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공상을 나는 몇 번씩이나 해 보았었다. 그리하여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아 보았으면 싶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하여 말을 한다거나 내가 이러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인다거나, 나의 이름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바로 내가 지닌 것 중에서 그 무엇인가 가장 귀중한 것을 겉으로 드러내는 일이라는 생각을 나는 늘 해 왔다. 무슨 귀중한 것이 있기에? 아마 이런 생각은 다만 마음이 약하다는 증거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단순히 살아가는 일뿐 아니라 자기의 존재를 '확립하기' 위하여 누구에게나 반드시 필요하게 마련인 힘이 결핍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환상에 속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같은 타고난 부족함을 무슨 드높은 영혼의 소치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에게는 여전히 그런 비밀에 대한 취향이 남아 있다. 나는 오로지 나만의 삶을 갖는다는 즐거움을 위하여 하찮은 행동들을 숨기곤 한다.
비밀스러운 삶. 고독한 삶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삶 말이다. 나는 오랫동안 그 꿈이 실현 가능한 것이라고 믿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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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사랑하는 그 꽃들을 아깝다는 듯 담장 속에 숨겨두는 그 사람들의 심정을 나는 너무나도 잘 이해할 수가 있었다. 하나의 정열은 그 주위에 굳건한 요새의 벽들을 쌓아두고자 한다. 그때 나는 하나 하나의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밀을 예찬했다.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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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비밀스러운 삶은 그러므로 반드시 부자연스럽고 수치스러운 것은 아니다. 그런 삶은 우리들 자신의 참다운 모습을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나는 그런 비밀스런 삶이 반드시 우리들을 더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나는 여기서 어떤 행동의 방식을 묘사하고 있는 것뿐이다....... 겁을 먹은 짐승들만이 몸을 숨긴다. 그들이 몸을 숨기는 것은 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종류의 삶은 분명 내면적으로 약한 데가 있다는 증거라고 여겨진다."

                            

                        쟝 그르니에,  <섬>의 "케르겔렌 군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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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상반된 두 가지 목소리가 불협화음의 교향곡처럼 내게 울려온다.
지금까지 살아온 습성대로 나를 은밀하게 자기 안에 품고 있고 싶은 욕구, '비밀에 대한 취향'을 노래하는 목소리가 하나라면, 
다른 또 하나는 나를 내 밖으로 끄집어내 '타인의 시선' 앞에 던져놓아 버리라는 유혹의 목소리.
 
* 삶의 비밀스런 태도가 지닌 명백한 장점 몇 가지...
첫째, 쓸데없이 다른 이의 반응에 신경 쓰거나 간섭받지 않을 자유가 있다. 관계나 소통을 위한 의무와 책임에 기운을 소진하지 않을 수 있다.
둘째, 구체적인 말이나 행동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속으로는 제멋대로의 생각과 판단을 하더라도, 적어도 '관계 속에서의 실수'를 막을 수 있다. 그러므로 상처란 게 있다면 자신 안에서 자연 발화, 연소되는 내상이 있을 뿐이다.
셋째, 쟝 그르니에도 말하고 있듯이, 그것이 환상이든 아니든, 비밀스러움만이 형성해 주는 행복감과 자족감이 있다.
   
* 그런 한편 "겁을 먹은 짐승들만이 몸을 숨긴다. 그들이 몸을 숨기는 것은 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종류의 삶은 분명 내면적으로 약한 데가 있다는 증거"라는 그르니에의 말이 내 안의 벽에 부딪쳐 울려나온다.
나의 '비밀스러운 삶에의 취향'은 바로 나 자신이 빈한하고 나약하고 평범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이건 섬약하고 면역성 없는 자신을 생생한 자극과 관계의 부딪힘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비겁함이다. 두려움에서 나온 격리주의이다. 

* 진정한 비밀스런 삶이란 무엇인가와 그것을 얻기 위한 전략에 대해 쟝 그르니에는 이렇게 훈수를 둔다.
데카르트가 암스테르담의 한복판에서 "도무지 변화라곤 없는 데다가 계속적이며 공개적인, 그리고 극단적으로 단순한 생활을 영위함으로써 그 비밀을 충실히 지킬 수 있었고",  "그는 생활을 완전히 개방해 놓음으로써 정신은 자신만의 것을 간직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무해무득한  내용의 비밀 얘기는 보다 솔직하고 소상히 털어놓아 다른 사람의 호기심에 선수를 치고, 자신의 비밀스런 삶을 제대로 손상 당하지 않고 보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 나는 두 목소리 모두에 귀 기울인다. 두 목소리 모두에 이끌린다. 그건 둘 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것이다. 나는 동시에 '비밀의 취향'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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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10-03 0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해무득한 내용의 비밀 이야기 정도로 해요.^^

에레혼 2004-10-03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럴까요
無害 無得.... 과연 그런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지
저는 이즈음 내가 나를 열어놓는다면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지를 궁금해 하고 있어요
어디까지 나를 던져 놓을 수 있을까, 무심하게, 별것 아닌 그 '나'라는 마음을 내려놓고......

아오이 2004-10-03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앙.....앙.....

에레혼 2004-10-03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오이
시월은 분명 물기가 많은 계절인 듯싶어
하늘의 구름들도, 나뭇잎들도, 사람들의 옷깃 사이로 보이는 빈 목덜미도, 그 풍경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동자에도......

프레이야 2004-10-03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혹적입니다.^^ 비밀스러움도 님의 취향도...

에레혼 2004-10-03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매혹'이란 말, 제가 참 좋아하는 말입니다...
그렇기는 하나 그 말을 저를 장식하는 형용사로 부여하는 건 좀 가당찮다는 생각이......

매혹은 '순간들'에 있는 것 같아요, 지나가 버리는, 가볍게 흩어지는 구름 같은, 불꽃놀이의 환한 빛의 명멸과 사라짐과 같은, 짧은 순간들...... 그런 순간의 매혹을 느끼고 알아차리는 데 점점 기운이 딸려 가고 있어요...... 비밀에 대한 취향을 유지하는 데도 어떤 에너지가 필요한데, 가령 자신에 대한 고집스런 믿음이라든가 고독에 잡아먹히지 않을 수 있는 견고함 같은 것 말이지요...... 순간의 매혹과 비밀의 취향을 오래오래 누리고 싶은 마음과 그 마음을 따라 주지 못하는 몸, 이 이율배반에서 오는 나른한 피로와 순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