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이성복



          1


         등 뒤로 손을 뻗치면 죽은 꽃들이 만져지네


         네게서 와서 아직 네게로 돌아가지 못한 것들


         손을 빼치면 온통 찐득이는 콜타르투성이네


         눈을 가리면 손가락 사이로 행진해가는 황모파(黃帽派)


         승려들, 그들의 옷은 11월의 진흙과 안개


         김밥 마는 대발처럼 촘촘한 날들 사이로 밥알


         같은 흰 꽃 하나 묻어 있었네 오랜 옛날얘기였네


 


           2


         그대 살 속에 십 촉짜리 전구 수천 빛나고


         세포 하나하나마다 곱절 크기의 추억들


         법석거리니 너무 어지러워 눈을 감아도


         환하고 눈뜨면 또 어지러워 늘 다니던


         길들이 왜 이리 늙어 보이는지 펼쳐놓은


         통치마 같은 길 위로 날들은 지나가네


         타이탄 트럭에 실려 시내로 들어가는 분홍빛


         얼굴의 돼지들처럼, 침과 거품 흐르는 주둥이로


         나 완강한 쇠창살 마구 박아보았네 그 쇠창살


         침과 거품 흘러내려 흰 고드름 궁전 같았네


 


          3


         11월, 천형의 땅 삶긴 번데기처럼 식은


         국물위에서 11월, 기다리지 않았으므로


         노크 한번 하지 않았으므로 11월, 미구에


         감긴 눈으로 쏟아져들어올 흰 눈 흰 밀가루


         포대 터져 은박지로 구겨질 겨울 11월,


         이젠 힘이 부쳐 일어서지 않는 성기


         포르노처럼 선명한 욕망의 밑그림 11월,


         삼켜지지 않는 뜨거운 수제비알 같은 여름


 


           4


         겨울의 입구에서 장미는


         붉은 비로드의 눈을 뜨고


         흰 속눈썹처럼 흔들리는 갈대


         돼지 멱따는 소리로 우는


         가을꽃들의 울음을 나는


         듣지 못한다 초록 네온사인


         '레스토랑 청산' 위로 비가


         내리고 나는 세상의 젖은 몸


         위에 "사랑한다"라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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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4-11-24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지인께서 이성복의 시집을 선물해주셨어요. 읽고 싶었던 시집이나 왠지 너무 가까운 사이가 될까봐 일부러 피해 다녔던 시집이에요. 어쩔 수 없이 읽고, 가슴에 품어야 할 것 같은 예감이네요..

에레혼 2004-11-24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멋진 조화라고 말씀해 주시니, 정말 '조화'스럽다고 느껴지는걸요^^ 11월이 어느새 져 버리고 있는 이즈음, 가슴에 저며드는 몇 구절이 밟히더라구요 "네게서 와서 아직 네게로 돌아가지 못한 것들" .... "세포 하나하나마다 곱절 크기의 추억들 법석거리니 너무 어지러워 눈을 감아도 환하고 눈뜨면 또 어지러워 늘 다니던 길들이 왜 이리 늙어 보이는지"..... 이렇게 날들이 흘러가고 있네요.



플레져님, 그런 기분 알 것 같아요, 오래 기다려 왔던 것을 막상 갖게 되었을 때 바로 끌러 보지 못하고 밀쳐 두는 기분...... 이성복도 오랫동안 찬탄과 애모의 염을 강하게 품고 있다 보니 어느 순간부턴가 환멸과 피곤으로 바라보게 되는 그런 시인이 아닐까 싶어요.

그나저나 방금 님의 방에서 헤이리 사진이랑 단아한 님의 모습을 보고 오는 길이었는데..... 역시 플레져님은 플레져답더군요!




선인장 2004-11-24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에 치여 한 시간이 아까운 와중에는 이런 시를 읽으면 안 되는건데... 마음이 자꾸만 얼마 남지 않는 11월을 붙들고 밖으로만 헤매입니다. 돌아오지 않을까봐 걱정이네요.

2004-11-24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세상의 젖은 몸 위에 사랑한다라고 쓴다..비교적 원만한 싯구군요..ㅎㅎ 추억이 떠오릅니다. 정겨워요...

에레혼 2004-11-25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인장님, 요즘 월말이라 일이 무척 바쁘신가봐요.... 그럴 때일수록 마음이란 녀석은 자꾸 밖으로만 나돌아 다니려고 하지요. 마음 꼭 붙들어다 앉히고 따뜻한 목도리로 친친 감아 두세요... 마음의 감기가 더 지독하고 힘들어요...... 우리 선인장님한테 뜨겁고 달콤새콤한 유자차 한 병 보내 드리고 싶네!

에레혼 2004-11-25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교적 원만해서 안심하셨나요, 참나님? ^^

대충, 재밌게, 자신을 마음껏 사랑해 주며 사는 참나님이 보기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