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든다고 해서 가족이나 친척이 다 싫어지는 것은 분명 아니리라. 아니 오히려 몸 속에 세월을 쌓아갈수록 끔찍한 살붙이들에 대한 애증이 어쩔 수 없이 나잇살 붙듯 하나 둘 애정으로 여며져 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아직 덜 살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다.
어렸을 때의 명절은 손꼽아 기다리던 축제의 날이었다. 명절 며칠 전 부산하게 들썩이는 시장으로 엄마를 따라가서 비닐봉다리 몇 개 달랑거리며 하드나 호떡을 얻어먹는 일부터, 기름 냄새 진동하는 부엌 한 귀퉁이에 매달려 뭣도 모르면서, 그거 내가 뒤집으면 안 돼, 내가 구우면 안 돼 달겨들며 자청하던 어설픈 도우미 짓, 곧이어 들어닥친 사촌 오촌 형제들과 밤을 새며 희희낙락 무궁무진하게 꾸려갔던 이야기와 놀이들, 그 소란스럽게 달뜨던 기분. 그리고 매번 연휴 마지막 날 나는 얼뜨기처럼 눈물바람으로 그들을 떠나 보내는 예의도 잊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시험이니 공부니 하는 자의반 타의반의 명목으로 그 어수선함의 소용돌이에서 한 발을 빼고 슬그머니 비켜선 입장이 되자 사람들은 나를 볼 때마다 매번, 학교 잘 다니고 착한 우리 어디에도, 하는 범생이 꼬리표와 함께 땡그랑 땡그랑 한 푼 두 푼 용돈을 주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인지 알 수 없으나 어느새 나는 분탕질치며 놀아제끼던 과거는 모조리 잊은 채 용돈만 넙죽넙죽 받아먹는 어색한 웃음을 띤 돼지저금통이 되었다.
20대 중반이 지난 지금, 축제고 저금통이고 아무 것도 없다. 이제는 예전보다 매우 단출해져서 몇몇 친척만 대면하면 되는데도 나는 지난 몇 년간 그저 그들의 탐구 대상이 되어야 했다. 모두 짜기라도 한 듯 나만 보면 입을 모아 마치 철이와 미애처럼 리듬을 살려, 너는 왜 아직도 모르는 거야 너는 왜 너는 왜 하고 물음표들을 발사했고 이러저러해서 여차저차 하옵네다 하고 궁색하나마 나름대로 마련했던 나의 대답은 모두 변명이 되었다. 그러다 내가 집을 나오고 여기저기 떠돌고 엎어지고 아프고 어쩌고저쩌고 하게 되니 이젠 나를 볼 때마다 마치 송강호처럼 그윽하게, 밥은 먹고 댕기냐 하고 운을 뗀 다음 곧이어서 반듯한 직장과 아름다운 결혼에 대한 세상의 소식들을 속삭이면서 바람직한 20대의 삶을 내 귀에 불어넣고자 애쓴다.
나도 알고 있다. 나를 걱정하는 마음을, 나를 일으켜 세워 세상의 시장 속으로 밀어 넣고 그 속에서 강하게 살게 하고픈 그 다정한 의도를. 그 어쩔수 없이 땡겨지는 핏줄의 불수의 운동을. 하지만 가족과 친척들이 내게 뭔가를 바랄수록 나는 자꾸만 더 도망치게 된다. 어쩌면 명절이라 친척들이 모이는 일이 싫거나 그들이 내게 똑같은 질문을 계속 하는 게 싫은 것 보다도, 우물거리며 똑같은 대답만을 주워삼키는 그 순간의 스스로가 가장 싫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를 다시 예전의 활기찬 시절로 되돌리기 위해 내가 게으르게라도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차라리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저 그 과정은 내 속에서만 조용히 흘러서 진행이 되고 사람들 앞에 나타날 때는 벌떡 일어선 다행스런 모습이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든다. 이렇게 쓰고보니 내가 마치 대단한 사건사고를 당해서 주저앉아 있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하는데 실상 따지고 보면 그런 것도 아니다. 그저 나는 태생적으로 조금 컴컴한 인간이고 뼛속까지 게으름이 거미줄을 치고 있는 인간이라 돌부리에 걸려 자빠진 김에 드러누워 있다가 조금 까진 상처와 피를 보고 새삼스레 놀라 우어어 울다가 다 울어제낀 김에 잠도 한 숨 자다가 슬슬 흙을 털다가 뭐 그러고 있는 것이다.
제발, 나를 그냥 가만히 좀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 나는 귀를 막아야 더 잘 들리고 눈을 감아야 더 잘 보이며 누워 있어야만 앞으로 나아가는 지렁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