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의 신들을 보며 나는 인본주의 혹은 인문주의의 결정을 맛본듯한 느낌을 가졌다.
단독자로서 인간은 도대체 어디까지 높아질 수 있을까?
한계란 게 없을까?
개인과 사회, 사회와 개인.
이 역학 구도는 수시로 문학의 모티프로 사용되고 있다.
대부분의 문학에서는 개인이 우선 - 작가의 주제의식면에서 - 하다고 그려지고 있지만 실제는 반대의 상황이 대부분이다.
William Golding(1911-1993)
가오싱젠의 <영산>이 그렇듯이 이 작품도 원시성으로의 회귀를 바라고 있다.
무익한 것은 아니나 복고는 사람들을 순응적이게 만든다.
성찰을 위해 가끔씩 뒤를 돌아보는 것은 좋지만 항상은 아니다.
때마침 김규항의 <예수전>을 함께 읽어 이해에 도움이 되었다.
두 사람 다 예수를 정치적으로 읽는다.
이런 시각이 민중신학과 해방신학 이후에는 거의 없는 듯 한데 예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케 한다.
문제는 예수의 정치적 폭발력 이후다.
그것이 기독교의 밑절미인데 두 사람의 부족함은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시심(詩心)이 메마른 시대다.
사르트르가 시를 언어에 대한 숭배라 격하시켰지만 메마른 이 시대엔 한 구절의 시가 필요하다.
시의 모닥불이 피어나야 한다.
곁불이라도 온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