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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2 1
아다치 미츠루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1999년 3월
평점 :
절판
무뎌져 가고 있다고 느낄 때, 예전 같으면 뒤집어지게 웃거나, 땅 파고 누울 듯이 울 만한 일에도 그저 피시시 웃음을 흘리고 달랑 눈물 한 방울 흘리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도 나날이 덤덤해지며 세월을 쌓아가기만 하는 것이냐 하는 자조적인 혼잣말을 뇌까릴 때, '만화' 라는 녀석은 내게 묘한 힘으로 생기를 돋궈주는 참 신기하고도 고마운 존재다. 아끼면서 모아둔 마일리지와 적립금을 보태서 주문을 하고 일부러 안기다리는 척 외면을 하다가 한아름 책이 담긴 큰 상자를 편의점에서 받아 안고 간만에 입이 찢어지게 웃었다.
예전의 나는 일본만화에 대해 전혀 출처를 알 수 없는(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그저 무조건 가볍고 재미없을 거라는 희한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스포츠 만화라고 하면 스포츠라는 말만 나와도 바로 라이벌, 좌절 그것의 극복과 눈물나는 승리의 감동적인 결말, 과 같은 뻔한 스토리가 머리 속에 자동으로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통에 그것들을 온통 뻔하다는 편견 속에 집어던져 버리고는 괜히 일부러 볼 필요 없다는 일관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역시, 빈약한 근거와 무모한 아집으로 버티는 편견덩어리는 항상 뒤통수를 얻어 맞도록 되어 있는 모양이다. <H2>는 단숨에 잡다한 내 편견들을 장외로 날려버렸고, 이어서 나를 방망이로 얻어 맞은 것 마냥 녹진녹진하게 만들어 버렸다.
<H2>의 그림체는 전혀 화려하지도 예쁘지도 않은 진짜 단순하다 싶은 모양새를 지닌다. 오죽하면 머리 모양만 다를 뿐 주인공들의 생김새가 다 비슷비슷해서 헷갈린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게다가 대사도 그다지 많지 않고 헐렁헐렁하다. 고등학생이 주인공인 야구 만화에다 삼각 관계가 등장하는 청춘물이니 뭐 대사가 촘촘할 필요가 있겠냐 할수도 있지만 흔히 등장할 법한 로맨틱한 혹은 인생격언류의 진지한 대사조차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H2>는 진정으로 빛을 발한다.
미묘한 표정, 간결하지만 1000% 함축적인 대사, 무심한 듯 그려놓은 배경, 지나치기 쉬운 빈 공간까지도 이 만화에서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이다. 단순하면서도 미묘한 인물들의 표정으로, 섬세하게 구성된 칸나눔으로 그리고 구구절절 필요없이 말줄임표 단 하나로 가슴을 내려앉게 만들 수 있는 신선한 힘은 진정 이 만화만이 지니고 있는 최대의 장점이다.
심지어 늘상 쓰는 '왜' 나 '미안' 같은 단어들도 이 만화 속에서는 순식간에 인상적인 대사로 탈바꿈한다. 만화를 보지 않은 사람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그 앞 뒤 상황에 맞물려 절묘한 타이밍으로 가슴을 후벼파는 단어들, 즉 이 만화는 대사 하나하나가 아니라 온 몸(?)으로 말을 건네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여러 번 보면 볼 수록, 줄거리가 아니라 세부에 집중할 수록 이전에는 놓쳤던 작은 칸 하나, 말풍선 하나에도 또다른 감흥을 즐길 수 있다. 덧붙여 곳곳에서 튀어 나오는 어찌보면 어설프고 썰렁해 보이는 아다치 미츠루 특유의 유머는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웃음 짓게 만드는 따뜻한 에너지로 넘실거린다.
두 명의 야구소년 히로와 히데오, 그리고 둘 사이의 히까리. 서로 좋아하고 질투하고 경쟁하고 성장해가는 이야기. 늘상 느끼는 거지만,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이야기꾼이다. 그리고 어려운 말을 쉽게 만드는 것, 긴 이야기를 압축할 줄 아는 것, 똑같은 말이라도 다정하게 건넬 줄 아는 것은, 진정으로 행복한 능력이 아닐까.
34권이라는 분량이 조금도 많다거나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흔히 말하는 여백의 미, 행간의 묘미를 맛보기 위해 자꾸만 다시 들추게 만들고 눈을 가까이 들이대게 만드는 <H2>는, 여전히 내 눈을 계속 나빠지게 만드는 아주 고약한 만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