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에베르트 선생님을 무서워하였다. 우리 반 체육 과목의 스타들조차도 그 선생님을 무서워하였다. 그 애들은 그 선생님의 총애를 받는 아이들이었는데, 총애를 받는 아이들이 선생님을 실망시키면 가차없이 복수를 당했던 것이다. 그 선생님이 특별히 좋아하는 욕은 '삶은 자두'와 '물주머니'였는데, 그렇게 불린 애들이 불행하게 철봉에 혹은 평행봉에 매달려 있는 동안, 선생님이 천천히 즐기며 찍찍 늘이는 말이었다.
........ 학교를 마치고 나서도 여러 해를 두고, 체육에 소질이 없다는 것, 유연하지 못하며, '삶은 자두'라는 사실이 나를 의기소침하게 했다. 그리하여 내가 마침내 그것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었을 때, 머뭇거리며 조심스럽게 나타난 것은 다른 아이들의 기억도 비슷했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자기 나름의 에베르트 선생을 가지고 있었고, 누구나 학교를 마치고 나서도 여러 해 동안 억세고 고통스러운 압박을, 뼈를 녹이는 듯한 모욕들을, 가지고 있었다."

크리스토프 하인의 <낯선 연인>의 한 대목이다. 주인공은 중년의 어느 날, 성장기를 보냈던 작은 도시를 찾아가 호텔 방에 앉아 학창 시절과 그때 만났던 사람들을 회상한다.

'누구나 자기 나름의 에베르트 선생을 가지고 있었'다는 그 구절 때문이었을까. 문득 나에게도 떠오르는 한 얼굴이 있었다. 나는 놀랐다. 이런 구절에 건드려져 먼지와 거미줄이 몇 겹 에워싸고 있는 내 기억 창고에서 그가 끌려 나올 만큼, 그와의 한때가 내게 깊은 각인을 남겼었던가. 기억의 표류와 부상(浮上)은 난해하고 오묘한 자기 원리가 있는 모양이다. 그 원리를 다 이해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어리둥절한 느낌이 들지만, 어쨌든 지금 한 얼굴이 기억의 수면으로 떠오른 이상, 나는 그와의 삽화를 어둡고 습한 창고 속에서 끄집어내 햇빛 아래 펼쳐두고 찬찬히 들여다봐야 할 것 같은 기이한 채무를 느낀다.

그는 나의 고등학교 1학년 때 수학 선생이었다. 김(金)이라든가, 이(李)라든가, 아마 그 비슷하게 흔한 성씨를 가졌었을 그의 이름은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작은 키에 야무져 보이는 체구, 동그스럼한 얼굴에 명랑하고 재기 바른 표정을 갖고 있던 그는 첫 시간부터 '웃기는 숙제'를 내주었다. 수학 교과서 첫 장의 두 페이지쯤 되는 연습 문제를 풀어서 공책에 스무 장이 되도록 베껴 적으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같은 문제를 수십 번 되풀이 적고 또 적으라는 것. 그건 수학 문제 풀기의 범위를 넘어서 숫자와 부호로 나열된 수식을 '무의미하게', 또 '기계적으로' 옮겨 적으라는 웃기는 과제였다. 아이들이 크게 동요하거나 반발했던 것 같지는 않다. 고등학생이 돼서 맞은 첫 번째 수학 시간이었던 터라, 다들 새롭고 낯선 공기에 대한 긴장감과 막연한 의욕과 탐색으로 몸과 마음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던 탓이리라.     나 역시 속으로만 피식 헛웃음을 지으며 약간의 환멸을 느꼈던 것 같다.
그날 집에 돌아와 저녁 내내 수학 숙제를 했다. 누런 갱지가 스프링에 묶여 있는 연습장에 바지런히 수식들을 베껴 적었다. 몇 시간이 흐르자 연습장에 닿는 손바닥의 측면이 얼얼해지고 연필을 쥔 손가락은 무감각해져 갔으며 그예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해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결국 나머지 몇 장은 언니와 어머니가 마저 해줄 테니 나더러 먼저 자라고 해서, 고등학생한테 이런 말도 안 되는 숙제를 내주다니 하는 억울함과 분노와 자신에 대한 미묘한 슬픔 따위가 뒤범벅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바로 다음날, 수학 시간이었다. 나는 그가 교실에 들어올 때까지 나의 결정적인 실수를 모르고 있었다. 간밤 내내 툴툴거리며 종이가 나달거리도록 베껴 적은 그 연습장을 챙겨 오지 않았다는 걸 숙제 검사 직전에야 알아차린 나는 잠시 당황했지만, 사실대로 깜빡했노라고 얘기하면 별 문제 없을 줄 알았다. 허나 다음 시간에 다시 검사를 받으라거나 한두 마디 꾸지람을 듣는 정도로 지나갈 수 있으리라던 나의 순진하고 오만한 믿음은 한 순간에 무너졌다. 선생은 내 말을 전혀 믿어 주지 않았던 것이다. 숙제를 안 한 주제에 뻔뻔스럽게 거짓말까지 한다는 것, 그게 그가 나를 향해 내린 명쾌한 판단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불려 갔던 건지, 내 조바심에 그를 뒤쫓아갔던 건지는 희미하나, 어쨌든 교무실에까지 가서 그로부터 빈정거림과 경멸에 찬 시선을 잔뜩 받아야 했다. 너, 어느 중학교 나왔어? 그 학교에서는 그 따위로 배웠냐? 어디서 버르장머리없이...... 전형적인 수순과 어법으로 상투적인 모욕이 내 머리 위로 쏟아졌다.
나는 그 날 이후 그를 다시는 선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학이란 과목을 딱 덮어 버린 것도 그때부터이다. 나는 수학 시간에 소설을 읽었으며, 수학 숙제 같은 건 하지 않고 손바닥을 맞거나 감점을 받았으며, 그 자연스런 결과로 수학 시험은 반타작만 해도 감지덕지할 판이었다.
나의 진심을 그렇게 묵사발 만들지만 않았더라도, 내게 한번쯤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었더라면, 무엇보다 그는 선생이자 어른이었으므로 자신보다 명백히 약자인 학생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성의를 보였더라면, 많은 것이 그때와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나는 그를 어려워하거나 불편하게 여기기는 했겠지만 적어도 수업을 받는 동안은 '수학 선생님'으로 대할 수 있었을 테고, 내 인생에서 그렇게 수학과 영영 멀어져 버리지 않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 그와의 한때가 상처가 됐다면 그런 부분은 아니다. 나는 그 뒤 제법 오랫동안 그를 혐오했다. 열 예닐곱 살 짜리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미움으로써, 그를 생각하고 그를 대했다. 수업 시간에 그가 아이들을 격려하거나 질책하면서 웃는 얼굴도 보기 싫었고, 쾌활하게 던지는 우스갯소리도 시답잖았다. 나에게 가장 선생 같지 않은 선생의 모델로 그가 서 있었다. 나는 '선생답지 못한' 나의 '수학 선생'이 불행해지기를 바랐다.
그 해 봄이 지나고 초여름이 가까워져 오던 어느 날, 학교 안이 술렁거리며 그의 사고 소식이 전해졌다. 교통 사고였다. 운전을 한 그는 경미한 부상을 당하고, 동승한 아내는 즉사했다고 한다. 열흘인지 보름쯤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학교로 돌아온 그는 예전과는 명백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동그란 얼굴의 뺨이 홀쭉하게 살이 내렸고, 악동스런 장난기가 배어 있던 눈빛도 사라져 버렸으며, 크지 않은 체구에 어떤 암울한 기운이 드리워져 어깨가 한 치는 더 낮아 보였다. 그는 더 이상 전처럼 웃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무지막지한 숙제를 내주지도 않았다. 이제 그는 확실히 불행이란 것의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받은 모욕과 진심의 뭉개짐으로 누군가를 분명하게 미워하고 증오한 감정의 한 끝에 그런 비극적 우연이 찾아온 곳은 그에게나, 나에게나 안된 일이었다. 물론 그가 맞은 불행과  내가 느낀 아픔은 도저히 견줄 수 없는 무게의 것이지만.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그가 나를 모욕했던 건 아니다. 작은 오해와 어른들의 상투적인 무심함이었을 뿐. 모욕이라고 받아들인 건 내 안의 미숙하고 좁고 높은 자존심이었다. 그 자존심에 상처 입은 내가 바랐던 것 또한 내게 모욕을 느끼게 한 누군가의 불행은 아니었다. 명백한 그의 불행을 눈앞에 보고서야, 그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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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없는 이 안 2004-09-30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텔레비전에서 본 영화가 생각나네요. 장예모 감독의 <책상 서랍 속의 동화>였는데 그러게요, 어른들의 상투적인 무심함이 두드러졌던 영화였죠. 그림 속의 무심한 주먹이 사실 어느 누구의 팔에나 달려 있기 쉽겠지요...
라일락와인님, 추석 잘 보내셨나요? 어쨌든 명절 끝나니 시원하군요. ^^

에레혼 2004-10-01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안님, 추석 연휴에 그 영화를 티브이에서 해 준 모양이네요......
이제는 그 상투적인 무심함과 무례함을 내 몸에 걸치고 살아가고 있는 나를 봐요

새벽별님, 그 한 구절 때문에 저리도 주절주절 기억의 한 토막을 풀어놓고 말았습니다
저마다의 에베르트 선생을 회상하다 보면, 가장 예민했던 시절, 감성과 이성이 생생히 깨어 있던 시절에 겪어내야 했던 억압과 폭력과 굴욕이 다시 저 밑바닥에서 떠올라오는 것 같아요... 그렇지요, 안쓰러움, 그런 것...... 에베르트 선생에게나, 그 선생 때문에 괴로워했던 나 자신에게나......

2004-10-01 0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깐 신경숙 소설을 읽는게 아닌가 착각에 빠졌습니다..동감하는 부분이 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