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장기는 여러 이야기를 건네는 것 보단 한 이야기를 오롯이 헤쳐 보여주는 게 아닌가 한다.
<새신자반>과는 시간적 거리도 있을테지만 한결 은혜롭지만 다른 책자에 비하면 덜하다.
중국이 시끌시끌하다.
개혁개방 30년과 근대화 100년의 업적을 올림픽에 쏟아 놓겠단다.
개혁개방의 와중에 송강은 자살한다.
이광두와 임홍의 몸과 마음은 피폐하다.
송강의 자살은 위화에게선 꽤 특이하다.
그만큼 위화는 지금의 중국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바리데기의 삶이 우리네 한국인의 삶을 여실히도 보여준다.
잘못한 게 없는데도 죄를 지었다고 하니 말이다.
작가가 큰 물에서 놀더니 작품이 더 할수록 경계를 넘어 소재 삼음이 다양해진다.
좋은 현상이다.
성공한 이들의 수기란 게 많이 다르진 않을테다.
또 그로부터 우리가 얻는 감회 역시 일종의 절망 비슷한 게 아닐까 한다.
될 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데 저자에게 참 어울리는 말이다.
의지와 절망 사이가 우리 있는 삶이란 곳이 아니던가.
형식면에선 이 소설이 갖는 의미가 남다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유색인종을 대하는 백인들의 모습을 보라.
콘라드는 분명 소설의 지평을 넓혀 놓았다.
하지만 그의 오리엔탈리즘은 분명 책임을 져야 한다.
사이드의 박사 논문이 그를 향한 건 당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