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밝은 사람을 좋아한다.

만날 때마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는 사람은 사소하게나마 상대방을 기분좋게 만들어주지만 매번 얼굴에 빗금을 좍좍 긋고 우울의 안개뭉치들을 뭉개뭉개 풍기고 다니는 사람을 만나면 '쟤는 맨날 왜 저래?' 하고 말하며 은근히 피할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그 단순명료한 이치를 깨달은 때는 스무살하고도 늦가을이었다.  뒤미처 그걸 알게 된 그 순간,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가장 혹은 과장' 된 '밝음' 을 주저없이 선택했다. 그리고 당연한 결과라는 듯 갑자기 나는 무수한 사람들에 둘러 쌓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나에게  '밝은' '털털한' '좋은' '귀여운' 같은 처음 듣는 형용사들을 선사해 주었고 나는 그 새롭게 맛보는 쾌감에 순식간에 중독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계속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고, 뭔가가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듯, 이상한 또아리 하나가 뱃속에 자라고 있는 듯 느껴졌다. 밝은 가면 안에 숨은 내 얼굴은 무표정했고, 털털한 척 너털웃음을 부려놓는 내 껍데기 안의 속살은 작은 선인장 가시처럼 말랑한 단어들에도 금새 생채기가 났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맥이 탁 풀리며 팽팽하던 실은 기어코 끊어졌다. 어떤 사람을, 사람들을 만나고 난 뒤 나는 웬지 더 이상은 온실 속에서 곱게 자란 화초 같은 그 '밝음' 을 가공해 낼 수가 없었다. 그저 맨 살을 내보이고 내 속의 컴컴한 동굴을 고스란히 드러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들이 나의 커다랗게 입 벌린 어두운 구멍을 들여다 보고, 지겹다 싫다 하며 모두 내뺄지언정, 별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나' 이므로, 마음 속의 진한 빗금 또한 온전히 내 것이므로, 나는 그런 내 속의 밑바닥까지 모두 버선 뒤집 듯 그들에게 내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진정' 하게 그들과 친해지고 싶었는지도.

힘들다, 우울하다, 누군가 고백하듯 털어놓으면 세상 속 다정한 사람들은 어느샌가 다가와서 등을 쓸어주고 손을 잡아주면서 힘내요, 속삭인다. 맛있는 것을 사주거나 술을 같이 마셔주기도 하고 기분전환을 위한 선물도 왕왕 풀어놓는다. 하지만 (그럴 사람 사실 없겠지만) 끊임없이 계속 흐느적대며 눈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만약에 있다면 그 옆에서 계속 계속 등을 토닥여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지만 나는 행복하다. 온전히는 아니더라도 내가 스스로 '나' 를 선택할 수 있게 되어 나는 다행스럽다. 지겹고도 정겹다. 앞으로는 계속 다행스러울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뜬금없이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내 손가락이, 내 몸뚱아리가 오늘 또 한 살을 먹었다.

내 정신연령은 지금쯤 몇 살이나 먹었을지 매우 궁금하지만
언제쯤 몸의 나이를 따라잡고 조금은 앞서 나가 줄 것인지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나는 맛있게 미역국을 먹었다.

10월 4일. 닭살스런 이 날짜는 내 생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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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4-10-04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축하축하~
정신연령이 몸의 나이보다 앞서 나간다는 거 별로 좋을 것도 없잖아요?
전 어쩐지 나이를 거꾸로 먹고 있는 듯 합니다. 그게 좋구요.
아자아자 파이팅! (그냥 해 봤어요. 헤헤)

플레져 2004-10-04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얀마녀 2004-10-04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덕분에 어디에도님 글을 읽을 수 있네요.

2004-10-04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코코죠 2004-10-04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이런, 자칫 잘못했으면 어디에나님 생일을 축하드리지 못할 뻔 했쟌겠어요. 저는 야심만만을 보고 서재에 들어오려 했는데, 그랬다간 정말 큰일날 뻔 했쟌겠어요. 아아, 이렇게 축하드릴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오즈마의 어디에나 있는 님, 그래서 오즈마의 어디에나님.
생일을 축하해요. 축하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날씨도 춥지 않고 오전에 햇살도 밝았군요. 오즈마는 이번 생에서 어디에나님을 만나 몹시 기쁩니다.

tarsta 2004-10-04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생일이셨군요. 오늘이었군요..
어디에도님. 생일 축하해요. 요만큼이라도 알게되어..많이 반갑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님은 스스로 '나'를 선택했다니.. 나는 아직 내가 이런 모습이란게 맘에 안들어서. 모자란 조각을 껴안게 되지 않아서 다른 곳만 바라보는 느낌이거든요. 가끔은 아주 많이 미워하기도 하는데..
님은 언제나 정직하게 거울과 마주서려는 사람같아요. 못난 부분까지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을 똑바로 쳐다보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인데.. 그래서 많이 ..부럽습니다.
생일,, 많이많이 축하해요. 한시간도 채 남지 않았지만, 흡족한 하루가 되었기를 바래요. :)

chika 2004-10-04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훗,, 아직 늦지 않았군요. 오늘은 10.04 천사날..ㅋㅋ
생일축하해요~~~ 행복하세요오~ ^^

2004-10-04 2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4-10-05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어데도님, 오늘 귀 빠진 날이시구나. 핫. 이거야 원. 금방 학교선배 득남 소식 들었는데..또 어데도님께서도 아~ 응애에요, 하시는군요~ 축하합니다, 당신의 생일을. 헷..

비로그인 2004-10-05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읽고 천천히 쓰다보니까 5일로 넘어와 버렸네요. ㅡ_ㅡ;;

어디에도 2004-10-05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 고맙습니다. ^^
좋아하는 알라딘 서재 주인장님들께 축하해요, 인사를 받고 싶어서 남긴 글이었지만
이렇게 많이 다정하게 남겨주실 줄을 몰랐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아, 맛난 것 먹고 술까지 퍼먹다 보니 어느새 5일, 생일이 지났어요.
그래도 좋네요. 더 씩씩하고 성숙한 어디에도가 될게요. ^^

tarsta 2004-10-05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 많이 (퍼)드셨나요? ^^
저는 나이가 먹어가니까 그러는건지, 정말로.. 작은 표주박 같은걸로 퍼먹고 부어먹는 동동주같은게 맛있어요. 조껍데기니 뭐니 하는 막걸리 종류도 맛있고... 아아 술땡기는구만요. 참아야 하느니라..세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_-;;

어디에도 2004-10-05 0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타스타님! ^^ 흐흐흐 (그냥 웃지요;;)
저는 원래 동동주나 막걸리를 잘 못마셔요. 이상하게 그 녀석들만 마시면
너무 빨리 취한답니다. -_- 소주나 맥주나 잘 안먹지만 양주도 그럭저럭인데
이상하게 그 걸쭉한 녀석들의 공격에는 꼼짝 못한다는 슬픈 전설이... 그래도
우리 다음에 만나서 조껍데기 술을 마셔 볼까요? ^^ (어차피 내논 인생;)

tarsta 2004-10-05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걸쭉 패밀리에는 취약이고, 소주나 맥주는 잘 안드시고, 양주도 그럭저럭이면...
.. 술을 즐기지 않는다는 말씀이신거죠? 흐흐. ^^
님을 꼼짝 못하게 만든다는데, 조껍데기를 마시게 할 수는 없죠..
제가 홀랑 다 먹어버릴께요. 음홧홧홧... 님은 그냥 안주만 드셔도 돼요...!!

2004-10-05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10-14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딧불,, 2004-10-16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제사 보았습니다.

님..그런 이들에게는 그런 모습을 조금 보여주고..
자신의 모습을 간직하고 보여주는 사람도 만드소서..
팽팽해서 끊어지지 않게요.
그나저나...하늘 맑습니다. 구름 한 점 없네요.

2004-10-17 1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디에도 2004-10-26 0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샌드캣님... 님의 인사를 저는 이렇게나 늦게 보고 답을 하네요. 죄송해요.
그리고 정말로 멋진 축하말이에요. 진짜 감사해요. ^^ 내년이 기다려지는데요?

반딧불님... 꼭 그런 사람 생겼으면 좋겠어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