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인> / 최인훈 / 문학과지성사 / 2008

 

회색의 영혼, 사랑과 시간의 이중주

 

나의 싸움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 꺼지라구!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내가 좋아하는 신현림의 이 시가 떠올랐다. 관념적인 것도 그렇고 또 사랑을 강조한다는 것, 그리고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라는 화자의 토로가 독고준의 그것과 많이 닮아있기 때문이다. 독고준은 말한다. “젊은 사람이 할 만한 일이라면 사랑과 혁명일 것이다.” 하지만 혁명을 하기에는 마음은 높고 현실은 낮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사랑과 시간’이다. 역사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시간이다. 시간은 역사의 한 요소이자 지배자이기도 하다. 이 시간 앞에 역사는 언젠가 무릎 꿇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를 지배하고 이루는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사랑이다. 신현림의 시에서 수많은 시간을 들여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과 싸워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듯이 독고준도 사랑으로 채워진 시간을 통해 역사를 움직이려 한다. 이제 독고준과 함께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이 소설은 최인훈의 여타의 소설들이 그렇듯이 소설 속에 별다른 사건을 갖지 못하고 있다. 소설의 처음과 끝이 김학이 독고준의 하숙방을 찾는 것을 일치하는 것을 보면 인물들의 외적 변동이 거의 없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회색인>의 연작소설이라 할 수 있는 <서유기>에서 더욱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소설의 서두는 독고준이 이유정의 방에서 나오는 것으로 시작되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몇 분 남짓한 시간 동안에 자신의 뇌리를 스쳐갔던 단상들로 한 권의 소설을 끝마치고 있다.  

  독고준은 이북이 고향인 평범한 문학도이다. 그에게는 김학이라는 정치학도 친구가 있는데 김학의 권유로 정치학과 학술 동아리인 ‘갇힌 세대’에 들게 된다. 무엇이 이들 자신을 ‘갇힌 세대’로 생각하게끔 했을까? 이들의 불만은 정치학도들답게 정치적이다. “자유의 역사에는 끈적끈적한 피가 엉겨붙어 있어. 우리들의 경우는 피 대신에 막걸 리가 흐르고 인간의 모가지 대신에 고무신이 굴러가고 있어” ‘갇힌 세대’의 일원인 김정도의 말이다. 서양의 역사와 비교하여 우리의 정치 현실을 꼬집는 말이다. 서양의 민주주의는 특권을 유지하려는 계급과 그것을 거부하는 계급 사이의 처절한 싸움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서양인들에게 있어 그것은 그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이다. 왜냐하면 다름아닌 그들의 피를 주고 샀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는 서구로부터 민주주의를 이식받았다. 때문에 막걸리 한 잔과 고무신 한 짝에 표를 파는 것이다. 서구인들에게 있어 피, 그리고 자신의 모가지와 같은 표가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막걸린 한 잔과 고무신 한 짝보다 못한 것이다. 결국 우리의 현실은 우리의 힘이 아닌 남의 힘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비극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에 ‘갇힌 세대’의 동인들은 각각 처방안을 내놓는다. 그 중 김학의 의견은 주목할 만하다. 학은 젊은이답게 혁명만이 우리에게 유토피아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급진적인 학의 의견에 준은 다소 끌리기도 하지만 그는 다른 방법을 선택한다. 그것이 바로 ‘사랑과 시간’이다. “애써도 추켜세울 수 없는 이 허물어진 마음. 회색의 의자에 깊숙이 파 묻혀서 몽롱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만 하자는 이 몸가짐.” 준은 이렇게 회색의 의자에 앉아 사랑을 하고자 하고 또 시간을 보내고 있다. 관조라는 말이 여기에 꼭 어울릴 것 같다. 

  최인훈이 만들어 낸 인물들의 관조적 태도는 다른 소설들에서도 자주 보인다. <GREY 구락부 전말기>에서 M이라 불리는 창백한 청년은 “우리는 잿빛을 사랑하는 자로 나섭니다. 어찌하여 속물들은 ‘치기’를 그리도 두려워 합니까? 우리는 분명한 마음으로 외칩니다. 우리는 움직임을 마다한다고. 잿빛의 저녁놀 속에서만 슬기의 새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눈을 뜹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서양의 중세에 있어서 회색은 독특한 의미를 지닌다. 회색의 회한의 잿빛이요 고뇌의 조짐, 미덕과 악덕, 환희와 고통의 혼인으로 신이 타기하는 어중간한 위인을 비추는 거울이다. 이전에 신이 타기하던 이들을 지금에서도 우리는 몰아내야 하는 것일까? 독고준의 태도는 허무주의 혹은 순응주의로 생각되기 쉽다. 하지만 독고준의 깊은 곳을 눈을 더 크게 뜨고 바라보면 결코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독고주의 시간들이 사랑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준은 작품 속에서 자주 자신의 고향인 W시를 떠올린다. 그 곳에는 가족, 오월의 사과꽃 그리고 가을의 코스모스 등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서 느꼈던 소년 독고준의 행복도 깨지고 만다. 그것은 존재의 자각 때문이었다. 자신은 분명 그대로인데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예전과는 달리 대한다. 선생님과 친구들은 더 이상 그를 따뜻하게 대하지 않는다. 준은 변해가는 주위의 시선(사회)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일탈의 두려움에 다시 그곳에 속하려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준은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된다. 귀를 찢는 듯한 제트기의 공습을 피하려 들어간 방공호 속에서 한 여인이 그를 뜨겁게 포옹한다. 소년 독고준은 놀라 숨을 헐떡이지만 이후 그에게 있어 그녀는 커다란 의미가 되어버린다. 준에게 있어 이 경험은 사랑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깨달아가는 시린 아픔 중에서 이 여인을 만나고 뭔가 알지 못한 따뜻한 느낌을 갖는다. 그것은 훗날 그가 청년 시절 여성들로부터 그토록 얻기를 원했던 바로 그 ‘사랑’이다. C.G.융이 말하는 ‘아니마’가 독고준의 경험 속에서 엿보인다. 독고준은 아니마를 찾기 위해 방황한다. “그녀의 얼굴이 겹쳤던 방공호 속의 여자의 얼굴. 폭음. 살 냄새. 여름날의 햇빛. 밤나무숲에서 멀리 도시를 바라보던 소년의 설렘.” 준은 김순임으로부터 방공호 속 여자의 환영을 발견한다. 하지만 김순임도 어디까지나 방공호 속 여자의 환영일 뿐이다. 이후 그는 사랑의 원형을 찾기 위해 이유정에게 구애하기도 하고, 자신의 시간의 원형이기조차 한 부친의 고향에 찾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김순임에게서도 그랬듯이 그들은 어디까지나 환영이고 흔적일 뿐이다. 독고준은 사랑을 다시 얻기 위해 경주, 또 경주하지만 그것은 모습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독고준의 사랑을 얻기 위한 시간들은 이미 그것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황선생이 말하는 불교의 실천적이고도 구체적인 사랑이 독고준의 시간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영혼을 구하지 못하면 천하를 얻은들 무슨 소용이랴?” 이 독고준의 아포리즘에서 나는 그의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을 확인하고, 또 기대한다.

  최인훈은 얼마 전 정년퇴임을 기념하는 고별 강연회에서 독특한 예술론을 펼쳤다. “예술은 때로는 엄숙하게 폼 재고 종교의 모자를 엉터리로 갖다 쓰기도 하지만, 예술은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돌격 5분 전에 휴식을 취하면서 부르는 노래, 그 때 피우는 담배 한 개비 같은 것이다.” 생의 한 순간까지도 치열하게 사랑하는 것은 이 때의 노래의 재미, 그리고 담배의 맛과 같은 것이 아닐까? 독고준의 치열함을 더욱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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