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픔과 슬픔이 놓여 있다.
그러나 잘 드러나지 않는다.
왜일까?
그의 공부 많음이 한 이유가 될 것이다.
시인은 노래하고 학자는 생각한다.
김지하는 중간에 서 있다.
그는 솔직하지만 또한 한 없이 어렵다.
근래 시도 들춰볼 일이다.
사회학문은 근대의 총아이다.
경제학과 더불어 법학은 사회학문의 큰 축이다.
변혁의 시대 이제 법학은 어느 곳에 자리를 틀 것인가?
근대는 법에서 인간과 소통이 사라지게끔 했다.
'사이'에 자리잡고자 함은 이제 대화를 열어가고자 함이다.
좋은 소설이다.
가까이에 이토록 귀중한 보석을 두고 힘겨운 헤맴을 했다.
작가는 쉽사리 분노해서는 안 된다.
모른 체 무심해서도 안 된다.
찻 껍찟은 그 사이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틀고 있다.
허나 아쉬운 점은 문학은 한숨만으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제3세계인에게 큰 어려움이리라는 걸 알지만.
Chart Korbjitti(1954-)
조동일 교수가 이야기 했듯 대안이 문제다.
푸코에 기댄 사이드가, 망명자로서의 사이드가 할 수 있는 건 비판일 뿐인가?
여러 문화와 문명의 동등함과 공존만을 주장하고 말 것인가?
다시 말하지만 사이드가 중세를 돌아보는 건 근대를 비판하기 위함일 뿐이다.
근대 이후에 대해 그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푸코처럼 말이다.
프로이트야말로 오리엔탈리스트 아닌가?
그는 여러 유럽어에 능통했고, 유럽의 고전에 정통했다.
그에게 동양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대상이다.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가 '말년의 양식'은 맞겠지만 프로이트를 너무 후하게 대할 필요는 없겠다.
초월해, 역설적으로 그런 가혹함과 고독 때문에 그들의 이후 역사가 드러낼 일련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