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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이 시작됐다 ㅣ 창비청소년문학 28
최인석 지음 / 창비 / 2010년 3월
평점 :
소설은 현실을 뒤쫓을 따름이다. 최인석의 장편소설 <약탈이 시작됐다>를 보며 새삼스런 생각을 했다. <약탈이 시작됐다>는 창비청소년문학 시리즈로 출간된 소설이다. '작가의 말'에서 최인석은 "내 안에는 아직 그 작고 외로운 소년이 있다. 이 작은 책은 내 안의 그 작은 소년이 쓴 소설이다."라 말하며 청소년과의 회통을 강조한다. 문제는 소설의 소재인데 청소년문학이라 일컫기엔 꽤 문제적이다. 소설의 가장 큰 흐름은 사랑이다. 그런데 이 사랑의 모습이 문제적이다. 주인공인 고등학생 성준은 친구의 어머니를 사랑한다. 그의 소꿉친구인 여학생 윤지는 담임교사 봉석을 사랑한다. 어머니와 교사 역시 이들을 사랑한다.
교사와 제자간의 성관계가 심심치 않게 보도된다. 유부녀인 여교사가 남학생과 관계를 갖고, 미혼의 남교사가 여제자와 관계를 갖기도 한다. 최인석 역시 금기의 사랑을 다루지만 이런 현실의 모습과는 썩 다르다. 우선 등장 인물들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네 사람 모두 일종의 경계인이다. 고등학생 성준과 윤지는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학교와 가정을 뛰쳐나가려 하나 쉽지 않다. 담임교사 봉석 역시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다. 시인인 그는 언제든 학교를 뛰쳐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 성준의 친구인 용태의 어머니 금순은 술집을 전전하는 삶을 산다. 친자식이 아니지만 용태를 아끼는 그이지만 용태는 가출을 한다. 금순이 술집을 한다는 이유에서다.
이들의 사랑은 물론 이루어지지 않는다. 최인석은 꽤 오랜 시간 소외 받는 자들의 사랑을 그려왔다. 2002년 발표한 중편 <서커스 서커스>에서 그는 우화를 빌려 와 '우렁이들의 사랑'을 말한다. 우렁이는 소외 받는 이들의 한 비유이다. 소설 속 우렁이의 역할을 했던 승호와 상준은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비참한 사랑의 결말에도 불구하고 우화 속 우렁 각시는 말한다. "사랑이 장꾼을 만들고 나를 만들었으며, 우렁이들의 사랑이 이 세상을 만들었다." 사랑이 우렁이 각시를 사람으로 만들 듯이, 사랑만이 존재의 근본 변화를 가져다 준다. 그리고 버림 받은 존재들간의 사랑만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다.
버림 받은 자들의 사랑을 말함은 최인석 특유의 것이지만, 이 소설에서 이채로웠던 건 '종각'이란 장소이다. 종각은 무법천지이다. 약탈이 수시로 이루어지며,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약탈에 가담한다. 학교에서 근엄한 척 하던 교장선생은 물론, 늘상 문제아라 불리는 학생들까지 이 장소에선 약탈자로 함께 한다. 이 장소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앞서 소설 속 인물들을 경계인이라 말했는데, 이 장소 역시 경계라 말하면 어떨까? 중심과 주변을 가르는 경계는 혼돈의 장소이다. 혼돈 속에선 축제 혹은 혁명이 매일 같이 일어난다. 여기서 바흐친의 생각은 썩 시사적이다. <소설 속의 시간과 크로노토프의 형식>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 인물-악한, 광대, 바보-은 이 세계 속에서 ‘타자’가 될 권리, 즉 현존하는 인생의 범주들 중 어느 하나와도 협력하지 않을 권리를 지닌다.” 경계라는 공간 속에서만 이 세 인물의 활동이 자유롭다. 소설 속 '종각'을 경계로 봐도 무방할 듯 하다.
작가가 '종각'이란 경계 공간을 좀 더 힘주어 밀고 갔으면 어땠을까 싶다. 이 공간이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경계는 중심과 주변 가운데 어느 쪽의 힘이 더 센지 겨루는 장소일텐데, 작가가 소설을 통해 이를 어떻게 보여줄 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