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극장은 멀고 TV는 가깝던 시절, 주로 주말의 명화들을 섭렵하며 영화의 세계에 한 쪽 발을 담그고 있던 나는 그것들만이 그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간간히 집에서 발견되던 '스크린' 이라는 잡지를 간식삼아 먹어치우면서 헐리웃 영화가 마구 심어주는 꿈과 희망의 열락에 빠진 나는 그 당시 '방화' 라고 불리우던 것들을 싸그리 무시하며 헐리웃이 던져 주던 모든 것을 그저 널름널름 받아 먹으며 행복해 했었다.
그러다 나이를 먹고 머리통은 굵어지고 발은 발발거리며 여기저기를 싸돌아댕기니 내가 알고 있던 그 세계가 내게 두루뭉수리한 실체와 싸가지없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그에 나는 머리 속에 존재하던 헐리웃의 권좌를 사뿐히 갈아치우면서 그 자리에 한국영화를 포함한 온갖 영화들을 가져다 마구 얹어놓았다. 그 또다른 영화의 세계는 내가 십수년을 낯익어해왔던 영화의 틀을 없애고 갈아엎고 뛰어넘으며 내게 돌진해왔고 그 새로운 맛깔남에 나는 한때 졸아가며 이름 긴 감독들의 영화를 보고, 이름 어려운 감독들의 영화라면 사족을 못쓰는 만행까지도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싫증 잘내는 성미를 못버리고 곧 그것조차 시들하게 되자 본디 그렇듯 그냥 꼴리는 대로 보기,의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영화를 대하게 되었는데, 우스운 건 나름대로 이맛저맛 다 본 후라서 줄거리나 내용보다는 무조건 좋아하는 배우나 감독에 따라서 영화를 고르는 짓을 계속 하고 있으며, 헐리웃 딱지가 큼지막하게 붙은 스펙타클감동만빵스토리, 너에게는 나를 보낼 수 없다,는 같잖은 오기도 계속 부리고 있다. 사실 뭐 워낙 액션이나 전쟁물을 안 좋아하는 이유도 있기야 있지만. 어쨌거나 묻지도 않은 과거사를 주루룩 읊어댄 이유는 단 하나, <태극기 휘날리며>는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한국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 스펙타클감동스토리로나 돈 많이 쓴 티 팍팍 내는 모양으로나 코묻은 내 돈과 같잖은 내 감동을 받아먹기에는 상당히 불리했다는 얘기가 하고 싶어서였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광고를 때려댈 때 한 번 쓱 눈길을 준 것, 최단기간 1000만 돌파 어쩌구 할 때 뉴스 한 번 본 것을 말고는 역시 관심도 없었고 딱히 볼 마음도 들지 않았다. 강제규 감독도 별로고 제작비 백 몇 억도 그냥 그렇고 원빈도 뭐 관심없고(장동건은 좀 낫다) 아까도 말했듯 전쟁영화 자체에 진짜 관심이 없으니, 하등의 볼 이유가 없었다. 어릴 적 토요일마다 잽싸게 학교 갔다 와서 가열차게 채널을 돌려대도 딱히 볼 건 없는데 토욜이고 TV는 봐야겠고 해서 억지로 보던 '배달의 기수' 의 안 좋은 추억 때문인지 아니면 대부분의 리얼한 전쟁영화에는 예쁜 여자가 당최 안나와서 그런건지 어쨌든 남들 다 좋다던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한편의 시라는 <씬 레드 라인>이나 나한테는 진짜 졸린 영화들이었다. 그런데 왜 봤냐고 누가 물으신다면 뭐 대답은 뻔하다. 일요일이었고 방구석에 늘어져 있었고 친구가 보여준다고 꼬셨고 귀찮다고 하니 술까지 사준다고 그물을 쳐왔고, 해서 난 못 이기는 척 그냥 덥석 그물에 몸을 내던졌을 뿐인, 그런 거였다. 이러하니 시작되는 순간부터 이미 난 이 영화에 좋은 감정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본 인간들마다 족족 감동적이네, 울었네, 했던 것을 되새기고 있던 나는, 내가 호락하니 감동을 먹어줄줄 아느냐- 하는 거의 정신나간 째려봄의 수준으로 감상을 시작했으니, 뭐 거의 혼자 벌이는 쌩쇼였던 셈.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영화를 계속 보다 보니, 째려보느라 눈알도 아프고 괜히 승질 피우니 슬슬 피곤도 몰려오고 해서만은 아닌, 그냥 나도 모르게 조금씩 그 속에 빠져들었다.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꼭 나처럼 표현하진 않겠지만, 이 영화 대략 정신없었다. 전쟁터에 안가봐서 잘은 모르겠지만 진짜 눈 앞으로 총알이 퓌융퓌융 소리내며 쌩쌩 날아다니고, 사람은 여기저기서 사지절단나며 피를 뒤집어쓰고, 수류탄 막 터져대서 사람이며 흙더미며 피가 천지사방으로 튀어나가고 하니, 가뜩이나 눈알이 건조해서 상태가 안 좋은 나는 흔들리는 전쟁의 현장을 따라잡느라 진짜 멀미가 나고 눈알이 빠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폭탄 맞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 꼬는 심정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진지 오래였고 속으로는 나도 모르게 감탄이 절로 나왔다. 동네 극장이라 유난히 애새끼들이 많이 와서 절로 짜증이 났던 감정마저 어느새 물밀듯이 사라졌고 총 쏴서 뒷통수 터지는 장면에서는 '어맛 이런거 어린 애들이 봐두 괜찮나' 하며 나도 모르게 그 생생함에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한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나는 슬슬 지쳐갔다. 춘삼월 꽃구경도 하루이틀이지 무슨 중공군 인해전술도 아니고 두 시간을 내내 박터지게 리얼해주시니 머리가 아플 지경이 아니라 진짜로 머리가 아팠고 멀미가 났으며 귀도 아팠고 부아도 치밀었다. 그리고 아 C 전쟁 언제 끝나고 집에 가냐,고 내가 전쟁에라도 참전한 듯 간절한 기분마저 솟구쳐오는 것이었다. 막판에 할아버지가 된 원빈이(젠장 극 중 원빈 이름도 기억이 안난다) 진태(장동건 이름은 기억난다;)의 해골 앞에서 형 형 하며 울 때는 사실 좀 짠하기도 했다. 물론 그 전에 인민군 전사가 된 장동건이 원빈을 위해서 지네 편을 겨누고 따발총을 발사해댈 때나 아니면 아예 그 전에 두 형제가 졸지에 군대로 끌려 갈 때 엄마랑 헤어지던 장면에서는 감동같은 거 안해주리라 하던 오기는 어디 갔는지 나도 모르게 울 뻔도 했다.(사실 신파에 약하다;) 어쨌거나 몇 번의 짠함과 감탄 그리고 전반적인 멀미를 겪고나니 영화는 끝나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니 강제규라는 사람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6.25라는 역사적, 민족적 아픔 어쩌구 하는 거창한 소재를 끌어 들인다는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닐진대 게다가 그 상흔에는 5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함부로 풀지 못하는 이념이라는 문제가 결부되어 있는데도 그는 중장년층까지 극장으로 끌어올 수 있는 그 소재를 끝까지 아무 문제없이 엮어내었다. <태백산맥>처럼 원작 비스무리하게만 만들어도 우익단체에서 난리를 떨어대는 나라에서 가장 민감할 수도 있는 재료를, 끝간데없는 '형제애'(이게 영어 제목이란다)라는 머리가 아닌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고급양념으로 잘 버무리고 눈과 귀와 혼까지 쏙 빼놓을 것 같은 최첨단 특수효과로 완벽하게 데코레이션 하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그런데도 그는 해냈다. 그것도 아주 잘. 1000만명이라는 인간들이 가서 보고 울고 할 만큼, 돈도 전혀 아깝지 않을 만큼. 그저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다른 할 말이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 영화가 잘 만들어져서 잘 되면 한국 사람인 내가 좋으면 좋았지 나쁠 게 뭐가 있을까마는, 영화를 보기전에 가진 내 편견은 차치하고라도 영화를 보고 나오는 내 기분이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라면, 남들 다 좋다니까 괜히 튈려고 지랄하네, 하고 누가 말한대도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그냥 돈 많이 들여서 돈 많이 버는 영화를 보면 다행이다 싶은 생각보다는 왠지 작고 재밌는 영화들이 더 사라져버릴 것 같은 아쉬움이 엄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한국영화의 다양성 어쩌구 하는 훌륭한 얘기를 줏어들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한없이 게으른 내가 한 주만에 극장에서 홀랑홀랑 사라져버리는 영화들을 놓치고 땅을 치면서 비디오나 빌려보는 일이 게으름을 고치기 전까지는 계속 될거 같아서 너무 싫기 때문이다.
영화가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총알이며 폭탄이며 시체며 점점 다 돈으로 보였다면 흠, 역시 너무 오바인가. 어쨌거나 <태극기...>와 비슷한 이유로 관심 없었던 <실미도>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왠지 강하게 드는 것은 전반적으로 비교를 당하는 두 작품에서, 태극기가 심어준 그 어떤 찝찝함을 실미도, 네가 벗어나게 해다오, 하는 바램과 기대 때문이겠다. 또다시 여자주인공없는 삭막한 영화를 봐야한다는 것이 못내 애통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극장에서 다 사라져버리기 전에, 얼른 실미도로 달려가봐야겠다. 아, 나를 기다려 줄까.?
+)
역시나 난 원빈이 별로라는 걸 다시 한번 확실하게 깨달았다.(그래도 장동건 은 점수 좀 먹었는데;)
사실 형제애라고는 개미똥정도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내게 돈독한 형제애로 휘날려 제껴지는 영화가 가슴에 딱 달라붙기를 바라는 자체가 개꿈스럽다.
핀트가 좀 안맞긴 하지만, 난 장동건이 부러웠다. 동생이든 가족이든 아니 그 무엇이라도 자신을 온통 몰두하여 내던질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 아닌가. 비록 흙더미 속에서 이름없는 무덤으로 남을지언정, 그는 행복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