개방성을 칭찬하고 조선의 집들은 음침하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나라에는 귀족의 부패도 없고 여인들의 정략결혼도 없다는듯 조선 관료의 부패와 왕가 외척세력과 정략결혼을 비난하고 있다. 중세 봉건제도 하에서는 영주가 초야권까지 있던 동네에서 그리고 레이딘 퍼스트라는 말로 교묘하게 성차별을 하는 자신들은 인식하지도 못하고 조선의 여인들이 노예취급을 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더니 딱 그꼴이다.

 

물론, 저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당시 조선의 모습이 전부 잘못되었다거나 자랑스럽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는 세계적으로는 대 격변기이자 조선 왕조로서는 몰락의 시기였다. 누가 보더라도 당시 조선의 모습이 그리 보기 좋지는 않았을텐데, 남의 나라에 강도처럼 총칼들고 쳐들어와 그 몰락에 한축을 담당한 유럽인에게 이러쿵 저러쿵 듣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무엇보다 저자가 여행기 전반에 들어내고 있는 유럽의 우월성 이라는 것도 생각해 보면 고작 총칼에 의지한 힘자랑일 뿐이다. 저자 스스로 생각하듯 그네들의 문명이 대단해서가 아닌 것이다. 자기 나라 배때기 불리겠다고 주권국에 쳐들어가 근대화를 빌미로 식민지화하고 착취하고 말 안들으면 쏴죽이는 그네들 이야말로 야만인인 것이다.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수백만을 학살할 나라 사람에게 미개인 취급 받는것이야 말로 개그가 아니고 무엇이랴. 저자의 우월감의 근원은 총칼을 기반으로하는 무력일 뿐인 것이다.

 

왜 출판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이 한심한 여행기에서도 생각할 거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필자는 이 여행기를 읽으며 몰락하는 왕조의 모습을 생각했다. 역사를 연구가의 입장에서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각 왕조의 끝이 서로 다른 모양일지 모르겠지만 일반인인 필자가 읽어본 몇몇 역사 교양서에서 본 왕조의 끝은 어느나라 어느왕조를 막론하고 서로 그림으로 그린 듯 똑같았다. 지도자의 무능과 향락, 외척과 귀족 권력의 극대화, 당연한 듯 이어지는 부정과 부패, 격심하게 벌어지는 계층간 격차...등등, 판에 박은듯 했다. 고등학교 시절 한 국사 선생님은 이러한 왕조의 몰락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나라가 망할 때가 되어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는 ‘운명론’과 이런 일들로 인해 망하게 되었다는 ‘결과론’의 시각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과연 무엇이 정답일까? 어느 것이 정답인지, 어떤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지만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왕조가 아닌,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이러한 왕조의 몰락기의 양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름아닌 세계 패권국이라는 미국이다. 현대판 경제 카스트라고 할 수 있을만한 극심한 계층 격차와 부의 편중, 금력과 무력을 동원한 무리한 확장정책, 정치권의 무능과 부패등 미국이라는 이름만 왕조로 바꿔주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만큼 훌륭하게 전제 왕조 말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다녀갔던 조선도 이러한 왕조의 말기에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말기의 현상이 조선에도 나타났음을 이 여행기 뿐만 아니라 다양한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데 특히 이번 여행기를 읽으며 안타까웠던 것은 여행기에 실린 고종 임금님의 승정원 일기를 읽으면서였다.

 

나의 생각과 뜻은 밤낮으로 백성과 국가의 안녕을 향해 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을 위해 더 많은 것을 하길 원한다.

 

도처에서 나는 몰락과 가난을 목격하고 있다. 백성들은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 이 모든 것이 내게는 커다란 짐이다. 왜냐하면 나는 선조들이 걸어온 길을 이어서 걸어갈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법 질서가 혼란을 겪게 되었고,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상벌은 아무 효과를 내지 못하고, 거짓말과 위조가 판을 치고 있다. 재정 담당 부서와 군사 담당 부서에서는 주도적인 원칙이 무시되고 있고, 관리들은 그 자리를 감당할 능력이 없으며, 모든 것이 퇴보하고 무너지고 있다. 관리들은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최고위 관료들조차도 더러운 소유욕을 보이고 있다. 반면 이들은 부하들을 다루는 데는 너무 관대하다. 그들이 의무를 위반해도 처벌하지 않고,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든 오늘만 괜찮으면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러니 국가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겠는가?

 

나는 너무나도 슬프고 부끄럽다.  총체적인 개혁과 단호한 조처 없이는 이 나라를 구할 수 없다. 하지만 이는 ‘조정(삼정승)’의 의무다. 이를 위해 이들은 민간 행정과 재무 행정 그리고 장군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이들이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정확히 보고를 해주길 원한다. 말하는 것이 의무인데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심각한 죄를 짓는 것이다. 하지만 말을 하기는 해도 듣는 사람이 없다면 그 죄는 내게 있다.

 

내 말을 명심하라! 그대들에게 의무를 다하라고 두 번 요구하지 않기를 바란다!

 

 

- [승정원일기], 고종 31년 갑오(1894) 6월 6일(양 7월8일)

 

이러한 인식을 가진 나랏님이라면 적어도 무능과는 거리가 멀지 않았을까? 심지어 여행기 내에서 저자가 반란군으로 묘사한 동학혁명을 이끌었던 전봉준 장군의 글에서조차 “현재의 주인인 우리의 왕은 관대하고, 공평하며, 자비롭다. 천지신명이 그가 깨끗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정직하고 근면한 신하들이 그를 보좌했다면, 우리는 요순의 덕치와 문제, 경제 시대의 치세를 누렸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끝에는 말할 수 없는 비장함이 있음인데 한 나라의 몰락임에 말해 무엇하랴! ‘운명론’이 옳은지 ‘결과론’이 옳은지는 알 수 없으나, 이와 같은 나랏님을 갖고서도 왕조의 몰락을 막을 수 없었다면 이것이 결코 단순한 원인으로 시작하고 쉽게 그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님은 알 수 있으리라.

 

흔히 말하듯 과거는 미래의 열쇠이다. 더구나 우리의 역사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 아니라 ‘아산지석(我山之石)’인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지나간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를 살고 미래를 여는 열쇠로서 되돌아 봐야할 때라는 생각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교훈도 없고, 독특한 시각도 없고, 객관적 사료의 가치도 떨어져 보이며, 무엇보다 재미도 없는, 도대체 왜 출판되었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이 여행기에서 그나마 우리가 가졌었던 나랏님이 모습을 살짝 엿볼 수 있었음이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간만에 먹여보는 제멋대로 별점은 재미있다에 1, 외형 및 편집에 2, 소장가치에 0 대충평균 1점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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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이외수 장편소설 컬렉션 6
이외수 지음 / 해냄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에게는 생소한 ‘네크로필리아'를 소재로 [괴물]의 이야기는 철가방 하얀 솔개, 협객, 도인, 시인등 개성 넘치는 인물들과 함께 그의 독특한 언어로 실타래처럼 얽혀 흥미 진진하게 펼쳐진다. 이 책은 재미있다. 생소한 소재와 설정, 독특한 캐릭터, 작품 전체를 꿰뚫고 있는 삶의 성찰과 철학들까지 그만의 언어로 엮어지고, 펼쳐지는 이야기는 단숨에 독자를 사로잡는 마력이 있다.

 

그의 소설은 현실과 환타지를 넘나든다. 아니, 현실속에 환상이 있다. 아니, 그의 세계에서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오래전에 몇편의 단편집을 읽긴 하였으나 장편으로는 처음 만나는 ‘이외수'의 소설  [괴물]은 문학 작품에 있어서 장르의 구분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었다.

 

예측을 불허하는 상상력과 톡톡 튀는 언어의 연금술을 펼치는 작가. 천재, 광인, 기인, 시를 쓰는 거지, 춘천의 명물 등 다양한 호칭을 가지고 있는 작가. 그의 작품마다 모습은 다르지만 항상 빠짐없이 등장하는 깨닳음을 얻은 도인의 모습은 그의 자화상이 아닐까?

 

‘이외수' 그는 정녕 기인인가. 영화 [아라한 장풍 대작전]에 도사역의 까메오로 출현한 그를 기억한다. 장풍을 쏘는 도인의 모습이 너무도 어울리는 작가. 67의 나이에 SNS를 통해 트친들과 소통하고 자신의 초당에 방문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만든 음악을 먼저 들려준다는 사람. 선한 눈을 가진 꿈꾸는 소년 ‘이외수' 나는 그가 좋다.

 

P.S-제가 가지고 있는 책은 1,2권 분권으로 되어있는 구판인데, 오래전에 읽었던 책을 리뷰를 위해 꺼내봤더니 벌써 10년이 지난 책으로 어느덧 절판되고 통권 양장으로 개정판이 나와있군요...ㅎㅎ 그것도 ‘이외수' 장편소설 컬랙션으로... 으앙~~ 탐나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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