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4 두 장으로 한국사회 읽기 2008-2009 - MB시대, 정치.사회.문화의 쟁점들
최태욱, 염종선 엮음 / 창비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시리즈 1권에 비하면 주장들의 집중도가 한결 높다.  

 

  부제에서 보여지듯 'MB시대'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년새 책값은 올랐지만 그 값을 하고 있다.  

 

  칼럼을 보며 드는 생각은 MB시대를 맞아 우리가 얼마나 헤매고 있는가이다.  

 

  MB는 좌고우면하지 않는데 우리는 기웃거리고 갸웃거리고 있다.  

 

  부끄럽게도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쿠타가와 작품선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43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진웅기.김진욱 옮김 / 범우사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다." (<라쇼몽>) 이러한 서두는 의미심장하다. '어느 날'이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하루일 수 있다. 그러나 역으로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기이한 하루일 수도 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기에 독자는 호기심을 가지며 계속해서 전개될 이야기에 주목하게 된다. 이제 하인배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홀로 라쇼몽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 

  화자는 잠시 교토(京都)의 현실을 말한다. 교토에는 자연재해가 끊이질 않는다. 마을은 말할 수 없이 황폐해 졌으며 라쇼몽도 역시 이곳 저곳에 흠이 갔다. 자연의 재앙에 따른 인간의 황폐함은 하인을 비롯한 소설의 인물들 역시 그 내면이 황폐해져 있으리라 생각케 한다. 이어진 까마귀의 묘사는 불길한 예감을 더욱 일으킨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그 많던 까마귀가 한 마리도 보이질 않는다. 늘상 보이던 그 무엇이 보이질 않을 때 사람들은 의문과 함께 두려움을 느낀다. 독자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불길한 예감을 더욱 갖게 된다. 
  
  화자는 다시 하인을 이야기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대목이다. "작자는 위에서 '사나이가 비가 멎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썼다.······그렇기 때문에 '사나이가 비 멎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는 것보다는 '비에 쫓긴 사나이가 갈 곳이 없어 방황하고 있었다'라고 하는 편이 적당할 것이다." 화자는 하인과 친하지 않은가 보다. 하인의 심리를 화자는 잘 알지 못한다. 화자는 끊임없이 인물에 대한 의견을 정정하거나 덧붙인다. 독자는 의아하다. 화자의 시야에 의해 인물들과 사건을 볼 수밖에 없는 독자들로서는 이제 화자가 별로 미덥지 못하다. 나는 이것이 러시아 형식주의에서 말하는 '낯설게 하기'가 아닌가 한다. 화자도 잘 모르는 하인을 독자인 우리는 더욱 알 수 없다. 하인은 독자에게 낯설다. 그의 심리가 어떤지, 어떤 행동을 벌일 지 우리는 예측하기가 힘들다. 

  낯설게 하기는 소설의 시종 계속된다. "다락 위에서 비치는 불빛이 희미하게 이 사나이의 오른편 볼을 비추고 있다. 짧은 수염 속에 벌겋게 곪은 여드름이 드러나 보였다." 소설의 중간에서도 화자는 하인을 처음 본 듯이 이렇게 그의 외양을 묘사한다. 소설의 초반부에 이미 화자는 하인의 외양을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한 바 있다. 또한 "한 사나이가 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숨을 죽여 가며 다락 위의 분위기를 살피고 있다."라 말하며 마치 비로소 처음 등장하는 인물인 듯 묘사한다. 소설의 전체를 놓고 볼 때 낯설게 하기는 성공을 거둔 듯 싶다. 하인의 돌발적 행동은 독자를 놀래키기에 충분하다. 
  
  "비는 라쇼몽을 둘러싸고 쏴 하는 소리를 휘몰아온다. 하늘은 저녁 어스름이 짙어지면서 점점 낮아진다. 위를 쳐다보면 문의 지붕 비스듬히 내민 기와 끝이 뿌옇고 검은 구름을 무겁게 떠받치고 있었다." 하인을 향했던 시선은 차츰 하늘과 라쇼몽의 지붕, 그리고 기와 끝으로 이동해간다. '검은 구름'과 하인의 심리는 교차한다. 화자는 풍경을 살피다가 하인으로 시선을 돌린다. 둘은 별 연관이 없는 듯 하나 사실은 살핀 바처럼 매우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다. 화자의 시점은 인물과 배경을 번갈아가며 향하고 있다. 
  
  하인의 심리를 확인한 화자는 하인의 결단을 말한다.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선 수단을 가릴 겨를이 없다. 하인의 심리는 침침한 구름, 시야를 가리는 비와 같이 명료하지가 않다. 그는 끝없이 고민한다. 그는 감정적이다. 
  
  주인공 외양의 특징 중 하나가 여드름 있는 얼굴이다. 홍안(紅顔)의 사나이는 아직은 감정적인 청년이다. 그가 어떤 행동을 할 지 독자인 우리는 긴장하며 계속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의 여드름 난 얼굴을 화자가 계속해서 그려내는 것은 긴장감을 유도하기 위한 전략이다. "물론 이 사나이는 아까 전까지 자기가 도둑이 될 생각이었던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혈기방장한 나이이기에 그가 어떤 선택을 하며 행동을 할 지 우린 긴장하며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하인은 게비이시청(檢非違使廳)에서 일하다가 도망 나온다. 그가 일하던 곳은 우리말로 하면 포도청 정도가 될 것 같다. 포도청이란 무엇인가? 죄를 벌로 징치(懲治)하는 곳이 아닌가? 그가 이 곳에서 도망 나온 이유를 우리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선과 악이 가장 극명히 대립하는 공간에서 그가 도망한 것은 그의 행로를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은 "하인 차림의 사나이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끝을 맺는다. 미정형-'어느 날'-으로 시작된 소설은 종결 역시도 모호하며 허무하다. 
  
  화자가 주인공을 부르는 칭호는 다양하다. 하인, 사나이, 한 사나이 등 화자는 여러 가지로 주인공을 부르고 있다. 칭호가 바뀜에 따라 주인공은 다양한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외양의 묘사와 같이 반복되기도 하지만 심리면에서는 새로운 면모가 밝혀진다. 이는 주인공이 쉽게 정형화 할 수 없는 근대인의 표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을 규정 짓는 그 무엇이 사라진 근대 공간 속에서 인간은 이제 어디로 갈 지 알 수 없는 복잡한 존재이다. 소설의 마지막 구절은 이러한 맥락에서 의미심장하다.
  
    소설의 제목인 라쇼몽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삶(生)이 그물처럼 펼쳐지는(羅) 곳(門)이란 뜻이 아닐까? 이 곳에서의 삶은 인간의 원초적 생이다. 선악의 구분이 없으며 구분이 아무 의미가 없는 곳이다.  

  

          芥川龍之介(1892-19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테르부르크 이야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8
고골리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광인 일기>)의 주인공은 9급의 말단 관리인 뽀쁘리신이다. 그는 우리에게 20편의 일기를 보여준다. 일기는 10월 3일로부터 시작된다. 생각건대 일기의 날짜도 의미가 크다. 10월 3일로부터 12월 8일까지는 날짜의 순서가 정상적이다. 그러나 갑자기 2000년 4월 43일로 넘어가더니 이해하기 힘든 날짜의 조합들이 보인다. 소설은 일단 정상적인 날짜로 표기되는 앞부분과 이해의 상식을 넘어서는 뒷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는 단지 날짜 표기만의 문제가 아닌 주인공의 정신 상태와 매우 관련이 깊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뽀쁘리신은 직속 상관인 과장을 싫어하나 내색은 저어한다. 과장은 말끝마다 그를 무시한다. 뽀쁘리신은 과장은 제쳐두고 국장의 눈에 들려 노력한다. 그는 국장의 집 서재에서 펜을 깎는 것을 아주 즐거워한다. 그는 또한 국장의 딸인 소피아를 짝사랑한다. 뽀쁘리신이 사랑하는 것은 결국 국장과 국장의 딸로 대변되는 상류층의 생활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인공에게 겨우 7급 관리인 과장의 말들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그는 자신을 대단한 양 생각한다. “그래 내가 하찮은 평민 출신이란 말인가? 나는 재봉사 집 출신도 아니고 하사관의 자식도 아니다. 이래 뵈도 나는 어엿한 귀족이란 말이다!” 

  그러나 귀족인 자신을 불행케 하는 요인이 한 가지 있다. ‘재산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분제가 상당히 무너진 러시아에서 여전히 자본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구시대인의 모습을 드러낸다 할 수 있다. 

  뽀쁘리신이 경모(敬慕)하는 국장의 행태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장은 프랑스어나 독일어로 된 책을 상당히 가지고 있다. 제목으로 보아 상당히 학술적인 책들이다. 주인공은 우선 이 책들로부터도 심리적으로 위축된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기호를 생활로 접하는 사람들에게서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그는 신분 상승의 꿈을 갖는다. 소피아에 대한 사랑도 이와 연관된다. 허나 문화적 거리감에서 시작된 좌절은 소피아가 그를 사랑하지 않으며 오히려 조소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부터 급격히 심해진다. 그러나 만일 주인공이 광인(狂人)이 아니었다면 좌절로 끝이 났을 이 이야기는 물꼬를 생각지 못한 곳으로 튼다. 

  뽀쁘리신은 외려 신분 상승의 꿈을 더욱 과감히 갖게 되고 자신을 스페인 왕으로 착각한다. 일기의 후반부라 할 수 있는 2000년 4월 43일부터 바로 이 같은 내용이 전개된다. 그는 급기야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다. 일기의 전반부에서 뽀쁘리신은 자신의 환경에 불만은 있지만 그것은 지나치지 않으며 자신의 처지도 인정하는 편이다. 허나 후반부 들어 그는 자신을 스페인 왕으로 선언하며 제 처지를 전면적으로 부인한다. 
  
  주인공은 과대망상증을 앓고 있다. 과대망상증은 다름 아닌 자신의 한계를 깊이 깨닫는 데서 온 것이다. 42살이 되도록 빈털터리이며 사랑하는 여자에게 뜻도 내비치지 못하던 그는 서서히 미쳐간다. 그는 현실의 무력한 자신을 벗어나 강한 힘을 가진 자를 연모하게 되는데 이 때 그는 스페인 왕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광인의 자기 인식과 사람들의 그에 대한 이해는 그가 정신병원에 갇힘으로 좀처럼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을 갖는 상태에서 일단락 된다. 
  
  고골의 소설은 1834년 작품이다. 이 무렵 러시아는 끊임없이 도시화가 진행되었고, 그 중심에는 짜르를 중심으로 한 관료사회가 자리잡고 있었다. 관료들은 신분 상승의 욕망을 지녔으며 현실에서 이를 이룰 수 없을 때 도박이나 향락으로 울분을 삼키는 경우가 많았다. 뽀쁘리신은 관료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말단관리의 전형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는 사랑을 통해 울분을 삭이려 하나 이마저 이루지 못하고 끝내는 미쳐 정신병원에 갇힌다. 

  고골의 희곡인 <검찰관>을 읽은 기억이 있다. 지방 도시에 검찰관이 온다는 소식에 부패한 관리들이 뇌물과 연회를 준비한다. 그런데 도착한 이는 검찰관이 아닌 건달이었다. 건달을 성대히 대접한 후 자축하는 사이에 진짜 검찰관이 도착하여 관리들은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이 작품 역시 <광인 일기>에서와 같이 관리들의 실태를 고발하고 풍자하고 있다.   

  루쉰의 <광인 일기>는 물론 고골의 소설에 대한 패러디이지만 그 과녁이 관리가 아닌 중국인 전체를 향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차이다.  

 

    Nikolai Vasilievich Gogol(1809-185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녀도 - 김동리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7
김동리 지음, 이동하 책임 편집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화랑의 후예>)의 인물들을 황진사, 나(화자), 숙부, 숙모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들은 독자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기는 인물들이다. 나는 진보성 차원에서 이들을 구분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이 소설의 주제의식과 관련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화자의 시선과 위치를 가늠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황진사는 주인공이기에 묘사가 가장 집중된 인물이다. 그는 네 인물 가운데 단연 보수적인 사람이다. 보수성은 그를 사회 부적응자로 만들어간다. 말의 본래 뜻에서 그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가 이미 그 효용이 지나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지내는 공간은 어둡고 으슥한 곳이다. 여관, 거리(가짜 약을 파는 곳이기에 으슥한 곳이라 할 수 있다), 파출소를 전전하며 산다. 그가 소지하는 물건들은 별 소용이 없는 것들이다. <주역(周易)>, 가짜 약 등으로 그는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지만, 사실 이 물건들은 누구도 반기지 않는다.

  ‘나’(화자)는 젊은 지식인이다. 황진사가 한시(漢詩)를 지어달라고 부탁하는 걸 보면 전통 학문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다. 오전부터 등산을 하고, 시골 절간으로 피서 계획을 짜는 걸 보면 직업은 없는 듯 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젊은이가 하릴없이 지내는 것을 보면 화자 역시 황진사처럼 부적응의 모습을 보인다 할 수 있다. 
  
  숙부는 광산 경영인이다. 그는 상당한 재력을 갖춘 인물이며 사회의 이모저모에 큰 관심을 쏟고 있다. “조선의 심볼” 운운하며 주변부 사람들의 행태를 살피며 그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그의 사회에 관한 깊은 관심의 일면을 보여준다. 작가는 서두에서 사회를 등지고 산을 향하려는 화자와 여관을 찾는 숙부를 대조적 위치에 두고 있다. 숙부의 피검(被檢)은 그가 어떤 인물인지 더 잘 보여준다. 그는 독립운동의 한 축이 되었던 대종교 단체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아무래도 운동 자금을 대준 듯 하다. 숙부는 진보적이다. 그는 네 인물 가운데서 가장 올바른 역사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가장 활동력 있는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사회 정의 차원에서 옳은 일을 신념을 지니며 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숙부와 황진사는 퍽 대조적이다. 두 사람 다 신념이 투철한 인물들이나 한 쪽은 사회와 미래를 다른 한 쪽은 자신과 과거를 신념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숙모는 주부인 듯 한데 황진사 중매와 관련해 잠깐 모습을 보인다. 숙모는 현실적인 사람이다. 황진사가 열아홉살 규수와의 혼인을 원하자 “좀 나이 짐짓해두 넉넉할 걸 뭐.”라며 나무라는 기색을 보인다. 홀아비는 과부와 어울린다는 생각은 처녀와의 결혼만을 원하는 남자들의 전통적 가치관을 비판하는 의식이다. 
  
  화자는 황진사와 숙부, 숙모 중간에 위치한다. 그의 성향을 이른바 중도로 이해한다면 소설은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당대를 살아간 인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화랑의 후예>의 화자는 황진사의 처지를 알아갈수록 그에게 큰 연민을 갖게 된다. 화자는 황진사를 도울 수 있는 처지에 있다. 그는 빼앗기다시피 돈을 건네기도 하며 황진사의 소식을 궁금해한다.

   그런데 나는 화자의 시선이 지나치게 황진사를 감싸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는 내가 그 동안 김동리(金東里)의 소설을 읽어가며 생각했던 바와도 연결이 된다. 1939년 작품으로 <황토기(黃土記)>가 있다. 그 시간대를 알 수 없는 신화적 공간에서 억쇠와 득보라는 두 장사(壯士)의 삶을 다루는 소설인데 두 사람 역시 사회 부적응의 모습을 보인다. 장사이나 근대적 공간 속에서는 이들의 힘이 아무 소용이 없듯 황진사 역시 그의 출신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무녀도(巫女圖)>(1936), <역마(驛馬)>(1948), <등신불(等身佛)>(1961)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등단작이 되는 <화랑의 후예>의 세계관이 변함없이 유지되는 것이다. 
 

 

            김동리(1913-1995)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동리 2013-10-23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김동리 선생님의 작품에 관심이 있으신 것 같아 좋은 공연 알려드리고 가요.
김동리 탄생 100주년 기념 뮤지컬 <무녀도동리>입니다.
경주 發 공연인 뮤지컬<무녀도동리>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극장용에서 공연 중입니다.
김선경, 노현희, 김수용, 홍희원, 문가영 등 휼륭한 배우들이 출연하며
10.11.~11.3.까지 공연됩니다.
김동리의 소설<무녀도>는 노벨문학상 후보에까지 올랐고 고등교과서에도 수록되어있는 작품입니다.
이런 훌륭한 작품을 처음 뮤지컬로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훌륭한 작품에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저작들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양억관 옮김 / 한길사 / 2002년 9월
평점 :
품절


  오스트리아 출신의 예술사가 아르놀트 하우저의 영화 이야기를 들어보자. 영화는 '협동작업에 의한 예술활동'이다.(<문학과 예술의 사회사4>, 창작과비평사, 1999, 310면.) 여타의 예술 장르, 예컨대 시나 소설 등은 개인적인 고투에 의해 창작이 이루어지지만 영화는 작가, 감독, 각색가, 카메라맨, 미술감독, 각종 기술자 등의 공동작업에 의해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 영화를 이야기할 때 관중을 빼놓을 수 없다. 영화는 유럽의 근대 문명이 그 개인주의적 도정에 오른 이래 불특정의 집단적 군중으로서의 관중을 위해 예술을 생산하려한 최초의 기도이다.(같은 책, 314면.) 종합하자면 창작 주체 안에서의 호환(互換), 창작 주체와 관중간의 호환을 통해 영화는 예술의 민주화에 기여한 것이다.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는 내겐 새로움의 연속이었다. 그의 인생이 시작된 영화관에서 본 영화들을 기실 난 잘 모른다. 그저 제목만, 그저 배우 이름만 얼핏 들었을 뿐이다. 딴에는 영화를 꽤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하지만 자괴감을 뒤로하고, 책을 읽어가다 보면 이름만 그저 알았던 그들이 대화를 건네 와 즐겁다. 전혀 면식도 없던 그들이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친절한 소개로 금새 친해진 듯 싶다. 

  사실 난 외국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반감 때문일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있자면 '인생이 저런 건 아닐텐데'란 씁쓸한 생각이 자꾸 든다. 앞서 아르놀트 하우저를 인용했지만 영화가 수많은 사람들의 공동 작업에 의해 만들어지듯이 영화란 당대인들의 삶을 충실히 그려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있자면 지금의 내 삶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어 비감이 든다. 그리고 난 좋은 영화란 관중을 괴롭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냥 재미있게만 한다거나, 헛웃음만 짓게 하는 영화는 좋은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물들에게 감정이입함으로써 인생의 아픔에 함께 괴로워하는 영화가 좋은 영화일 테다. 
 

  서양 영화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게 몇 있다. 제라르 드파르디외의 <아스테릭스>,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 독일 작가 막스 프리쉬 원작의 <사랑과 슬픔의 여로>(원제: Homer Faber)등이 여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특히 로베르토 베니니의 의뭉스런 표정과 몸짓, 줄리 델피의 귀여운 모습은 기억에서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시오노 나나미는 이 책에서 대부분 할리우드 영화만 이야기한다. 나는 이 책을 읽어가며 적어도 시오노 나나미가 젊은 시절을 함께 한 영화는 지금 내가 보는 할리우드 영화와는 많이 다르단 걸 알게 됐다. 그리고 아울러 내게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편견이라 이름할 것도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 책을 읽어가며 영화를 통해 인생을 배워갔던 시오노 나나미가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 같은 사람은 '영화 세대'는 아니다. 요즘은 영화를 보러 구태여 영화관을 찾을 필요가 없다. 집에서도 PC 앞에 앉아 얼마든지 편하게 영화를 본다. 좋아하던 배우가 나오는 신작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 앞에서 줄서고 있는 시오노 나나미의 모습이 상상된다.   

  이 책을 덮고 나니 꼭 봐야 할 영화 목록이 수두룩히 쌓였다. 이젠 구하기도 쉽지 않을 영화들일텐데. 한 편, 한 편 영화를 보고 나서 그의 글을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지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