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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년 혹은 98년.
그 당시 나의 일상은 한마디로 '휘적휘적' 거리고 있었다.
밤늦도록 통신을 하고 늦잠을 자고 아점을 먹고, 가방만 달랑 메고 종로로 나가 정처없이 싸돌아 다니다 영풍이나 교보에서 자리 잡아 뭉개기, 정말 그게 다였다. 그런데다 무슨 필수 악세사리인양 세상 다 산 사람같은 맥없는 표정과 느릿한 걸음걸이를 달고 다녔고, 덧붙여 스스로 일부러 만들어서 주렁주렁 달았던 꿀꿀함- 사실 무거워 죽겠지만 뭐 어쩌겠어요, 하는 어줍잖은 분위기까지. 지금 생각하면 참 같잖다.

어쨌거나 반은 제정신이 아니었던 그 때 내 눈에 확 띄어서 낼름 업혀온 책이 바로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이 책이다. 김영하에 대해서는 그저, 그런 젊은 소설가가 있다는 사실 만을 알고 있었을 뿐 전혀 접해본 바가 없음에도 일단 그 책은 제목으로 나를 확 사로 잡았다.

'파괴' 라는 단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힘이 그 대상인 '나' 라는 것에 살짝 꽂히면서 순간 자학적인 우울모드로 넘어가는 듯 하다가 은근슬쩍 '권리' 라는 단어가 따라붙으면서 방향을 전환하며 뭔가 멋들어진 자유의지가 심어져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그 문장, 나는 무슨 비법책이라도 전수받는 사람처럼 결연한 태도로 그 책을 집어들었다. 게다가 새까만 표지 가운데 박혀 있는 죽어넘어진 남자의 그림은 또 얼마나 매혹적인지 빨리 사라고 주머니에서 돈이 튀어나올 지경이었으며 읽기도 가뿐한 중편 정도의 분량에 결정적으로 가격이 4800원인 것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가볍게 이 책을 간택했다. 그리고 몇장을 넘기고 바로, 몽롱한 눈길로 나를 흡수해버릴것만 같은 클림트의 유디트와 마주치는 순간, 나는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쁜 마음과 가쁜 눈길로 단숨에 이 책을 읽어버렸다.


예전에 아메나바르 감독 영화 <오픈 유어 아이즈>를 보았을 때 나는야 꿈 속이 좋아~ 어쩌구 했던 기억이 난다. 본 지 오래되서 자세히 기억 나진 않지만 그 영화에는 생명 연장 회사인가 하는 것이 등장하는데 그 회사가 하는 일이란 이름 그대로 영원히 살게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육체는 소멸되고 정신 혹은 의식만이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 방법이었고 대신 그 회사는 원하는 의식의 배경,을 무한하게 제공해 주는 것이다.
한 마디로 계속 꿈을 꾸면서 그 속에서만 의식만이 끝도 없이 생명을 이어나가는 것인데, 의식만으로 내내 존재하는 것이 과연 생명의 연장이며 그것을 삶이라고 이름지을 수 있을 것인지, 그럼 도대체 '나' 라는 존재는 육체인지 영혼인지 뭐가 뭔지, 하는 지리멸렬한 문제들이 영화를 보고나자 곧장 머리를 파고 들었지만 결국 단순한 나를 가장 사로잡은 것은 그 생명연장회사가 제시한 조건이었다.
어차피 꿈을 제공해주는 것이니 원한다면 억만장자로, 세계적인 스타로, 천재과학자로, 얼마든지 입맛대로 고를수 있고, 실연을 당하거나 다치거나 죽으면 RESET, 다시 꿈을 꾸면 되며 이도저도 아니고 그냥 갑자기 다 싫증나고 재미없으면 또 다시 다른 꿈을 꾸면 되는,
그것은 의식의, 꿈의, 향연이었다.

결국 주인공은 꿈에서 깨고자, 다시 육체 속의 정신으로 돌아가기 위한 결단을 내리는데, 육체와 정신, 뫼비우스의 띠 처럼 연결된 그 복잡한 공존처럼, 영화도 내내 빠른 편집과 몽환적인 분위기로 점철되어 사실, 줄거리조차 모를 정도였다. 어쨌거나 나는 그 영화를 보고 같이 본 사람들이 육체냐 정신이냐 어쩌고 두런두런 말을 할 때도 혼자서 어린애처럼 그랬다.
생명연장회사가 진짜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내 맘대로 되는 매력적인 꿈 속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어.
결국 주인공처럼 훌쩍 뛰어내린다 할지라도 말이야.


뜬금없이 영화 얘기를 한 것은, 그 영화를 보다가 문득 이 책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혹은 책 속에 등장하는 화자의 직업이 떠오른 때문이다.
자살 안내업자 혹은 자살 도우미. 철저하게 가상적인 인물, 그 직업의 묘한 매력.
의뢰인의 삶과 의식을 흡혈귀처럼 흡수하고 그들의 육신을 떠나보내는 일에 기꺼이 동참하며
압축할 줄 모르는 것은 뻔뻔하다, 말하는 그 남자.

일상적으로 ~해서 죽겠다, 는 표현을 꼭 입에 달고 살아서가 아니더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정말로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그런데 드라큐라 백작처럼 잘 생긴 남자가 어디선가 스윽 나타나서는 제 손을 잡아요. 아무도 아프지 않고 누구의 마음도 불편하지 않고 깔끔하게 처리되도록 도와줄게요. 용기를 가져요. 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그 악마적인 유혹에 빠져들지도 모른다. 마치 내가 이 책의 화자와 유디트, 미미, 사르다나팔에게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것 처럼 말이다.

남루하지만 친근한 일상, 비루하지만 치열한 현실,
나를 둘러 싼 소설 무더기 속에서 김영하는 순간 강하게 빛나는 어쩌면 튀는, 존재였다.
책과 영화 속으로 탈출하는 내게, 책장을 덮고 영화가 끝나면 고스란히(혹은 더 암울해진 마음으로)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어쩌면 가장 소극적인 탈출만을 일삼으며 숨을 쉬던 내게,
그는 모처럼 머나먼 세계로 나를 이끌어준 새로 등장한 교주였다.

 

지금의 나는 이제 그가 어떤 소설을 쓰든 상관하지 않는다.
처음엔 도시에서 막 돌아온 방물장수처럼
이런건 처음 봤지, 이것도 신제품이야, 하면서 처음보는 진기한 것들을 주르륵 꺼내놓는 그에게, 그 낯설음에 반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모르는 신기한 이야기를 해박하게 풀어놓는 그 입심에 홀랑 넘어갔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냥 그의 '이야기'가 좋다.

하지만, 첫(?)소설의 제목을 눈에 띄도록 잘 뽑아준 그에게 늘 고맙다고 생각한다.
무슨 일에서건 처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진행도 끝도 어차피 어불성설이 될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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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4-08-18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

urblue 2004-08-18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영하는 읽은 게 하나도 없네요. 하필 제가 한국 작가들을 외면할 때에 등장한 사람이라.
자살 안내업자 하니까 생각나는 단편이 있는데, 제목도 작가도 기억이 안나요. 자살주식회사, 뭐 그런 비슷한 말이 들어가는 제목이었는데. 아, 바보가 되어버렸나 봐요. ㅠ.ㅠ

urblue 2004-08-18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 놀이 좋다하구선 어디 가서 놀고 있는 거에욧!

어디에도 2004-08-18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어디다 소리를 지르고 이래욧! 블루님 서재에 가 있었다고요!!
(음... 이벤트 선물에 대해서도 약간 생각하고 있었어요. 님이 서재주인장보기로 주소를 남겨주시면... 제가, 선물입니다! 하면서 짠~ 나타나면 님이 얼마나 짜증날까, 뭐 그런 생각도 약간 하기도 했고... )(뭐야, 이거... 장난으로 썼다가 진짜로 선물을 해야 되는 지경에 이르렀잖아... 뭐야뭐야) 제가 싫으시면 책을 선물해드릴까요? 아아, 역시 제가 좋으시군요. 헛헛.

urblue 2004-08-18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선물이 뭘까 물어보려고 했는데, 음, 님이 선물이란 말이죠?
뭐, 나쁘진 않아요. 그럼.

어디에도 2004-08-19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요. 나쁘진 않아요.흠흠.(뭐냐 이건;)

그러면 주소 얼렁 줘요. 내가 머리에 꽃달고 가든지, 상자 속의 책이 가든지,
아니면 꽃 달고 제가 책을 안고 가든지 암튼 결단을 내릴테니까요. 흐으.

urblue 2004-08-19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 저보고 웃긴다더니, 님이 더 웃겨요.
님이 머리에 꽃달고 회사 앞에 서 있다가, 제가 지나가면서, 저 여자 뭐야?, 하면 충격먹지 않겠어요?

urblue 2004-08-19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나저나 아직도 그 단편 생각하고 있는데 전혀 기억이 안 나네요. 송경아 였던가... 일본 작가였던가...흐흑...

어디에도 2004-08-19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여자 뭐야, 라니요! 저 남자예요.(디게 썰렁하다. 하지만 제가 남자인 것도 나름대로 좋은, 응응응한 구석이 있잖겠어요?;)

단편... 저도 궁금해요. 워낙에 그런 음험한 내용을 좋아하는지라.
기억나면 꼭 말해주세요~

hanicare 2004-08-19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그 제목, 김 영하의 창작 아닙니다. 프랑소와즈 사강이 마약사범으로 붙잡혔을 때 내뱉은 말이랍니다.그 사실이 책 '어디에도' 없더군요.

어디에도 2004-08-19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어디선가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었는데... 그럼 김영하가 아니라 사강에게 고맙다고 해야하겠네요.^^
좋은 걸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2004-08-19 1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4-08-19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사강이 저 말을 했을 때는 뭔가 추하게 들렸는데 김영하는
쌈빡하게 살려놓았죠?
우리가 그 제목에서 바라는 온전한 의미로...

2004-08-20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얀마녀 2004-08-20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어디에도님 XY였어요? 0_0

tarsta 2004-08-21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서,설마 저,저,정말??)

아영엄마 2004-08-26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흠.. 좀 난해한 글과 코멘트가 난무하고 있어서 뭐라고 적어야할지 모르겠어요..ㅜ.ㅜ
그..그런데 어디에도 님의 성별이?? 모르는 척하고 휘리릭~~==3
 

...그러나 나는 항상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나가지 말라는 가냘픈 호소도 내면에 있었다.
너는 네 안의 무엇을 찾아 이곳까지 온 게 아니냐. 여기서 짐승처럼 사는게 네가 원한게 아니더냐. 사람 사이에 가지 마라. 가지 마라. 거기에는 심연이 있고 그 심연을 들여다 보면
뛰어 들고 싶은 법이다. 겉멋같으니! 뛰어 들겠다. 가고 싶으니 가겠다.

그래서 나는 절과 겨울과 눈의 극장에서 나왔다.
벗이여 스승이여 너는 세상에 참 아름다운 이름이 많다고 했다.
물빛의 수색(水色), 강의 서쪽 또는 서쪽으로 흐르는 강인 서강(西江)의 아름다움을 일깨워 준 것은 너였다.
사람의 이름이 지명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어떤 이름에는 살아 있어도 그런 힘이 느껴진다고 했다. 가장 흔한 질료인 말에 힘을 넣고 신을 넣고 혼이 되어 함께 뛰어노는 일이 문학이라고 너는 말했다. 이 애, 세월 세월 세월은 가고 이름은 남았다. 추억은 경멸할 만한 것이다. 그것에 먹히는 한은.

가볍게 내리는 비처럼 머리를 두드려 깨우는 추억은 아름답다. 우리가 함께 살아있는 동안.

 

이 글은 성석제가 친구 기형도를 추억하며 쓴 글의 일부이다.
5년도 더 전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그의 책 [위대한 거짓말]을 만났을 때 난 대략 6%쯤 남아있던 불신을 모조리 거두고 완벽한 그의 추종자가 되었다. 읽은지도 오래되고 수중에도 없는 책이라(아아, 너는 정녕 어디에 있단 말이냐 흑) 솔직히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허나 수첩 한 귀퉁이에 옮겨 놓은 저 문장들 중 나는 특히 사람 사이에 가지 마라, 가지 마라 하는 구절에 마음이 끌렸던 것 같다. 그리고 심연 속에 풍덩 뛰어들고 싶은데 무서워서 동동거리고만 있던 내 뒤통수를 가격하며 겉멋!이라고 일깨워 준 그를 나는 이 글의 제목처럼 '스승' 이라고 모시기 시작했다.

96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처음 만난 그의 <첫사랑>은 특이한 울림, 정도로 기억되었다.
다음에 읽은 단편집 [새가 되었네]는 내 관심사를 그의 이름 세 글자로 온통 메다꽂게 만들만큼 재미있었다. 그래서 열심히 찾아 낸 장편 [왕을 찾아서]와 장掌편 [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를 연달아 내처 읽었는데 그 후 난 그를 재밌어서 죽겠는 사람의 1순위로 바로 등극시키고 내친 김에 그를 덜컥 사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에 대한 내 마음이 성냥불처럼 화르륵 타올랐다가 이내 꺼져버리지 않도록 만들어준 진정한 힘은 그의 '소설' 이 아니라 그냥 그의 '글' 이었다.  
그 '글'이 바로 [위대한 거짓말]의 말미에 나오는 <스승들>이다.

그 글에서 성석제는 스스로의 과거에 대해 그 속에서 만난 '스승들'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 낸다. 그 속에는 바로 성석제 본인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글이 재밌기는 했을 망정 대단히 훌륭하거나 뛰어나서 그를 진정으로 사랑해버린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 속의 똘망한 소년이 혹은 얼치기 같은 젊은이가 아주 마음에 들어버린, 사소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에 나온 책 [즐겁게 춤을 추다가]를 읽다가, '겨울 눈밭을 보며 나는 울었네' 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그곳에서 죽고 싶다' 고 고백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덩달아 눈물이 날 뻔 했다.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치받혀 나도 모르게 목이 메었다.
사람들은 그의 농담과 수사에 익숙해져 그를 재미있는 혹은 웃긴 이란 형용사로 수식하기를 즐긴다. 물론 그것은 꽤나 어울리는데다 가장 적절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에게 그는, 웃음이 아닌 웃음으로 내 심연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려 방심하게 만드는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는 항상 나를,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게, 만드는 묘한 존재다. 
그리고 웃기는 것보다 울리는 것보다 언제나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일거라고,
나는 아직도 생각한다.

 

 

 

+) 나의 애정은 시위를 떠난 화살과도 같다. 어쩌다 놓쳤는지 제대로 가는건지 과녁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어 모르겠다. 화살이 부메랑처럼 돌아올 수 있다해도, 나는 돌아오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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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이었나 내가 토토로에 환장한 것을 알고 난 친구 녀석이 그 영화를 구해서 시디로 구워주었다. 가끔씩 기분이 좀 안 좋을 때, 난 그 토토로 시디를 돌려 보면서 그 속의 음악처럼 둥당둥당 다시 기분이 좋아지는 걸 지켜보는 게 무척이나 좋다. 그런데 그 친구가 토토로를 주면서 몇 개 다른 영화도  같이 구워줬는데 매번 토토로만 보느라 바빠서 다른 것들은 그냥 방구석을 굴러다니도록 내버려 두고 있었다. 그러다 어제, 우연찮게 그 중의 하나를 골라서 보다가...... 정말 우느라고 죽는 줄 알았다. 제목은  <반딧불의 묘>.

 

 

 

 

 

 

 

 

 

 

 

 

 

 

 

 

 

 

 

 

 

 

대강의 줄거리 정도는 어찌어찌 주워 들어 알고 있었고 또 감독인 다카하시 이사오라는 사람이 미야자키 하야오와 같은 지브리 스투디오를 어쩌구 저쩌구 한 여차저차한 사이라고도 하니(잘 모르면서 아는 척을 해야하니 대충 얼버무리기 전법;;) 내 마음은 이미 예전부터 심각하게 반딧불의 묘를 원하고 있은 셈. 허나 함부로 그 시디를 돌려보지 못한 단 하나의 이유는, 주변에서 본 인간들마다 무지하게 슬퍼서 펑펑 울었다는 사실. 그래서,
나는 (우는게 겁나서)매번 시디 껍데기만 만지작만지작 망설이다가 에이, 다음에~ 하고는 늘상 토토로만 줄창 봤던건데, 어제 밤 실행에 옮긴 결과, 조울증의 주기 중 울의 상태에서 이 영화를 보지 않은 것을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제는 편안한 조증 상태에서 밥먹고 술먹고 (둘다 얻어 먹어)기분이 좋았고 집에 와서 씻고 보니 웬일로 맥주도 냉장고에 얌전히 앉아 있어 혼자 캬캬 거리며 맥주를 따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이 영화를 척 돌리기 시작했는데.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안되어 곧장 희희낙락의 시간은 끝이 났고 그에 이어 바로 마시는 맥주가 그대로 눈을 통해 다시 빠져나오기라도 하는양 계속 줄줄줄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나중에는 너무 슬프고 가슴 아프고 안되었고 속상하고 해서 목에서 꺽걱 소리가 날 지경이었는데 약간의 술기운이 감정의 오바를 가져왔을 지언정, 이 영화는 아마 근 5년 아니 10년안에서라도 나를 가장 많이 울게 한 영화로 단숨에 기록되었다.

주인공은 세이타와 세츠코 남매다. 세이타는 중학생 정도의 나이, 여동생인 세츠코는 다섯 혹은 여섯 살 정도이다. 배경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일본의 어디. 전쟁 때문에 엄마가 죽고 군인인 아빠도 죽고 결국 고아가 된 그들이 친척집에 맡겨졌다가 점차 냉대와 구박을 받고, 둘 만 방공호 속에서 지내면서 굶고 훔쳐먹고 굶고 하면서 겨우 살아가는, 죽는, 뭐 그런 이야기.

나는 전쟁의 가장 극단, 반대말은 아이들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누구도 납득할 수 없는 전쟁의 광기와 끔찍함을 아직 세상이 뭔지 납득은 커녕 미처 다 알지도 못하는 나이의 아이들이 겪는다는 건 지독하게 잔인한 일이다. 허나, 그래서, 나는 영화나 드라마에 아이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잔뜩 긴장을 하고 실눈을 뜨게 된다. 흥, 얄팍할 수도 있어. 어린 아이가 주인공에다 전쟁이 배경이야?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웃다가 결국 맑고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장면 보여주려고? 흥! 내가 이번엔 그렇게 순순히 같이 울어줄줄 아시나? 하는 같잖은 반항심으로 말이다.

물론 <반딧불의 묘>는 그딴 알수 없는 반항보다는 무조건적인 기대감과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는 상태로 보기 시작했지만, 솔직히 주변 인간들이 울었다는 말에 약간은 경계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초반부터 그딴 마음은 눈사람 녹듯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미 나는 줄줄 울고 있었다. 그리고 한 번 시작된 눈물은 다 마셔버린 맥주병을 다시 채우고도 넘칠 만큼 멈추질 않았다. 함께 넘쳐버린 먹먹한 감정들은 밤사이 내내 나를 들쑤시고 떨게 만들었다.

새삼스레 전쟁의 무모함이니 잔혹함 같은 것들을 말하는 건 뭣도 모르는 내가 하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일이고, 애써서 말하려 한다고 해도 어떤 단어로도 표현이 부족할 것이다. <반딧불의 묘>를 보고 그 배경이 된 전쟁에 관해서나, 스토리를 통해 나타내고자 한 감독의 의도나 덧붙여 많은 이들이 칭찬해마지않는 그 섬세한 동작과 표정의 표현에 관해서조차 나는 잘 모르기 때문에 뭐라고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내가 설사 잘 안다고 해도 그것에 관한 많은 정보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나는 역시 할 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흔들고 움직일 수 있는 힘을 만났을 때, 진정으로 감.동.했을 때는  진짜 할 말이 없어진다. 그저, 부르르 떨면서 맘껏 울면 그 뿐. 그리고 그러한 순간 순간들이 주는 힘으로 어쩌면 계속
살아 갈 수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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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연엉가 2004-07-07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그냥 퍼갑니다.

2004-07-08 2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4-07-16 2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며칠 전에 이 영화를 봤다. 그리고 그 날, 이 영화에 대해 그리고 내가 한 때 믿었던 기독교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느라, 아니 나도 모르게 머리가 지혼자 생각을 해대느라 내내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오늘까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이 영화를 기억하고 있다. 그건 정말 감동적이라서 가슴이 저린 기분이나 진정 동감해서 박수치는 기분이거나 아니면 너무 재밌어서 좋아라 하는 기분도 아닌, 정말 알 수 없는 명치 끝의 동요,였다고 느끼고 있다.

고등학교 때 친구 때문에 몇 번 방문 한 것을 제외하고 진정 자발적으로 교회에 간 것은 초등학교때가 전부인 내가, 한 때 나름대로 진정한 마음으로 매일밤 자기 전 침대맡에서 기도를 했던 중학교 시절을 이미 까맣게 잊어먹은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새삼스런, 기독교에 대한 나의 무지막지한 불신과 편견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 것은 생각컨대 진정 역사 속에 존재하는 예수라는 한 인간의 힘이었다. 그는 신의 아들이기 전에 인간의 아들이었고 그 자체로 악마의 유혹을 받는 나약한 인간이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갈등이 나오는 영화의 처음 장면에서 나는 이미 이 영화를 괜찮은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장면이야말로 이후의 잔인 혹은 진실, 참혹 혹은 사실적인 내용들보다 가장 잘 이 영화의 내면을 꿰뚫고 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하면, 집에 와서 집구석을 샅샅이 뒤져서 먼지가 한 10센티는 내려앉은 작은 성경책을 찾아내서 영화에서 나온 장면들을 뒤져 볼 만큼, 이 영화가 내게 준 인상은 상당히 강렬한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나으 좌석이었다. 작아터진 극장에서 맨 앞줄, 맨 오른쪽. 으으으흑. 좌석이 그것 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을 때 좀 더 심각하게 갈등하고 고려를 했어야 했는데, 갈등 때리는 것도 귀찮고 나중에 극장 다시 오려면 열배로 더 귀찮고 해서 그냥 본 것이 그렇게 큰 고통을 내게 선사할 줄은 정말 몰랐다.

중반, 후반부로 가면서 영화는 피와 살점의 향연으로 치달아가고 감동의 곡선은 그에 발맞춰 가파르게 상승해주어야 할 것만 같은데, 난 내 바로 앞에 육박해있는 커다란 자막을 읽어대느라 눈이 금새 뻑뻑해졌고 붉은 피, 튀는 살점들은 뻣뻣한 내 머리어깨목허리와 함께 어우러져 지독한 현기증을 유발했다. 

장담컨대, 편안한 좌석과 적당한 거리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면 난 집에 와서 성경을 찾아내서 한 번 스윽 펼쳐보고 마는 것이 아니라 아예 독파를 감행해내었을지도 모른다. 신의 존재는 부정하지 않지만(하느님이든 누구든) 예수의 존재 자체에 대해 무지로 인한 불신만을 내세웠던 내게 이 영화는 종교라는 것에 대해 한 번 날잡아서 심사숙고를 해봐야겠다는 중대한 결심을 하게 만들어주었다. 무교에다가 기독교에 대한 맥락없는 등돌림만을 고수해온 내가 이 정도로 반응을 보인다는 건,  기독교인들이 보기엔 상당히 고무적인 일은 아닌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미 난 어린 양이 아니라 늑대 한 마리니까;;;)  

덧붙여,  다시는 극장 맨 앞 좌석에는 앉지 않겠다는 시퍼런 결의가 가슴에 자리잡은 의미있는 경험이었다고 기억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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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극장은 멀고 TV는 가깝던 시절, 주로 주말의 명화들을 섭렵하며 영화의 세계에 한 쪽 발을 담그고 있던 나는 그것들만이 그 세계의 전부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간간히 집에서 발견되던 '스크린' 이라는 잡지를 간식삼아 먹어치우면서 헐리웃 영화가 마구 심어주는 꿈과 희망의 열락에 빠진 나는 그 당시 '방화' 라고 불리우던 것들을 싸그리 무시하며 헐리웃이 던져 주던 모든 것을 그저 널름널름 받아 먹으며 행복해 했었다.

그러다 나이를 먹고 머리통은 굵어지고 발은 발발거리며 여기저기를 싸돌아댕기니 내가 알고 있던 그 세계가 내게 두루뭉수리한 실체와 싸가지없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그에 나는 머리 속에 존재하던 헐리웃의 권좌를 사뿐히 갈아치우면서 그 자리에 한국영화를 포함한 온갖 영화들을 가져다 마구 얹어놓았다. 그 또다른 영화의 세계는 내가 십수년을 낯익어해왔던 영화의 틀을 없애고 갈아엎고 뛰어넘으며 내게 돌진해왔고 그 새로운 맛깔남에 나는 한때 졸아가며 이름 긴 감독들의 영화를 보고, 이름 어려운 감독들의 영화라면 사족을 못쓰는 만행까지도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싫증 잘내는 성미를 못버리고 곧 그것조차 시들하게 되자 본디 그렇듯 그냥 꼴리는 대로 보기,의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영화를 대하게 되었는데, 우스운 건 나름대로 이맛저맛 다 본 후라서 줄거리나 내용보다는 무조건 좋아하는 배우나 감독에 따라서 영화를 고르는 짓을 계속 하고 있으며, 헐리웃 딱지가 큼지막하게 붙은 스펙타클감동만빵스토리, 너에게는 나를 보낼 수 없다,는 같잖은 오기도 계속 부리고 있다. 사실 뭐 워낙 액션이나 전쟁물을 안 좋아하는 이유도 있기야 있지만. 어쨌거나 묻지도 않은 과거사를 주루룩 읊어댄 이유는 단 하나, <태극기 휘날리며>는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한국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 스펙타클감동스토리로나 돈 많이 쓴 티 팍팍 내는 모양으로나 코묻은 내 돈과 같잖은 내 감동을 받아먹기에는 상당히 불리했다는 얘기가 하고 싶어서였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광고를 때려댈 때 한 번 쓱 눈길을 준 것, 최단기간 1000만 돌파 어쩌구 할 때 뉴스 한 번 본 것을 말고는 역시 관심도 없었고 딱히 볼 마음도 들지 않았다. 강제규 감독도 별로고 제작비 백 몇 억도 그냥 그렇고 원빈도 뭐 관심없고(장동건은 좀 낫다) 아까도 말했듯 전쟁영화 자체에 진짜 관심이 없으니, 하등의 볼 이유가 없었다. 어릴 적 토요일마다 잽싸게 학교 갔다 와서 가열차게 채널을 돌려대도 딱히 볼 건 없는데 토욜이고 TV는 봐야겠고 해서 억지로 보던 '배달의 기수' 의 안 좋은 추억 때문인지 아니면 대부분의 리얼한 전쟁영화에는 예쁜 여자가 당최 안나와서 그런건지 어쨌든 남들 다 좋다던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한편의 시라는 <씬 레드 라인>이나 나한테는 진짜 졸린 영화들이었다. 그런데 왜 봤냐고 누가 물으신다면 뭐 대답은 뻔하다. 일요일이었고 방구석에 늘어져 있었고 친구가 보여준다고 꼬셨고 귀찮다고 하니 술까지 사준다고 그물을 쳐왔고, 해서 난 못 이기는 척 그냥 덥석 그물에 몸을 내던졌을 뿐인, 그런 거였다. 이러하니 시작되는 순간부터 이미 난 이 영화에 좋은 감정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본 인간들마다 족족 감동적이네, 울었네, 했던 것을 되새기고 있던 나는, 내가 호락하니 감동을 먹어줄줄 아느냐- 하는 거의 정신나간 째려봄의 수준으로 감상을 시작했으니, 뭐 거의 혼자 벌이는 쌩쇼였던 셈.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영화를 계속 보다 보니, 째려보느라 눈알도 아프고 괜히 승질 피우니 슬슬 피곤도 몰려오고 해서만은 아닌, 그냥 나도 모르게 조금씩 그 속에 빠져들었다.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꼭 나처럼 표현하진 않겠지만, 이 영화 대략 정신없었다. 전쟁터에 안가봐서 잘은 모르겠지만 진짜 눈 앞으로 총알이 퓌융퓌융 소리내며 쌩쌩 날아다니고, 사람은 여기저기서 사지절단나며 피를 뒤집어쓰고, 수류탄 막 터져대서 사람이며 흙더미며 피가 천지사방으로 튀어나가고 하니, 가뜩이나 눈알이 건조해서 상태가 안 좋은 나는 흔들리는 전쟁의 현장을 따라잡느라 진짜 멀미가 나고 눈알이 빠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폭탄 맞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 꼬는 심정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진지 오래였고 속으로는 나도 모르게 감탄이 절로 나왔다. 동네 극장이라 유난히 애새끼들이 많이 와서 절로 짜증이 났던 감정마저 어느새 물밀듯이 사라졌고 총 쏴서 뒷통수 터지는 장면에서는 '어맛 이런거 어린 애들이 봐두 괜찮나' 하며 나도 모르게 그 생생함에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한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나는 슬슬 지쳐갔다. 춘삼월 꽃구경도 하루이틀이지 무슨 중공군 인해전술도 아니고 두 시간을 내내 박터지게 리얼해주시니 머리가 아플 지경이 아니라 진짜로 머리가 아팠고 멀미가 났으며 귀도 아팠고 부아도 치밀었다. 그리고 아 C 전쟁 언제 끝나고 집에 가냐,고 내가 전쟁에라도 참전한 듯 간절한 기분마저 솟구쳐오는 것이었다. 막판에 할아버지가 된 원빈이(젠장 극 중 원빈 이름도 기억이 안난다) 진태(장동건 이름은 기억난다;)의 해골 앞에서 형 형 하며 울 때는 사실 좀 짠하기도 했다. 물론 그 전에 인민군 전사가 된 장동건이 원빈을 위해서 지네 편을 겨누고 따발총을 발사해댈 때나 아니면 아예 그 전에 두 형제가 졸지에 군대로 끌려 갈 때 엄마랑 헤어지던 장면에서는 감동같은 거 안해주리라 하던 오기는 어디 갔는지 나도 모르게 울 뻔도 했다.(사실 신파에 약하다;) 어쨌거나 몇 번의 짠함과 감탄 그리고 전반적인 멀미를 겪고나니 영화는 끝나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니 강제규라는 사람이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6.25라는 역사적, 민족적 아픔 어쩌구 하는 거창한 소재를 끌어 들인다는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닐진대 게다가 그 상흔에는 5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함부로 풀지 못하는 이념이라는 문제가 결부되어 있는데도 그는 중장년층까지 극장으로 끌어올 수 있는 그 소재를 끝까지 아무 문제없이 엮어내었다. <태백산맥>처럼 원작 비스무리하게만 만들어도 우익단체에서 난리를 떨어대는 나라에서 가장 민감할 수도 있는 재료를, 끝간데없는 '형제애'(이게 영어 제목이란다)라는 머리가 아닌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고급양념으로 잘 버무리고 눈과 귀와 혼까지 쏙 빼놓을 것 같은 최첨단 특수효과로 완벽하게 데코레이션 하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그런데도 그는 해냈다. 그것도 아주 잘. 1000만명이라는 인간들이 가서 보고 울고 할 만큼, 돈도 전혀 아깝지 않을 만큼. 그저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다른 할 말이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 영화가 잘 만들어져서 잘 되면 한국 사람인 내가 좋으면 좋았지 나쁠 게 뭐가 있을까마는, 영화를 보기전에 가진 내 편견은 차치하고라도 영화를 보고 나오는 내 기분이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라면, 남들 다 좋다니까 괜히 튈려고 지랄하네, 하고 누가 말한대도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그냥 돈 많이 들여서 돈 많이 버는 영화를 보면 다행이다 싶은 생각보다는 왠지 작고 재밌는 영화들이 더 사라져버릴 것 같은 아쉬움이 엄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한국영화의 다양성 어쩌구 하는 훌륭한 얘기를 줏어들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한없이 게으른 내가 한 주만에 극장에서 홀랑홀랑 사라져버리는 영화들을 놓치고 땅을 치면서 비디오나 빌려보는 일이 게으름을 고치기 전까지는 계속 될거 같아서 너무 싫기 때문이다.

영화가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총알이며 폭탄이며 시체며 점점 다 돈으로 보였다면 흠, 역시 너무 오바인가. 어쨌거나 <태극기...>와 비슷한 이유로 관심 없었던 <실미도>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왠지 강하게 드는 것은 전반적으로 비교를 당하는 두 작품에서, 태극기가 심어준 그 어떤 찝찝함을 실미도, 네가 벗어나게 해다오, 하는 바램과 기대 때문이겠다. 또다시 여자주인공없는 삭막한 영화를 봐야한다는 것이 못내 애통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극장에서 다 사라져버리기 전에, 얼른 실미도로 달려가봐야겠다. 아, 나를 기다려 줄까.?

 

+)

역시나 난 원빈이 별로라는 걸 다시 한번 확실하게 깨달았다.(그래도 장동건 은 점수 좀 먹었는데;) 
사실 형제애라고는 개미똥정도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내게 돈독한 형제애로 휘날려 제껴지는 영화가 가슴에 딱 달라붙기를 바라는 자체가 개꿈스럽다.

핀트가 좀 안맞긴 하지만, 난 장동건이 부러웠다. 동생이든 가족이든 아니 그 무엇이라도 자신을 온통 몰두하여 내던질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 아닌가. 비록 흙더미 속에서 이름없는 무덤으로 남을지언정, 그는 행복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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