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하느님 - 권정생 산문집, 개정증보판
권정생 지음 / 녹색평론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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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언장이란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한다는 게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나 보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저기 뿌려주기 바란다.   

  유언장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추고 횡설수설했지만 이건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세 때 22세나 23세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2005년 5월 1일 쓴 사람 권정생

 
   

   권정생 선생의 유언을 처음 접한 건 한 일간지를 통해서였다. 선생의 1주기를 맞아 출간된 책들을 소개하며 유언장의 일부를 공개했는데 그 글자들을 난 눈물바람으로 맞았다. 다시 유언장을 대해도 역시 눈물바람이다. 2007년 선생의 부고를 접하고 부랴부랴 <우리들의 하느님>을 찾아 들었다. 당시 책은 초판본이었는데, 이번엔 개정증보판을 읽는다. 개정판엔 비록 선생의 글은 아니지만 의미 있는 글이 세 편 추가돼 있다.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의 책 소갯글과 선생의 지인인 김용락 시인과 고교 교사 이계삼씨의 추모글이 실려있다. 세 편 모두 선생의 삶과 사상을 잘 담고 있다. 

  선생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난 그 분의 이름 속에 한 방법이 있다고 본다. 정생(正生), 바른 삶이다. 이토록 바르게 살아간 삶이 몇이나 더 있을까? 그의 삶을 바로 세운 힘은 무얼까? 선생의 삶을 여러 존재가 지나갔을테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이는 예수일테다. 그의 일생을 지배한 육신과 마음의 고통은 그를 예수에게로 인도했고, 그 자신 예수의 삶을 살게된다. 헨리 나웬의 말처럼 예수가 '상처입은 치유자'라면, 권정생 역시 일평생 얻은 상처와 고통으로 인해 치유자가 될 수 있었다.

  선생이 지상에 남긴 마지막 글이다. 삶이 끝나가는 순간까지 아름다운 세상을 말하는 그였고, 제발 사람이 사람을 죽이지 말기를 당부한 그이였다. 

   
    정호경 신부님. 마지막 글입니다. 제가 숨이 지거든 각각 적어놓은 대로 부탁 드립니다. ...... 3월 12일부터 갑자기 콩팥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뭉툭한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계속되었습니다. 지난달에도 가끔 피고름이 쏟아지고 늘 고통스러웠지만 이번에는 아주 다릅니다. 1초도 참기 힘들어 끝이 났으면 싶은데 그것도 마음대로 안됩니다.  하느님께 기도해 주세요. 제발 이 세상,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없게 해 달라고요. 

  제 예금통장 다 정리되면 나머지는 북측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보내 주세요.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 주십시오.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티벳 아이들은 앞으로 어떻게 하지요. 기도 많이 해주세요. 안녕히 계십시오. 권정생

 
   

  

                  권정생(1937-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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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0-11-21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덕분에 일요일 아침부터 살짝 눈물바람이어요.

(아까 쓴 댓글 다시)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아이구 ^-^;; 귀여운 권정생 선생님.

파고세운닥나무 2010-11-21 10:47   좋아요 0 | URL
번거롭게 해 드렸네요^^;
선생은 끝내 유머와 귀여움을 잃지 않으셨네요. 근데 그 유머와 귀여움이 눈물을 자아냅니다. 슬프게도 말이죠.

다이조부 2010-11-22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권정생 쌤 책을 읽어본게 없네요.

읽으면 무척 좋을것 같은 예감이 ^^


파고세운닥나무 2010-11-22 11:21   좋아요 0 | URL
누가 그러더군요. 권정생 선생은 기독교 급진주의자라구요. 타당한 면이 있는 게 선생은 교회를 통해 예수님을 배우지 않았으니까요. 예수님도 "여러분의 말은 다만 '예'는 '예'라 하고, '아니요'는 '아니요'라 하십시오. 그 이상의 말은 악한 자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옳고 그름에 있어 단순하고 진실함을 말씀하십니다. 크리스천들이 많이 잃어버린 모습이구요.
권정생 선생의 산문집으로는 <우리들의 하느님>이 유일합니다. 동화나 소설 읽기가 저어하시면 이 책이 좋을 듯 합니다. 저도 그랬구요^^

반딧불이 2010-11-22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분의 글을 편편으로만 접하고 책 한권 갖지 못하고 있어요. 날잡아 읽으며 이 리뷰를 기억할 날이 곧 오겠지요.

파고세운닥나무 2010-11-22 14:26   좋아요 0 | URL
우리 곁에 '귀여운' 성자로 살다간 선생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중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에 <강아지똥>이 실려 있더군요. 몇 년 전이니 지금의 교과서 체계로 바뀌기 전일 거에요. 부고를 듣고 얼마 안되어서였는데, 그 글을 읽을 때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요......

2010-11-23 2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4 0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