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무자년(戊子年)이 시작된 지도 한 달이 지났습니다. 연초에는 으레 새로운 각오와 함께 많은 계획을 세우기 마련입니다. 새로운 정부 출범에 따른 기대는 물론 경제에 대해서도 소망을 갖게 되는데 국가 경제가 살아나고 경기가 풀려서 서민들의 생활이 좀 더 좋아지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와 함께 2008년도는 서로 나누고 베푸는 한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나눔의 삶을 실천한 사람들은 많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이 시대를 살면서 꼭 본받아야 할 위인이자 나눔을 실천한 스승 한 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 분은 바로 성산(聖山) 장기려(張起呂, 1911-1995) 선생입니다.

선생은 1911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나 1995년에 생을 마치기까지 소외된 이웃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봉사의 삶을 살다 간 '참 의사'로서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분입니다. 1928년 송도고보를 졸업한 선생은 가정 형편상 수업료가 비싼 세브란스의전을 포기하고, 수업료가 적은 서울의대의 전신인 경성의전에 입학합니다. 이때 그는 “들어가게만 해주신다면 의사 얼굴 한번 못보고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노라”고 서원했다고 합니다. 경성의전을 수석졸업한 후로부터 '선한 의사' 장기려의 인생은 시작됩니다.

선생은 6.25전쟁으로 인해 북에 가족을 남겨둔 채 남하한 후 부산 복음병원 원장으로 40년을 근무했고, 돈과 사욕을 멀리 한 채 말년에는 병원(고신의료원) 10층의 20평 남짓한 사택에 거주하며 가진 것 없이 검소하게 살다가 생을 마쳤습니다. 또 북에 두고 온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한평생 절개를 지켜 45년을 홀로 지내기도 했습니다. 치료비가 없어서 고민하는 환자들을 몰래 돌려보내기 일쑤여서 항상 병원 행정직원들의 볼멘소리를 들어야 했다고 합니다. 국내 최초로 초기 간암환자를 대량 간 절제술로 완치시킨 선생은 학문적으로도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보험제도가 없던 시절에는 부산에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여 국내 의료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선생은 그의 수입의 일정액을 매달 '남을 돕겠다고 약속한 일'에 썼으며, 79년에 수상한 막사이사이 상금도 진료장비 확충을 위해 모두 헌납했습니다. 집 한 칸 없는 것에 대해서도 '정년퇴직한 복음병원 명예원장으로 있어 그 사택에서 살면 족하다'고 말하고는 '늙어서 별로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은 다소 기쁨이긴 하나 죽었을 때 물레밖에 안 남겼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드러내지 않고 우리 곁에 너무 가까이 있어 오히려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장기려 박사의 파란만장한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충분한 귀감이 될 만합니다.

또한 선생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평생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했으며, 무소유와 무소유적 교회관을 삶의 지표로 삼고 이 시대를 살다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러한 삶의 결과로 그는 '가진 것이 없는 청빈한 자',  '물질주의 원리가 지배하는 교회보다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가 나타나는 교회를 더 사모했던 자'로 우리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참다운 스승을 찾기 어려운 시대에 진정한 의인(義人)이요 스승이라 할 수 있습니다.

97년 12월 생명윤리연구소가 출범하면서 장기려 선생의 아호를 빌려 '성산 생명의료윤리연구소'라는 명칭하게 된 것은 참으로 뜻 깊은 일입니다.

작은 촛불 하나가 세상을 밝히듯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며 나눔의 삶을 산 장기려선생을 본받아 아름다운 세상, 함께 더불어 사는 2008년도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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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2008-02-15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문의 품위한 한층 더 올라가는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