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각자 어금니를 꽉 쥐고 살아간다. 발톱도 벼리고 마음도 승하게 하여 거친 세상에 저항하려 한다. 일종의 위악(僞惡)이다. 사회적 진화론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사회는 그런 이들이 살아남기 쉽도록 진화했을 테다.
협력이 인간의 효용을 증가시키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에 선(善)한 사람이 유리하다는 주장이 있긴 하다. 좋은 평판이 개인을 빛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행동 경제학’ 류의 생각은 사실이긴 하나 불완전하다. 좋은 평판을 가진 이가 선하다는 명제 탓이다. 좋은 평판을 가진 이는 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 사람이다. 마음이 불편해도 웃어넘기고 제 앞가림보단 나의 앞가림을 위해 애쓴다. 오히려 가련하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부러 사람들 앞에서 강(强)한 척을 할 때가 있다. 누군가가 나를 훑어볼 때 그 불편함을 감내하기 보단 마음을 벼려 그의 눈짐작에 대항한다. 성격이 조금 까칠해지는 면도 없지 않아 있다. ‘아주 사소한 일'에 분노하거나 누군가가 내 나와바리를 침범하다고 생각되면 예전과 달리 나또한 포효하며 밥그릇을 챙기려 한다. 헌데 기분이 나쁘진 않다. 이적지 손해 보며 살아왔기에 그저 깜냥만큼 목소리를 높인다 여기며 자위한다.
기실 나는 별 생각 없이 멍한 공상을 즐기며 멋대로 살아왔다. 자잘한 일로 어떤 이와 부딪히면 피하고 언쟁이 붙으면 그저 져주곤 했다. 그러다 보니 평판이 나름 좋았다. 영악한 이들은 이러한 온건함을 나약함으로 인식하고선 거친 말로 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허나 대거리를 하거나 말로 드잡이하는 일의 비루함을 알기에 나를 눅이고 그들의 잗다란 자존감을 세워주곤 했다.
이젠 유약함과도 바투 이어져있는 이런 온건함을 버리려 한다. 양보와 회피가 남겨준 자잘한 손해를 감내할 만큼 마음이 너그럽지 않기에 그렇다. 기실 이런 다잡음은 어제 나온 전기요금 탓이다.
계량기 설치가 각각 안 돼 있어 매 달 요금을 옆집과 반으로 나누어 내곤 했다. 헌데 저번 달 요금은 그 전 달 보다 세배 넘게 나왔고 이번 달 요금은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두 배 넘게 나왔다. 전기 요금은 누진제라 조금만 사용량이 많아져도 요금 상승폭이 크다. 아무래도 그네가 난방용품을 틀지 않았나 하여 물어보니 그런 일 없단다. 모녀가 같이 사는 그네들은 오히려 한전에 전화를 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단다.
갑자기 요금 체계가 변한 게 없고 나또한 새로운 가전제품을 들여놓은 적이 없기에 그들의 말처럼 요금이 잘못 나왔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헌데 이번 달에도 많은 요금이 나왔다.
지난달과 달리 사회생활을 하며 좀 더 날카로워지고 제 앞가림에 투철해진 나다. 저번 달 보다 요금이 다소 준 것으로 미뤄 짐작해 보건데 그네가 방한 용품을 과도하게 튼 탓이 분명했다. 아마 저번 달 요금을 보고서 방한용품 사용을 급격히 줄인 탓이리라. 평소 문자로 연락을 주고받았던 터라 ‘분명’ 난방용품 쓴 적 없냐고 따졌다. 그네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자기네가 둘이니 전기를 더 쓰는 것은 당연한지라 어찌하면 좋겠냐 물었다.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 에둘러 제 자신을 변호하며 책임을 내게 떠넘긴 말이다.
그렇다고 말이 아닌 문자로 대거리가 오가니 답이 나올 리 만무했다. 이런 일로 마음을 복잡하게 하기 싫어 그럼 이번 달 요금은 그쪽이 요금을 내고 다음 달부터 반반씩 내자고 했다. 전기를 아껴 쓰자는 말도 덧붙였다. 손해 본다는 생각을 갖고 한 타협안이었다. 헌데 그네는 이번 달 요금 전부가 아닌 제 몫보다 조금 더 내겠다는 ‘후려치기’를 하고선 정말 왜 요금이 더 나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로 일을 덮었다. 말이 덜 통하는 이들이기에 우선 그러자고 하며 다음 달 요금이 나왔을 때 다시금 말을 붙이기로 했다.
그들의 그런 약사빠름이 오늘까지도 불쾌하다. 물론 내 글에선 그들이 온풍기를 안 쓴다는 거짓부렁을 주워섬긴단 전제가 깔려있다. 헌데 전기요금 체제가 잘못될 리가 정녕 드물고 하필 겨울에 요금이 많이 나왔다는 점, 본인은 일 때문에 집에 있던 적이 거의 드물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추측은 어떤 확신같이 다가온다. 무엇보다 그네들은 거짓을 고(告)할 유인동기가 있고 타협안을 ‘후려치기’로 응대한 것으로 볼 때 전기요금 산정기준의 불확실성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영악함이 있는 듯하다.
글을 쓰다 보니 서두와 중간부는 내 억울함을 하소연하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하다. 소심해 보일 각오를 하고 이런 글을 쓴 까닭은 저번 달엔 조금 기분이 나빴을 뿐인 사안이 이번 달엔 어찌 다음 날 아침까지 찜찜함을 만들어 내냐는 의문에서 제기되었다. 그건 온건함만으론 버티기 힘든 세상사 덕에 조금은 달라진 나에 대한 탐구와도 이어져있다. 그리고 페크 님 서재의 글을 보고선 느끼는 바가 있어서이다. 참고로 그 느낌은 착잡함에 가깝다. 황석영의 단편 ‘줄 자’와 김영하의 단편 ‘이사’에서 보았던 어떤 종류의 불편함과도 궤를 같이 한다.
밥벌이를 하다 마음은 나날이 야위어지고 조금은 황폐해 진 듯하다. 논리적인 생각이 현명함이 아닌 걸 오늘의 글은 말해준다. 그래도 글은 마음의 너울댐을 꽤나 줄여 주었다. 소심한 마음을 낱낱이 토해내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다음 달 전기요금을 봤을 땐 내안의 어떤 자아가 승한 기운을 벌일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