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1894년 여름 - 오스트리아인 헤세-바르텍의 여행기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 지음, 정현규 옮김, 한철호 감수 / 책과함께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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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오스트리아 여행가인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이 1894년 여름에 조선을 다녀가 1895년 독일에서 출간한 여행기를 번역한 것으로, 서양인의 눈으로 본 개항기 조선의 사회, 문화 보고서다.

 

 

 

이렇게 꽤나 기대감을 갖게 한 책은 그러나 총칼의 무력에 기반한 우월감에 젖어 있는 오만한 유럽인의 편향적이고 왜곡된 시선이 전면에 흐르는 매우 실망스러운 여행기였다. 여행기라는것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것을 적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여름 한철 고작 몇개월로는 절대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일들이 마치 직접 보고 겪은듯이 묘사되어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에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은 일부분 뿐이고 태반이 자료를 참고하거나 다른 이에게서 듣고 적은 것이다. 더구나 어디서 어디까지가 들은 이야기이고 어디까지가 자신이 겪은 일인지 그리고 느끼고 생각한 것인지 구분이 안된다. 전부 다 자신의 경험처럼 쓰여져 있는데 여기서부터 저자를 믿을 수 없다.

 

기술의 발달로 과거만큼 세계 각국의 문화적 차이가 크지 않은 현대에도 타국에 잠깐 들른 정도로 그 나라를 이해한다고 말하면 어불성설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100여년전의 외국인이 한철, 그것도 서울에서만 체류한 것으로 우리나라를 제대로 볼 수 있을리 만무하니 그의 여행기에서 보이는 다양한 오류는 어느 정도 감안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을 적어야 하는 여행기에, 그것도 조선을 다룬 서적이 타인의 보고로 된 책밖에 없어서 직접 방문 했다는 주제에 거의 태반이 남에게서 들은 이야기라는 것은 기본적인 성실성이 의심스러운 것이다.

 

더구나 저자는 제대로된 역사인식도 없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히 교양이 있거나 똑똑해 보이지도 않는다. 비록 여행기 곳곳에서 꽤나 날카로운 인식과 풍부한 견문이 엿보이고 제법 세세한 사항을 성실하게 기록한 부분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저자가 참고한 자료와 이야기 대부분이 조선 현지인이 아닌 중국과 일본 그리고 얼마 안되는 조선 주재의 유럽 영사들에게서 들었다는것을 확연히 알 수 있는데, 이렇게 외국인의, 그것도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중국과 일본 그것도 아니면 총칼과 대포로 쇄국을 뚫고 들어온 유럽 열강의 편향된 시각으로 색칠되어 있는 자료를 기반으로 한 이 여행기에 신뢰가 갈리 없는 것이다. 애초에 편견에 가득찬 잘못된 여행가이드를 읽고 여행을 한 셈이다. 그것도 아무 비판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데다가 여행 자체도 매우 짧은 기간에 극히 일부의 지역만을 다녀갔을 뿐이니, 저자가 여행 경험만 많을 뿐 얼마나 한심한 헛똑똑이인지 이로써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스운것은 저자가 끊임없이 우리나라를 미개한 나라로 표현하는 것이다. 중세부터 시작해서 19세기까지 페스트로 인해 수천만의 사망자를 기록하고, 목욕 문화 자체가 없어 몸에서 나는 냄새를 가리기 위해 향수를 개발한 동네에서 온 주제에 조선의 거리와 집들이 지저분 하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과 조선의 기후환경도 고려하지 못하는 한심한 소견으로 일본 집들의 개방성을 칭찬하고 조선의 집들은 음침하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나라에는 귀족의 부패도 없고 여인들의 정략결혼도 없다는듯 조선 관료의 부패와 왕가 외척세력과 정략결혼을 비난하고 있다. 중세 봉건제도 하에서는 영주가 초야권까지 있던 동네에서 그리고 레이딘 퍼스트라는 말로 교묘하게 성차별을 하는 자신들은 인식하지도 못하고 조선의 여인들이 노예취급을 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더니 딱 그꼴이다.

 

물론, 저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당시 조선의 모습이 전부 잘못되었다거나 자랑스럽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는 세계적으로는 대 격변기이자 조선 왕조로서는 몰락의 시기였다. 누가 보더라도 당시 조선의 모습이 그리 보기 좋지는 않았을텐데, 남의 나라에 강도처럼 총칼들고 쳐들어와 그 몰락에 한축을 담당한 유럽인에게 이러쿵 저러쿵 듣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무엇보다 저자가 여행기 전반에 들어내고 있는 유럽의 우월성 이라는 것도 생각해 보면 고작 총칼에 의지한 힘자랑일 뿐이다. 저자 스스로 생각하듯 그네들의 문명이 대단해서가 아닌 것이다. 자기 나라 배때기 불리겠다고 주권국에 쳐들어가 근대화를 빌미로 식민지화하고 착취하고 말 안들으면 쏴죽이는 그네들 이야말로 야만인인 것이다.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수백만을 학살할 나라 사람에게 미개인 취급 받는것이야 말로 개그가 아니고 무엇이랴. 저자의 우월감의 근원은 총칼을 기반으로하는 무력일 뿐인 것이다.

 

왜 출판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이 한심한 여행기에서도 생각할 거리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필자는 이 여행기를 읽으며 몰락하는 왕조의 모습을 생각했다. 역사를 연구가의 입장에서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각 왕조의 끝이 서로 다른 모양일지 모르겠지만 일반인인 필자가 읽어본 몇몇 역사 교양서에서 본 왕조의 끝은 어느나라 어느왕조를 막론하고 서로 그림으로 그린 듯 똑같았다. 지도자의 무능과 향락, 외척과 귀족 권력의 극대화, 당연한 듯 이어지는 부정과 부패, 격심하게 벌어지는 계층간 격차...등등, 판에 박은듯 했다. 고등학교 시절 한 국사 선생님은 이러한 왕조의 몰락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나라가 망할 때가 되어서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는 ‘운명론’과 이런 일들로 인해 망하게 되었다는 ‘결과론’의 시각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과연 무엇이 정답일까? 어느 것이 정답인지, 어떤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지만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왕조가 아닌,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이러한 왕조의 몰락기의 양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다름아닌 세계 패권국이라는 미국이다. 현대판 경제 카스트라고 할 수 있을만한 극심한 계층 격차와 부의 편중, 금력과 무력을 동원한 무리한 확장정책, 정치권의 무능과 부패등 미국이라는 이름만 왕조로 바꿔주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만큼 훌륭하게 전제 왕조 말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다녀갔던 조선도 이러한 왕조의 말기에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말기의 현상이 조선에도 나타났음을 이 여행기 뿐만 아니라 다양한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데 특히 이번 여행기를 읽으며 안타까웠던 것은 여행기에 실린 고종 임금님의 승정원 일기를 읽으면서였다.

 

나의 생각과 뜻은 밤낮으로 백성과 국가의 안녕을 향해 있다. 하지만 나는 이들을 위해 더 많은 것을 하길 원한다.

 

도처에서 나는 몰락과 가난을 목격하고 있다. 백성들은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 이 모든 것이 내게는 커다란 짐이다. 왜냐하면 나는 선조들이 걸어온 길을 이어서 걸어갈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법 질서가 혼란을 겪게 되었고,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상벌은 아무 효과를 내지 못하고, 거짓말과 위조가 판을 치고 있다. 재정 담당 부서와 군사 담당 부서에서는 주도적인 원칙이 무시되고 있고, 관리들은 그 자리를 감당할 능력이 없으며, 모든 것이 퇴보하고 무너지고 있다. 관리들은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최고위 관료들조차도 더러운 소유욕을 보이고 있다. 반면 이들은 부하들을 다루는 데는 너무 관대하다. 그들이 의무를 위반해도 처벌하지 않고,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나든 오늘만 괜찮으면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러니 국가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겠는가?

 

나는 너무나도 슬프고 부끄럽다.  총체적인 개혁과 단호한 조처 없이는 이 나라를 구할 수 없다. 하지만 이는 ‘조정(삼정승)’의 의무다. 이를 위해 이들은 민간 행정과 재무 행정 그리고 장군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나는 이들이 아무것도 숨기지 않고 정확히 보고를 해주길 원한다. 말하는 것이 의무인데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심각한 죄를 짓는 것이다. 하지만 말을 하기는 해도 듣는 사람이 없다면 그 죄는 내게 있다.

 

내 말을 명심하라! 그대들에게 의무를 다하라고 두 번 요구하지 않기를 바란다!

 

 

- [승정원일기], 고종 31년 갑오(1894) 6월 6일(양 7월8일)

 

이러한 인식을 가진 나랏님이라면 적어도 무능과는 거리가 멀지 않았을까? 심지어 여행기 내에서 저자가 반란군으로 묘사한 동학혁명을 이끌었던 전봉준 장군의 글에서조차 “현재의 주인인 우리의 왕은 관대하고, 공평하며, 자비롭다. 천지신명이 그가 깨끗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정직하고 근면한 신하들이 그를 보좌했다면, 우리는 요순의 덕치와 문제, 경제 시대의 치세를 누렸을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끝에는 말할 수 없는 비장함이 있음인데 한 나라의 몰락임에 말해 무엇하랴! ‘운명론’이 옳은지 ‘결과론’이 옳은지는 알 수 없으나, 이와 같은 나랏님을 갖고서도 왕조의 몰락을 막을 수 없었다면 이것이 결코 단순한 원인으로 시작하고 쉽게 그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님은 알 수 있으리라.

 

흔히 말하듯 과거는 미래의 열쇠이다. 더구나 우리의 역사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 아니라 ‘아산지석(我山之石)’인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지나간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를 살고 미래를 여는 열쇠로서 되돌아 봐야할 때라는 생각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교훈도 없고, 독특한 시각도 없고, 객관적 사료의 가치도 떨어져 보이며, 무엇보다 재미도 없는, 도대체 왜 출판되었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이 여행기에서 그나마 우리가 가졌었던 나랏님이 모습을 살짝 엿볼 수 있었음이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간만에 먹여보는 제멋대로 별점은 재미있다에 1, 외형 및 편집에 2, 소장가치에 0 대충평균 1점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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