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호이징하의 말처럼 르네상스는 '중세의 가을'이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며, 변화의 계절이다.
르네상스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피 튀기는 전장이다.
변화가 들끓는 곳엔 언제든 문화가 발전한다.
마치 저 고대 희랍처럼 말이다.
내가 오정희를 좋아하는 이유는 숨가쁨 때문이다.
그는 나긋나긋하지 않다.
절제 가운데 할 말을 다 쏟아놓는다.
그래서 더욱 따갑지만 말이다.
김윤식의 비평은 물기에 젖어 있다.
그의 글은 부드럽지도 친절하지도 않지만 눅눅한 서정이 묻어난다.
그것은 그가 작가 지망생이었다는 사실 때문일테다.
하지만 그에 앞서 그 자신이 고백하고 있듯이 그의 문학은 바다라는 자연에서 연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얼굴을 많이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인간은 불쌍하다."
이것이 위화 문학의 가장 큰 명제이다.
위화 문학에서는 선인과 악인이 따로 없다.
조금 더 선하고, 덜 선할 뿐이다.
이것이 위화의, 그리고 중국 문학의 큰 특징이리라.
내가 공감을 얻는 것도 이 때문이다.
좋은 교감이다.
<요코 이야기>가 해방 후 북에 남겨진 일본인 이야기라면 이 소설은 남에 남겨진 일본인 이야기다.
앞의 소설이 정치 이야기가 없는데도 정치소설로 읽힌다면 뒤의 소설은 정치 이야기가 많은데도 정치소설로 읽히지 않는다.
전성태는 인간을 신뢰하는 것이다.
국적이 무엇이건, 정치가 어떻건 사람을 믿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