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이 오면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가르침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전하의 성품은 덕의 원리에 따라 고양될 것이며, 어둡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질서를 바로잡는 가장 숭고한 본보기가 되실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전하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위대한 행복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지금 국민들은 왕권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복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위와 같이 하신다면 국민들은 전하의 정의와 사랑에 감동해,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쁨으로써 전하를 아버지처럼 우러르게 될 것입니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Ⅲ』, <디온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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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 동안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국제 행사'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문대통령의 '국빈 방중 외교'가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는 우리대로 '사드 갈등'이 어떻게 풀릴까가 몹시 궁금했고, 중국은 중국대로 '한국의 간청으로 맞게 된 국빈을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를 두고 모두가 흥미롭게 지켜봤을 터이다. 미국은 미국대로 '북한 핵문제'에 대해 한국과 중국이 어떤 식으로 '박자를 맞출 것인지'를 유심히 지켜봤을 테고, 일본은 일본대로 '남·북·미·중·일'이 서로 복잡한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북한 핵문제'를 둘러싸고 두 나라 정상이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을 터이다. 또한 북한은 '사드 배치의 근본 원인을 제공한 국가'로서뿐만 아니라 어느새 전세계가 가장 두려워하는 '핵무장 완성을 코앞에 둔 국가'의 입장에서 두 이웃 나라인 중국과 한국이 갖는 '정상 회담'을 유심히 지켜봤을 터이다. 어쨌든 자신들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가 베이징에서 다뤄질 게 분명했으니까.
이토록 정치경제적으로 몹시 복잡다단한 '한국 대통령의 국빈 방중'은 일반적인 예상보다는 훨씬 더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야당 대표는 엉뚱하게도 대톨령과는 정반대쪽으로 움직이면서 '걸레같은 말솜씨'를 더한층 빛냈고, 또다른 야당 정치인들은 연일 '혼밥 외교, 무능 외교, 굴욕 외교, 외교 참사' 등의 격한 용어들을 동원해서 '대통령의 방중 성과'를 깎아내리기 바빴으니까.
여기에 더해 결정적으로 '이상한 사건'이 아무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터져 나왔다. 정상 회담을 불과 몇 시간 앞두고 '있을 수 없는 폭행 사건'이 터진 것이다. 중국 공안들이 국빈 방중 수행 기자단에 포함된 사진 기자를 한쪽 구석으로 마구 끌고 가서 다짜고짜로 '집단 구타'를 벌인 것이다. 이 예기치 못한 사건은 그저 단순히 '국빈 방중 성과'를 크게 흐트린 데서 그치지 않았다.
가뜩이나 이번 '국빈 방문 일정' 동안 한국의 대통령에 대해 고의적으로 '홀대'하는 듯한 인상마저 받았던 일부 사람들은 '수행 기자단 폭행 사건'까지 더해지자 마침내 참다 못해 크게 '분통'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기사를 다른 측면에서 바라본 또다른 사람들이 앞다퉈 달았던 '댓글 내용'이 또다른 문제를 파생시켰다. 기레기들이 평소에 하는 짓으로 봐서 '맞아도 싸다'는 댓글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댓글을 보고 얼른 한 술 더 뜨는 식으로 성급하게 반응했던 전직 청와대 관계자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물론 '사리'를 조목조목 따진 끝에 그런 댓글 내용을 개탄하는 분위기도 당연히 나타났고, 심지어는 그런 '뜻밖의 반응'을 도리어 반기며 마음껏 조롱하듯이 역이용하는 중국 언론들의 치졸함까지도 국내에 전해졌다.
방중 일정이 마무리된 지 벌써 사나흘이나 지났지만 '방중 성과'를 둘러싼 갑론을박은 아직도 그칠 줄 모르고 진행중인 듯하다. 이번 방중 기간 동안에 문대통령이 가장 자주 동원했던 사자성어가 바로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었지만, 첨예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정치판에서는 그런 고상한 용어까지 끼어들 틈은 없는 듯하다.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기는커녕 최대한으로 상대방의 취약한 부분이나 아픈 곳을 들춰내고 들쑤시는게 그들의 전략이니까.
이런 기사들을 읽는 동안에 내가 가장 유심히 지켜봤던 '관전 포인트' 가운데 하나는 결국 '해석의 차이'에 관한 문제였다. 서로의 입장 차이에 따라 똑같은 사안을 두고도 어쩌면 이토록 서로 극명하게 엇갈리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국빈 방중이라는 외교 행사 하나를 두고 이번만큼 사사건건 서로 다른 평가를 내린 적이 언제 또 있었던가 싶었다.
그런데 정작 이 모든 문제들의 원인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혼밥이니 홀대니 굴욕이니 저자세니 하는 기분나쁜 말들이나, 이번 방중의 외교적 성과가 성공이냐 실패냐를 두고 첨예하게 다투게 된 근원적인 이유는 결국 '중국' 또는 '북한'에게 있다는 점이 너무 간과된 게 아닌가.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개발에 그토록 열을 올리지 않았던들, 혹은 북한 미사일에 대한 방어 무기로 배치한 사드를 두고 중국이 온갖 트집을 다 부린 끝에 무리한 경제 보복까지 감행하는 악수를 두지 않았더라면 이런 문제가 아예 일어날 리도 없었을 게 아닌가.
결국은 이 모든 어이없는 상황들과 방중 외교에 대한 극명하게 엇갈린 평가들은 모두 북한과 중국의 행위 때문에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겪는 곤욕이 아닐까 싶었다. 그들의 행위는 왜 그토록 많은 문제를 파생시키는 걸까. 결론은 뜻밖에도 아주 간단했다. 그들이 불의한 국가이기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중국이 우리에게 치졸하게 저지른 '사드 보복'이야말로 '불의'의 전형이었다. 생존이 걸린 안보상의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배치한 '방어용 무기'를 두고 중국은 온갖 구차한 이유를 내세워 끊임없이 이웃 나라를 핍박하고 길들이려고 생트집을 부려왔다. 아직까지도 '사드의 적절한 처리'를 '양국 관계 정상화'의 전제 조건으로 계속 내세우고 있다. 이토록 불의한 나라가 어느새 G2에 오른 중국이라는 국가라니. 이런 수준의 나라가 과연 수십 년 후에 '세계일등국가'라는 지위에 오를 수 있을까. 언론의 자유나 민주정치와는 아예 담을 쌓고 지내는 일인 독재 체제에 가까운 공산당 지배국가가 과연 그런 위치에 오를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정의롭지 못한 국가가 겪을 수밖에 없는 본질적인 어려움을 일찌감치 간파했던 플라톤이 『국가』에서 핵심적으로 다룬 주제가 바로 '정의와 불의'였다. 굳이 플라톤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중국인들은 이미 자국어로 쓰인 훌륭한 고전들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왜 그들은 아직까지도 '불의'를 저토록 태연히 저지르고 있을까? 까마득한 옛날에 우리 선조들로부터 자주 들었던 '오랑캐 습성'이 아직까지도 몸 속에 남아 있는 탓일까. 플라톤의 『국가』에 담긴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읽으면서 '오늘날의 중국'과 '오랑캐'와 '야만'을 떠올리지 않기란 너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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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의와 불의의 관계를 차례차례 논의할 수 있도록 나(소크라테스)는 잠시 전과 같은 질문을 하겠네. 우리는 불의가 정의보다 더 효과적이고 더 강하다고 주장했네.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합의한 바에 따라" 하고 내가 말했네. "정의가 진실로 지혜이자 미덕이라면, 정의가 불의보다 더 강하다는 것도 쉽게 밝혀지리라고 나는 생각하네. 불의는 무지이니까.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걸세. 그러나 트라쉬마코스, 나는 이 문제를 그렇게 단순하게 논의할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고찰하고 싶네. 자네는 불의한 방법으로 다른 국가들을 종속시키려 하고, 수많은 국가들을 종속시킨 다음에는 이들 국가를 속국으로 삼을 만큼 불의한 국가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할 텐가?"
"왜 안 그렇겠어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리고 완벽하게 불의해서 가장 효과적인 국가일수록 그렇게 할 가능성이 가장 높지요."
"알겠네" 하고 내가 말했네. "그게 자네 주장이었구먼. 그러나 내가 고찰하려는 바는, 다른 국가보다 더 강해진 국가는 정의 없이도 그런 힘을 유지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러기 위해서는 정의가 필요한가 하는 점일세."
"만약 그대가 방금 말했듯이" 하고 그가 말했네. "정의가 지혜라면 정의가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내 말이 옳다면 불의가 필요하겠지요."
그래서 내가 말했네. "트라쉬마코스, 나는 자네가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젓지 않고 아주 훌륭한 대답을 해주어 기쁘네."
"그대를 기쁘게 해주려고 그러는 것이라오." 하고 그가 말했네.
"고맙네. 한 번 더 호의를 베풀어 말해주게. 도시든 군대든 강도단이든 도둑 떼든 다른 집단이든 공동으로 뭔가 불의한 짓을 모의한다고 가정해보게. 자네는 만약 그들이 서로에게 불의한 짓을 한다면 뭔가를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요" 하고 그가 대답했네.
"만약 그들이 서로에게 불의한 짓을 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더 잘 해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이지요."
"트라쉬마코스, 그것은 정의는 화합과 우애를 낳지만, 불의는 그들 사이에 반목과 증오와 다툼을 낳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고 쳐요." 하고 그가 말했네. "나는 그대와 다투고 싶지 않으니까요."
"여보게, 고맙네. 그러나 이 점도 말해주게. 어디에 나타나든 증오를 낳는 것이 불의의 기능이라면, 불의가 자유민이나 노예들 사이에서 발생하면 그들이 서로 미워하고 다투게 만들어 도저히 협력할 수 없게 하지 않을까?"
"당연히 그렇겠지요."
"불의가 두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면 어떨까? 그들은 서로 다투고 서로 미워하여 저들끼리도, 올바른 사람과도 원수가 되지 않을까?"
"그렇게 되겠지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런데 여보게, 불의가 한 사람 안에서 발생한다면 어떨까? 불의는 그 힘을 잃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겠지?"
"그대로 유지한다고 쳐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러니까 불의는 분명 두 가지 힘을 지니고 있네. 불의가 발생한 곳이 도시든 부족이든 군대든 다른 어떤 단체든, 불의는 첫째, 그 단체가 내분과 다툼에 휘말려 서로 협력할 수 없게 만드네. 둘째, 불의는 그 단체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올바른 것을 포함하여 자신과 반대되는 모든 것과 원수가 되게 만드네. 그렇지 않은가?"
"물론이지요."
"그리고 불의는 개인 안에 깃들어도 그것이 본성상 하게 되어 있는 기능을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말하자면 불의는 첫째, 개인이 자신과 반목하고 불화하게 함으로써 행동할 수 없게 할 것이고, 둘째, 불의는 개인이 자신뿐만 아니라 올바른 사람들과도 원수가 되게 만들 걸세. 그렇지 않은가?"
"그래요."
"여보게, 신들도 올바르겠지?"
"그렇다고 쳐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트라쉬마코스, 불의한 자는 신들의 원수이고, 올바른 사람은 신들의 친구일세."
"마음 놓고 그대의 논의를 즐기시죠. 나는 여기 이 사람들의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 그대의 주장을 반박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래서 내가 말했네. "자, 자네가 진심으로 나를 즐겁게 해줄 요량이라면 남은 문제에도 지금까지처럼 대답해주게. 올바른 자는 분명 더 현명하고 더 훌륭하며 더 유능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지만, 불의한 자는 어느 누구와도 협력할 수 없네. 우리가 불의한 자들이 효과적으로 협력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주장이네. 불의한 자들이 전적으로 불의하다면 서로 공격했을 테니 말일세. 그러니 불의한 자들 안에 약간의 정의가 깃들어 있어 그들이 자기들끼리 그리고 적대자들에게 불의한 짓을 하는 것을 막았으며, 그러한 정의에 힘입어 그들이 그나마 성공할 수 있었음이 분명하네. 불의한 짓을 시작했을 때 그들은 불의에 의해 반쯤 타락했던 것이지. 완전히 불의한 완전한 악당은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 없을 테니까."(76∼80쪽)
- 플라톤, 『국가』, <제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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