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 들은 베시 스미스나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를 빼고는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어느 누구의 영향을 받은 적이 없다. 나는 단지 베시의 비음과 루이스의 필링을 원했다. 때때로 사람들이 내 스타일은 어디서 발전했냐고 묻는다.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만일 여기 어떤 곡이 있어 그것을 부르고 싶다고 하자. 사람들은 어떻게 부를까에 신경 쓰겠지만 나는 단지 느끼려 할 뿐이다.  그 느낌을 그대로 솔직하게 노래하면 듣는 사람들도 뭔가를 느끼지 않겠는가? 생각, 편곡, 연습 따위는 필요 없었다. 오직 느낄 수 있는 곡만이 필요했다. 때로는 지나치게 감동한 나머지 노래로 부를 수조차 없는 곡도 있었다."

 

Billie Holiday - I Love You Porgy
(1984년에 제작된 BBC 다큐멘터리 'The Long Night of Lady Day' 중에서)

 

http://mediafile.paran.com/MEDIA_815115/BLOG/200411/1100437730_a.wmv

 


 

 

 

 

 

 

 

 

 

 

 

 

언젠가부터 소설이 읽히지 않았다.  글자들이, 문장들이 아무런 느낌을 불러일으키지 않아서 당혹스럽고, 그리고 좀 쓸쓸해졌다. 내 앞에 남아 있는 시간들을 무얼 하며 살아갈까.  또 무엇으로든 어떻게든 시간을 쓰면서 살아지기야 할 테지만, '책이 재미없어진 삶'이라니.... 일찌감치 보험금을 다 타 먹어 버린 사람마냥 막막하고 허랑해지는 느낌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위안과 해답은 역시 얼마 전에 환멸과 무미건조함으로 다가왔던 책에서 찾아졌다. 머리에서 쥐어짜듯 만들어진 문장들이 아닌, 수학 공식처럼 잘 짜여진 글이 아닌, 장식도, 치장도 없이 조금 거칠고 무뚝뚝한  '다큐멘터리' 같은 글들이  내게 다시 어떤 의욕과 애정을 불러일으켜 주었다.

 

"그는 정물화 한 작품을 그리기 위해 100번의 작업을 해야 했으며, 초상화 한 작품을 그리기 위해 150번의 포즈를 요구했다. 우리가 그의 작품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세잔느 자신에 있어서는 단순히 그림에의 한 시도요, 하나의 접근에 불과했다...... 그림은 그의 세계였으며, 그가 살아나가는 방식이었다." 

심심하고 허전했던 어느 날 들른 서점에서 우연히 빼어든 책의 첫 장에서 이 구절을 만나고는 그대로 이 책을 사들고 와버렸다. 그냥 그 구절 때문이었다. 우연히,라고 했지만, 이렇게 되고 나면 어떤 운명적 자력이 작용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책은 메를로 뽕띠의 <의미와 무의미>이다.

다시 의미와 무의미가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는 시간들 속으로 건너간다.

 다시 소설을 읽을 수 있게 돼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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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1-20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인님, 자명한산책님 방으로 와요.

캡쳐 이벤트 중인데 두 명이 안 오네요. 빨리~~~~

로드무비 2004-11-20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미와 무의미를 묻지 않기로 했더니 사는 게 다소 편해지더군요.

라일락와인님, 반갑습니다.

며칠만이네요.^^
지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를 부르는 여인...참 예쁘네요.
그런데 이것도 나중에 로긴이 풀릴지......
아무튼 추천하고 퍼가요.^^

내가없는 이 안 2004-11-20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일락와인님, 잘 지내셨어요? 빌리 홀리데이는 밤에만 듣게 되던데 님의 서재에서 정오 전에 들었네요. 오늘내일 짬이 없을 스케줄에 뛰어들기 전에 느긋하게 잘 들었어요. 주말 잘 지내세요!

2004-11-20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걍 삽니다..^^ 반가워욥!

브리즈 2004-11-21 0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너가"야 할 때가 있는 거 같아요, 가끔은. 계기가 메를로-퐁티가 아니었더라도 말이죠.

멋진 사진과 어우러진 글이 맵시가 나네요. ^^.. 주말 잘 보내세요..

에레혼 2004-11-21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며칠간 뜸하다 만나니 한결 반갑지요?^^




이 안님, 그 동안 잘 지냈다고 할 수 있을지.... 몸이 한 차례 앓고 난 뒤에 찾아오는 어떤 결락감 같은 것......
빌리 할리데이는 성폭행, 인종차별, 3번의 결혼, 마약으로 인한 6번의 감옥행 등 인생의 숱한 곡절들을 겪다가 마흔 네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떴다고 하네요. 저 무렵 그녀의 모습에는 석양이 지기 전의 아름다움 같은 게 담겨져 있는 듯 느껴져요. 겉멋이 아닌 실제 자기 삶에서 우러나온 사랑과 슬픔에 관해 노래하는 듯한......



참나님, 그냥, 그저.... 마음 비우고, 내려놓고 살기가 쉬운 경지가 아니지요, 님은 요즘 '즐거운' 모드인 것같이 느껴져 보기가 좋습니다^^



브리즈님, 그렇지요? '건너가는' 시기가 있는 듯해요, 그 다리 앞에서 잠시 망설이고 머뭇거리면서도 그 다리를 또 큰 회의 없이 건너가리라는 걸 알고 있어요, 큰 굴곡 없이 안온하게 살아 온 소심한 이들의 딜레마 같은 것..... 지금 그렇게 한 다리를 건너가고 있는 중입니다.



님들도 모두 좋은 주말, 휴일 보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