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술한 벽과 처마를 넘어 들려오던 매맞는 아이의 울음소리는
언제나 가슴을 옥죄이며 세계를 어둡게 보게 한 '암흑의 소리'였다.


아버지는 엄격한 기질에다 실패한 완벽주의자의 자의식을 갖고 있어서
툭하면 어디선가 상처받고 사나워진 심사의 불똥이 우리 형제들에게 튀곤 했다.
나는 아버지에게 책잡히기 싫어서 늘 저 혼자 알아서 공부하고 말썽 따위는 부리지 않는 조용하고 순순한 아이였다.
나보다 조금쯤 더 자기 자신을 풀어놓을 줄 알았던 언니와 남동생들은
하루 건너 한번씩은 아버지에게 야단 맞을 일이 생기곤 했다.

해질 무렵, 아버지가 골목을 지나 집으로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오늘은 큰소리가 나지 않고 평화롭게 밤을 맞을 수 있을지 재빠르게 가늠해 보곤 했다.
아버지의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가슴속에서는 둥둥 북소리가 커지기 시작하고, 익숙한 두려움에 자꾸 움추러드는 나는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웅크리고 있을 '세상의 구석'을 꿈꾸곤 했다.
어쩌면 책읽기에 빠져들기 시작한 건 그런 저녁의 깊은 우물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방랑의 길을 떠난 고아 라스무스를 마음속에 오래 품었던 것도 이 시절 저녁 골목길의 그 '소리들'에 뿌리를 두고 있다.  매맞는 아이의 울음소리와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의 발소리......

Estatic Fear A Sombre Dance Chapter I - Estatic 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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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없는 이 안 2004-09-27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짧은 글에서 단편소설을 읽은 듯하네요...
라일락와인님, 서재이름을 바꾸셨네요. 그림도 바꾸시고...
갑자기 추석즈음에 대대적인 공사를 하심은? ^^
추석 쇠러 아직 안 떠나셨나 보군요.
추석 잘 지내시고 건강하게 뵈어요. ^^

에레혼 2004-09-28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조금 전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 안님도 추석 잘 보내고 계시겠지요?

공사는... 그저 시간이 있고 좀 무료해서였지요....

2004-09-29 0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와인님의 글솜씨. 잔잔히 그러나 깊숙한 울림이 있군요..

우리 동네엔 아직 이런 골목이 있어요, 아이들은 없지만..


에레혼 2004-09-29 0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부지런히 참나님 발자국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ㅎㅎㅎ

어느 동네에 사시기에 저런 골목을 아직 걸어다닐 수 있다니, 날마다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일 듯.... 아이들의 소리가 사라진 골목은 스산하고 쓸쓸한 풍경이지 아닐까 싶은데......참나님은 골목을 지날 때마다 여러 상념 속을 산책하시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