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거대한 작품 속에서 만은 20세기의 사상을 주름잡아 온 십여 가지의 주제와 문제들, 가령 정신분석과 영성주의, 예술, 질병, 죽음을 서로 연결시키는 연결고리, 아인슈타인이 말한 시간의 상대적 속성, 서구인 특히 중산층 서구인들의 정신 상태, 예술가와 사회의 관계, 제대로 된 인간 교육 등을 폭넓게 다룬다. 만의 특별한 재능은 이런 수준 높은 사상, 등장인물들의 창조, 소설 속 분위기의 설정을 잘 종합한다는 것이다.

 - 클리프턴 패디먼

 

 * * *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을 오르는 중이다. 풍문에 듣기론 이 '산'이 완등하기가 제법 험난하다고 들었는데 예상과 달리 아직까진 별로 힘겹지 않다. 총 7장으로 구성된 소설인데 어느새 4장까지 읽었다. 그런데 상,하권으로 나눠진 소설이 총 1,431쪽(상권 660쪽, 하권 771쪽)인데, 알고 보면 제4장까지는 고작 352쪽에 불과하다. 남은 3장이 장장 1,079쪽에 펼쳐져 있는 셈이다. 해발 1,431미터 높이의 산을 오르는데 겨우 352미터까지 오른 셈이라고나 할까.

 

(1993년에 나온『학원세계문학전집 22_마의 산』에 실린 사진)

 

그런데 산을 오르다 보면 산행을 시작할 무렵의 몇십 분 정도가 특히 힘들다. 하지만 육체가 산에 어느 정도 적응을 마치게 되면 한결 마음이 가볍고 산을 오르는 즐거움을 짜릿하게 맛보는 순간도 찾아오기 마련이다. 나로선 딱 그런 기분을 느끼는 지점에 온 듯하다. 소위 '호흡이 터질 때'를 지금 막 지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율유세계문학전집> 1, 2권으로 나온 『마의 산』은 판형 때문에 페이지수가 늘어난 측면도 있는 듯하다.)

 

소설 『마의 산』의 공간적 배경은 스위스의 산중턱에 있는 베르크호프 요양원인데, 소설 속에서도 주인공인 한스 카스토르프가 해발 1,600미터쯤에 자리잡은 이 곳 요양원 생활에 '적응'하는 문제를 자주 다룬다. '저 아래'에서의 '수평 생활'과 요양원 생활은 여러모로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을 읽는 독자가 『마의 산』의 독특한 분위기에 '적응'하는 일은 독자가 카스토르프에 감정이입할 수 있는 '하나의 통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호흡이 터지는 듯한 기분'을 느낀 결정적인 이유를 들자면 그건 이미 어디선가 만난 듯한 '익숙한 문장'을 이 소설 속에서 벌써 세 번씩이나 만났기 때문이다. 높은 산을 오를 때나 먼 길을 처음으로 찾아갈 때나 혹은 처음으로 대하는 작품을 읽을 때나 사정은 다 매한가지가 아닐까. 내가 이미 알고 있던 '친숙한 무엇'과 만난다는 게 그만큼 '낯설고 힘든 여정'을 한결 가뿐하게 만들어 준다는 점 말이다.

 

『마의 산』에서 내가 처음으로 마주친 '반가운 문장'은 '시간의 흐름'에 관한 문제를 다룬 길다란 대목이었다. 거기서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로 만난 '익숙한 표현'은 '연애의 형이상학'을 다룬 대목에서 발견했다. 그런데 이 둘 모두는 공교롭게도 쇼펜하우어를 읽을 때 만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 번째로 만난 글귀는 '죽음'에 관한 문제를 다룬 대목인데, 이건 6년 전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신문을 읽다가 눈에 띄어 스마트폰에 메모해 둔 문장이었다.

 

우선 문장이 짧기 때문에 비교적 손쉽게 다룰 수 있는 세 번째 문장부터 여기에 옮겨볼까 싶다.

 

" …… 장례식에는 사람을 고양시켜 주는 무언가가 있어. 나는 정신적으로 고양이 되려면 옛날부터 교회에 가지 말고 장례식에 가야 한다고 가끔 생각한 적이 있어. 사람들은 다들 멋있는 검은 복장을 하고 모자를 손에 벗어 들고는 관을 바라보면서 엄숙하고 경건한 태도를 취하지. 평소 때처럼 쓸데없는 농담을 하는 사람도 없어. ……"

 

이 대화의 전후에 어떤 배경이 깔렸든, 이 대화의 주인공이 누구건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내 기억 속에 오랫동안 저장되어 있었던 문장을 『마의 산』을 직접 오르면서 어느 순간 불쑥 마주쳤다는 사실이 내겐 중요했다. 내가 이 대목을 읽으면서 스마트폰에 넣어 놓은 '오래된 메모'를 여태껏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 놀라웠다. 지금 다시 꺼내 보니 그 둘은 번역까지도 서로 완전히 일치했다. 또한 스마트폰에 넣어 둔 메모는 놀랍게도 '북플'로 공유할 수도 있었다! 불과 몇 번의 터치로 까마득한 옛날에 메모한 내용을 통째로 이곳으로 끌고 올 수도 있다니. 세상 참 좋아졌다. 스마트폰을 바꿀 때마다 폰 속에 저장된 메모를 매번 일일이 옮겨 적느라 그렇게 애를 먹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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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을 바꿀 때마다 일일이 수기(手記)로 옮겨진 끝에 마침내 '북플 공유'를 통해 끌려나온 메모.

2011.2.27
˝내 눈빛을 꺼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
내 귀를 막아 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울부짖은들 천사의 대열에서 누가 들어주랴.
우리가 아름다움을 그토록 찬미함은 파멸하리만큼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의 비가>

2011.3.20
- 루스 베네딕트, <국화와 칼>
서구인들이 성서적인 의미의 ‘선과 악‘이라는 억압기제를 가지고 있다면 일본인들은 ‘계층의 허용범위‘라는 억압기제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국민성에 비교우열은 없다. 베네딕트는 말했다. ˝일본인의 모순, 그것이 바로 일본인의 진실˝이라고.

2011.4.1
˝우리가 들은 것 중에 가장 큰 거짓말은 우리에게는 세상을 바꿀 힘이 없다는 말이지만, 가장 큰 비밀은 왜 우리가 이것을 깨닫고도 일어나서 무언가를 하지 않는가 하는 것˝
- <세계를 속인 200가지 비밀과 거짓말> 중에서

2011.4.3
나는 몇 살까지 살까?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
중요한 단계에 도달한 뒤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는 것,
한결같이 열심히 생산적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장수하기 위해 따라야 할 지침들이다.

2011.9.10
토마스 만
장례식에는 사람을 고양시켜주는 무엇인가가 있어 나는 정신적으로 고양되려면 옛날부터 교회에 가지 말고 장례식에 가야 한다고 가끔 생각한 적이 있어. 장례식에선 다들 엄숙하고 경건해지지. 평소처럼 쓸데없는 농담을 하는 사람도 없어. 나는 사람들이 가끔 경건해지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해.

시간 단위는 단순한 약속일 뿐이야. 시간에는 눈금이 없지. 세기가 바뀔 때 총을 쏜다거나 종을 울린다든지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뿐이야.

2011.7.2
권이혁
그는 ˝내 목표는 웃으면서 죽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 권전장관이 젊은이에게 권하는 인생요령은 다음과 같다.

1. 젊었을 때부터 많이 걸을 것.
2. 남이 해주는 일을 고맙게 여길 것.
3. 즐겁게 살고 현명하게 늙기 위해 책을 많이 읽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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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와 세 번째로 만난 문장은 제법 길지만 여기에 한번 옮겨보고 싶다. '시간의 흐름'에 관한 문제와 '연애의 형이상학'에 관한 문제는 『마의 산』을 오르든 말든 어쨌든 누구나 한 번쯤 음미해 볼 만한 문제이니까 말이다.

 

지루하다는 현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잘못된 생각이 만연해 있다. 대체로 내용이 재미있고 신기한 경우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 즉 시간이 짧아진다고 생각하는 반면 단조롭고 내용이 없는 경우는 시간이 잘 가지 않고 더디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반드시 올바른 견해라고는 할 수 없다. 내용이 없고 단조로운 것은 사실 순간과 시간의 흐름을 더디게 하고 '지루하게' 만들지도 모르나, 아주 커다란 시간의 단위일 경우에는 이를 짧게 하고, 심지어 무(無) 같은 것으로 사라지게 한다. 이와 반대로 내용이 풍부하고 재미있는 경우는 시간과 나날이 짧게 생각되고 훌쩍 지나가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시간 단위를 아주 크게 하여 생각해 보면 그럴 경우 시간의 흐름에 폭, 무게 및 부피가 주어진다. 그리하여 사건이 풍부한 세월은, 바람이 불면 휙 날아갈 것 같은 빈약하고 내용이 없으며 가벼운 세월보다 훨씬 더 천천히 지나간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루하다고 말하는 현상은 생활의 단조로움으로 인한 시간의 병적인 단축 현상이다. 그리하여 나날이 하루같이 똑같은 경우 오랜 기간이 깜짝 놀랄 정도로 조그맣게 오그라드는 것이다. 매일 똑같은 나날이 계속된다면 그 모든 나날도 하루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매일매일이 완전히 똑같다고 한다면 아무리 긴 일생이라 하더라도 아주 짧은 것으로 체험되고, 부지불식간에 흘러가 버린 것처럼 된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시간 감각이 잠들어 버리거나 또는 희미해지는 것이다. 젊은 시절이 천천히 지나가는 것으로 체험되고, 나중의 세월은 점점 더 빨리 지나가고 속절없이 흘러간다면, 이런 현상도 익숙해지는 것에 기인한다. 다른 생활에 새로이 적응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유지하고, 우리의 시간 감각을 새롭게 하며, 우리의 시간 체험을 갱신하고 강화하며 더디게 하여 이로써 우리의 생활 감정을 새롭게 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장소와 공기를 바꾸고, 온천 여행을 하는 목적도 이 때문으로, 기분 전환과 부수적 사건을 통해 심신의 회복을 꾀하는 것이다. 새로운 곳에 가면 처음 며칠, 가령 6일 내지는 8일 정도 되는 처음 며칠은 젊은 날처럼 힘차고 활기차게 진행된다. 그러다가 그 생활에 '익숙해짐'에 따라서 점점 시간이 눈에 띄게 단축된다. 삶에 집착하거나, 더 정확히 말해서 삶에 집착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매일매일이 다시 가벼워져서 후딱 지나가기 시작하는 사실을 감지하고 섬뜩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가령 4주간의 마지막 주는 소름끼칠 정도로 빨리 후딱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물론 시간 감각의 쇄신은 막간 여행이 끝난 후에도 효력을 미쳐, 일상생활로 돌아간 뒤 새로이 효력을 발휘한다. 기분 전환을 한 후 집에서 보내는 며칠 동안은 역시 다시 새로워져, 폭넓고도 활기차게 체험된다. 하지만 이런 효력은 며칠간만 지속될 뿐이다. 일반적으로 외지에서보다 집에서 더 빨리 생활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노령으로 시간 감각이 벌써 무뎌졌거나, 또는 ㅡ 애당초부터 생활력이 약하다는 징조이지만 ㅡ 원래부터 황성하게 발달되지 않은 경우에는 시간 감각이 금방 다시 잠들어 버린다. 그리고 하루만 지나도 벌써 마치 집을 떠나지 않았던 양 생각되고, 여행이 하룻밤의 꿈처럼 생각된다.

 

이러한 소견을 여기에 집어넣은 까닭은 한스 카스토르프가 며칠 후에 사촌에게 이렇게 말했을 때 자신도 이와 유사한 느낌을 가졌기 때문이다(그는 말하면서 사촌을 충혈 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낯선 땅에 오면 처음에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것이 이상하거든. 말하자면 …… 그렇다고 내가 지루하다는 말은 아니야. 반대로 나는 왕처럼 즐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러니까 회고해 보면 내가 이 위에 얼마나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오래 있은 듯한 생각이 들어. 내가 언제 이곳에 왔는지 퍼뜩 생각이 안 날 정도야. 그때 네가 나한테 '내려가지!' 라고 말한 거 생각나? 나는 그때가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생각돼. 이는 순전히 감정상의 문제이지 측정이나 오성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일이야. '여기 온 지 벌써 두 달은 된 것 같아' 라고 내가 말한다면 물론 말도 안 되겠지. 터무니없는 말일 거야. 그래도 '아주 오래되었다' 라고는 말할 수 있겠지."(202∼205쪽)

 

 - 『마의 산_상』, 제4장, <시간 감각에 대한 보충 설명> 중에서

 

 

이렇게 길게 인용하고 보니 소설 속에 나오는 문장이 마치 '철학책 속 문장'과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토마스 만이 이렇게 '문학 속에 담은 철학'은 결국 쇼펜하우어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다른 어떤 철학자에게서도 쉽게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너무나 '명쾌'하면서도 표현이 몹시 문학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상대적인 빠르기'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을 여기에 전부 인용하기에는 너무 길지만 그 대목을 '인용'하지 않으면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마의 산』에 등장하는 문장을 서로 비교해 볼 도리가 없으니 '접어서라도' 인용하고 넘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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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쇼펜하우어의 『삶의 예지』에서 발견한 '시간의 흐름'에 대한 글들

유년시절의 환경과 체험이 언제나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은......

사람의 두뇌는 일곱 살쯤 되면 상당히 커지며, 지능도 그 무렵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여 외부 세계를 인식하려고 한다. 인식의 대상인 외부 세계는 매우 신선한 느낌을 준다. 모든 것이 생기발랄해 보이기 때문에 유년시절은 그대로 하나의 아름다운 서사시가 된다. 사실 모든 시와 예술의 본질은 플라톤이 말한 바와 같이 이데아(사물의 실체)를 붙잡는 일, 다시 말해서 개체를 통하여 보편적인 것을 직관하는 일이다.

또한 유년시절의 환경과 체험이 언제나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은 그 무렵에는 외부 세계가 선명하게 드러나 하나하나의 사물이 대표적으로 보이며, 직관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유년시절에는 환경에 전적으로 몰입하여 눈앞에 나타나는 사물을 그 종류 가운데서 유익한 실재로 인식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인식보다는 의지의 힘에 의해 움직이므로 외부의 사물은 대부분 고뇌를 안겨 준다. 요컨대 모든 사물은 인식의 눈으로 보면 매우 선량하고 아름답지만, 의지의 눈으로 보면 무척 사나운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후자보다는 전자의 편에 속하는 것이 유년시절의 특징이다.



 

온 세계가 에덴동산처럼 생각되기 때문에......

이 무렵의 인간은 사물의 아름다운 일면만을 알고 두려운 점을 모르며, 우리 자각에 나타나는 모든 사물에 순수한 그 사물 자체 또는 예술에 묘사된 것과 흡사하여 매우 선량하고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므로 온 세계가 에덴동산처럼 생각되기 때문에 누구나 한 번쯤은 으레 행운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절을 벗어나면 차츰 인식보다 의지가 생활의 중심이 되어 생활의 대상으로서 선과 미를 의욕의 대상으로 삼는다. 즉, 사물과 의지의 여러 가지 반작용이 일어나 괴로운 운명에 시달리면서 '삶의 난동' 속에 빠져 들어간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서 사물과 또 다른 일면, 즉 의욕의 대상으로서 무서움을 알게 되며, 의욕적인 생활에 따르는 모든 장해와 근원을 체험하고 인생에 대한 아름다운 꿈이 깨어진다. 그리고 아름다운 환상을 즐기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고 한탄하여 회한에 잠기게 되는데, 이런 실망은 나이가 들어 늙어갈수록 더욱 심해진다. 유년시절의 인생은 먼 데서 바라본 극장의 장식물과 같지만, 노년기의 인생은 그 장식물을 가까이서 목격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봄에는 모든 나무 잎사귀가 다 초록빛으로 보이는 것처럼

이 밖에 유년시절에 평온과 축복을 가져오는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마치 봄에는 모든 나무 잎사귀가 다 초록빛으로 보이는 것처럼 미래의 영웅이나 학자, 농부, 시골사람 할 것 없이 서로 조용히 친밀한 사이가 되어 독특한 사회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 개인차가 심해지고, 그 차이는 중심에서 원주까지 점점 멀어져 가는 원의 반지름처럼 점점 더 커진다.

우리 생애의 후반기보다 전반기가 더욱 이상적으로 보이고 후반기가 대체로 불쾌하고 불행하게 생각되는 것은, 우리가 생애의 초기에 행복의 실제를 믿고 이를 손에 넣을 것이라는 기대에서 있는 힘을 다 기울였지만, 오히려 그것이 실망과 재앙의 근원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와 같은 노력의 결과는 언제나 되풀이되는 실패와 실망, 그리고 이에 따르는 불만이다. 젊은이들에게는 꿈같은 행복의 그림자가 여러모로 눈앞에 아른거리지만 이것은 결코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손에 넣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청년시절의 공통된 망상에서 떠날 수 있다면......

모든 청년들이 자신의 처지나 환경에 대하여 불만을 느끼는 것은 결국 인생 자체가 공허하고 비참한 데 원인이 있다. 청년들은 그것을 처지나 환경 탓으로 본다. 그들은 나중에 꿈에서 깨어나야 비로소 인생은 결코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이 못 된다는 사실을 알고 이것을 자기 처지나 입장의 탓으로 돌리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이 만일 올바른 교육을 받아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행복과 만족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청년시절의 공통된 망상에서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이겠는가.



 

시나 소설에 묘사된 인생과 친숙해졌기 때문......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이와 정반대의 방향을 더듬게 된다. 이것은 그들이 인생의 참된 모습을 알기 전에 시나 소설에 묘사된 인생과 친숙해졌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눈에는 문학에 표현된 인생이 매우 아름다워 보이기 때문에 자기도 한번 그처러머 실제로 해 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래서 자기 생애를 하나의 소설처럼 실현해 보려고 하는데, 이것은 무지개를 붙잡으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결국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



 

대문소리......

인간의 전반기 특징이 이와 같이 행복에 대한 충족될 수 없는 동경이라면, 후반기의 특징은 불행에 대한 두려움이다. 후반기에 오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행복은 하나의 망상이요, 고통만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상식이 있고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나이가 들어 늙어갈수록 행복보다는 차라리 견디어 나가기 쉬운 상태를 원하며, 근심과 걱정이 없는 처지를 원하게 된다. 나는 젊어서는 대문 소리가 나면, '무슨 좋은 일이 있으려나?' 하고 기뻐했지만, 나이를 먹고 나서부터는 대문 소리가 들리면, '무슨 귀찮은 일이 생기려나?'하고 불안을 느끼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소유에 대하여 애착을 가지는 것은......

생명력, 즉 체력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36세까지는 그 이자로 살아가는 사람과 같아서 오늘 소모한 체력은 내일이면 회복된다. 그러나 이 무렵을 고비로 그 후로는 자기 자본을 갉아먹기 시작하는 자본가가 된다. 처음에는 사태의 변화가 거의 눈에 뜨이지 않아 지출의 대부분은 자연히 원상복구가 되어 이 무렵의 손실은 대수롭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손실이 점점 늘어가면 눈에 띄게 된다. 그것은 날마다 팽창하여 점점 뿌리를 깊이 박고, 오늘이라는 하루가 돌아올 때마다 어제보다 가난해진다. 그 동안에 그 감퇴는 물체의 낙하처럼 더욱 속도를 내고 나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다. 이처럼 생명력과 재산이 날로 줄어든다면 그보다 더 딱한 일은없을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소유에 대하여 애착을 가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성년에 도달하고 나서 몇 해까지는 생명력에 관해 말하자면 이자 중에서 얼마간은 자본에 보태는 사람과 같다. 그렇게 하면 지출한 금액이 다시 자연히 충당될 뿐더러 자본도 늘어간다. 오, 행복한 청춘! 오, 서글픈 늙은이······. 어쨌든 인간은 청춘의 힘을 소중히 간수해야 한다.



 

인생의 모든 사물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작아 보인다.


젊은이의 입장에서 보면 인생이란 하나의 끝없이 긴 미래로 보이며, 노인의 입장에서 보면 극히 짧은 과거에 지나지 않는다. 인생의 모든 사물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작아 보인다. 청년시절에는 그처럼 크게 보이던 인생이 꿈과 같이 덧없고, 다만 급격한 현상의 무의미한 교체로 생각되어 허무와 무상이 뚜렷이 들여다보이고 또 마음에 스며든다.


청년시젏에는 시간이 가는 것이 무척 더디다. 그러므로 일생의 4분의 1은 행복한 시기고 또 가장 길게 생각되는 부분이며, 그 동안에 기억하는 일들은 어느 시기의 기억보다 훨씬 많다. 자기의 생애에 대하여 이야기를 할 때 누구나 그 4분의 1에 해당하는 부분에 관해서는 그 밖의 4분의 3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 기간은 계절에 있어서 봄과 마찬가지로, 인생에서도 해가 너무 길어 지루하게 생각될 정도지만,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면 낮이 무척 짧아지는 대신에 맑은 날씨가 계속된다.


노년기에는 왜 과거의 생애가 그처럼 짧게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조금도 소중할 것 없는 대부분의 불쾌한 일들이 기억에서 사라지고, 극히 작은 부분만 남아있기 때문에 그 내용이 빈약해지고 길이도 짧아지는 데서 오는 것이다.


 

http://blog.aladin.co.kr/oren/6854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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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만난 '익숙한 문장'은 그나마 두 번째 문장보다는 조금 짧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아아,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은 여자들이 유혹적으로 옷을 입는 것과 같은 그러한 자명한 사실 때문이다. 이는 자명한 사실이며, 어디서나 흔히 일어나는 일이고 인정받는 일이라서 이에 대해서는 거의 새삼스레 의식하는 일 없이 선뜻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스 카스토르프는 인생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이를 의식할 필요가 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관습이며, 엄밀히 말하면 거의 동화 같은 관습임을 머릿속에 그려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자들이 동화 같고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복장을 하고서도 풍기에 어긋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어떤 목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는 물론 다음 세대와 인류의 번식에 관계되는 문제이다. (249∼250쪽)

 

- 『마의 산_상』, 제4장, <사랑과 병의 분석> 중에서

 

 

이 대목에 상응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소위 <연애의 형이상학>에 나오는데, 이 대목 또한 '접어서' 인용하는 것으로 처리할까 싶다. '접기'조차 생략하면 이 글이 너무나 길게 늘어나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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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정은 겉보기에는 별나라 같아도, 사실은 성욕이라는 본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니, 이 본능이 특수화된 것이며 개체화된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사랑이 희곡이나 소설에서뿐 아니라 실제 사회에서(거기서는 자기보존 본능과 함께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며, 모든 동작 중에서 가장 활동적이다) 연출하는 중요한 역할을 관찰하면, 언제나 모든 생애에서 가장 젊은 시절, 즉 청춘시절 뭇사람들의 정력과 사고를 거의 절반쯤 강제로 동원한다. 또한 사랑은 인간이 기울이는 모든 노력의 마지막 목적으로서, 심지어는 가장 중요한 사건에도 엄청난 영향을 주며, 가장 진실한 과업을 중단시키고, 때로 가장 위대한 정신도 흐리게 하며, 외교적 교섭이나 학술연구에 몰두할 때도 체면불구하고 연출하여 장관의 문서철이며 철학자의 원고 속에 연애편지나 머리카락을 끼워넣게 한다. 또 수많은 나날 시끄러운 사건에 가장 악질적으로 사주한 사람이나 동지끼리 맺은 가장 친밀한 사이도 끊어버리고, 견고한 사슬도 풀며, 허다한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생명과 건강과 부와 지위와 행복을 빼앗아갈 뿐더러, 정직한 사람을 철면피로 만들고, 충신을 파멸시키려 한다. 이 모든 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토록 소란을 피우고 애쓰고 고민하며 불행에 빠지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외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듯 하찮은 일이 그처럼 큰 파문을 일으키며 안정된 생활에 소동을 일으키게 하는 것인가?

진리 탐구 정신이 투철한 사상가라면 이 물음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내릴 수 있다. 즉, 그것은 결코 작은 일에 관련되어 있지 않으며, 그 중대성은 그것을 추구하는 경우 맞닥뜨리게 되는 진지하고 열렬한 모습에 맞먹는다.

정사의 목적은 비극으로 나타나든 희극으로 나타나든 인생의 여러 가지 목적 가운데 가장 엄숙하고 중요한 것이며, 누구나 끈질기게 추구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거기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일은 다음 세대의 조정이라는 중대한 일이며, 다음 무대 위에 우리를 대신해 등장할 인원은 이같이 사소한 장난처럼 보이는 정사에 의해 그 존재와 양상이 결정된다.

그리고 이 미래에 인간이 존재하느냐의 문제가 성욕을 절대조건으로 삼고 있는 한편, 그들의 성격적인 특질인 본성(essentia)은 성애의 개체적인 선택을 절대조건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모든 점이 변함없이 결정된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일시적인 사랑에서 가장 뜨거운 정열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모든 형태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진상이 분명히 드러난다. 사랑의 여러 가지 형태는 이성을 선택하는 개인적인 조건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세대의 연애를 인류 전체의 입장에서 크게 보면, 다음 세대의 성립을 숙고하고 그 뒤의 무수한 세대에 대해 배려하는 진지한 일이라고 하겠다. 사실 그것은 다른 정열같이 개인의 불행이나 이익에 관계되는 일이 아니고, 앞으로 돌아올 인류의 존재와 그 특수한 양상에 관한 것으로, 이 경우 개인의 의지는 가장 높은 능력에 도달하여 자신을 종족의 의지로 돌아가게 한다.

연애란 엄숙하고도 뼈아픈 것으로, 큰 환락과 고뇌가 따르는 까닭은 종족에 관한 커다란 이해관계에서 비롯된다. 시인은 몇천 년 전부터 수많은 예를 들어 그것을 묘사했다. 이 주제는 종족의 이해관계와 직결되어 있으므로 그밖의 어떤 주제도 더 이상의 감흥을 주지 못한다. 즉 개인과 종족의 관계는 물체의 표면과 물체와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사랑은 옛날부터 다루어온 진부한 것임에도 언제까지나 고갈되는 일이 없다.

(중략)

당사자들은 의식하지 못하지만, 정사는 결국 자식을 낳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다. 따라서 거기까지 이르는 과정의 우여곡절은 부수적인 조건에 지나지 않는다. 고결하고 애절한 심정으로 아름다운 사랑을 속삭이는 사람들은 내 주장이 지나친 실재론이라고 반박할 테지만, 이것은 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등장할 인류의 외모와 성격을 정밀하게 선정하는 일은 그들의 꿈이나 공상보다 훨씬 고귀한 목적이 아닌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목적들 중에서 이보다 더 중대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 목적을 인정하지 못하면 사랑의 뜨거운 정열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정열이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되고 극히 하찮은 일도 일단 이 목적과 관련 맺으면 중대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래서 연인을 위해 동분서주하거나 서둘러 접근하는 노력이나 노고는 언뜻 보아 결과로 얻을 수 있는 대가보다 커보이는데, 이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위에서 말한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노고와 투쟁을 거쳐 현재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성적인 성격을 갖고 태어날 다음 세대의 인류다. 아니, 다음 세대의 인류는 벌써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저 사랑이라는 이름의 면밀하고도 끈기 있는 이성의 선택에서도 나타나 있다.

(중략)

이제 문제의 핵심에 대해 언급하겠다. 사람은 누구나 이기심이 깊이 뿌리박혀 개개인에게 어떤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하고도 분명한 동기는 이기적인 것 이외에 없다. 종족은 개체에 대해 분명 우선권을 가지며, 보다 직접적이고 큰 권한을 갖고 있다. 종족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개체는 희생되어야 하는데, 개체의 관심은 오직 자신의 욕구에만 쏠려 있으므로 개체에게 이런 희생이 얼마나 필요한지 이해시켜야 한다. 그렇다 해서 개체에게 자신의 이해관계로부터 떠나게 할 수는 없으므로 자연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환상을 심어주어 개체를 기만할 수밖에 없다. 이때 개체는 이 환상에 미혹되어 사실은 종족에 관한 일인데도 자신의 행복이 되는 것처럼 오인하게 된다.

그리하여 개체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믿는 순간, 이미 자연의 무의식적인 노예가 되어버린다. 그의 눈앞에는 곧 탐스러운 환상이 나타나 이를 추구하게 된다. 이 환상이 다름아닌 본능으로, 그 대부분은 개체 의지가 아닌 종족 의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중략)

자기 이상에 맞는 아름다운 여성을 발견하면 남성은 미칠 듯한 정열을 일으키며, 이 여성과 결혼했을 경우 맛볼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이 환영으로 눈앞에 나타난다. 그런데 이 정열도 따지고 보면 '종족의 의지'며, 이것이 여성에 대해 스스로 선명한 이미지를 그려보이며 그녀를 통해 자신을 유지해 나가려고 한다.

(중략)

그런데 사랑을 속삭이던 사람들이 일단 그 정열을 충족시키면, 곧 미궁에서 벗어나 그처럼 열망했던 것이 얼마 안 가 실망을 안겨주는 일시적인 쾌락만 제공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리고 이 욕망은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다른 욕망에 대해 종족과 개체, 무한과 유한 같은 관계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이 욕망의 충족으로  종족만이 실제적 이득을 보게 되나, 개체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개체가 종족의 의지에 따르게 되어 지불한 희생은 그 자신의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에 사용된 것이다. 모든 연인은 성교라는 큰일을 한 번 치르고 나면 곧 속았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에게 종족의 도구가 되게 한 환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성적 쾌락은 최대의 사기꾼"이라는 명언을 남기게 되었다.

(중략)

그러므로 종족의 영혼은 개체의 이익에 관계되는 일보다 월등히 중요한 일을 처리한다고 자부하며, 전쟁의 불바다 속에서건, 분주하게 사무를 집행하는 중이건, 페스트가 창궐하는 중이건, 또는 한적한 절 속이건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자기 일을 수행한다.

(중략)

사랑이 어느 유일한 이성에게 쏠리게 되면 굉장한 힘과 열을 내어, 만일 사랑이 맺어지지 못하면 본인에게는 세계의 훌륭한 것들이 시들하게 보이고 나아가 목숨까지도 하찮게 생각되며 이 정열을 불태우기 위해 어떤 희생도 두렵지 않게 된다. 그 격정은 다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으며, 때로 미치거나 자살까지 하게 만든다.

(중략)

질투가 괴롭기 이를 데 없는 정념(情念)인 것도 이런 점에서 이해할 만하고, 또한 자기가 극진히 사랑하는 사람을 단념하는 일이 어떤 희생보다 크게 여겨지는 것도 납득이 된다. 영웅은 일상적인 일로 비탄에 빠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만, 사랑의 비애에 대해서는 비탄을 억누르지 못한다. 이 경우 비탄에 빠지는 것은 본인 자신이 아니라 종족 자체이기 때문이다. 칼데론의 훌륭한 희곡 《위대한 제노비아》제2막에 제노비와 데시우스가 등장하여 데시우스가 말한다.

"아, 하늘이여, 당신이 날 사랑한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나는 백 번이라도 승리를 포기하겠소. 적진에서 도망쳐버리겠소."


여기서는 여러모로 이해타산적인 명예가 무시되고 그 대신 사랑, 즉 종족에 대한 이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명예와 의무, 그리고 충성은 지금까지 유혹이나 심지어 죽음의 협박에도 저항해 왔으나, 종족의 이해 앞에서는 고분고분 양보하고 굴복해 버린다.


(중략)

일단 종족에 대한 이해가 강조되면 개체에게만 관련되는 이해는 다 거기에 순종하며, 때로는 희생이 되기도 한다. 이같이 인간은 자신에게도 종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게 되며, 자기가 개체 안에서보다 종족 가운데에서 더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랑에 빠진 자는 무엇 때문에 연인에게 완전히 얽매여 애인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라도 무릅쓰려고 하는가? 애인을 그리워하는 건 결국 그 사람 속에 깃든 영구불멸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밖의 것들은 오직 허망하게 생멸하는 일에만 관련되어 있다.

어떤 사람에 대한 열렬한 사모의 감정은 우리 본성이 불멸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광명을 던져주는 것으로, 이를 요약해 말하면 다음과 같다. 성적 욕망에 의한 이성의 선택은 차츰 열기를 더하여 드디어 열렬한 사랑에 이르고, 이것은 앞으로 나타날 인류의 특수한 개성적인 소질이 종족 속에서 존속된다는 것을 입증한다.

(중략)

이 내재적인 본성이야말로 의식의 핵심이고 그 근저에 있으며 의식 자체보다 더욱 직접적인 것, 즉 개개의 원리에서 떠난 물자체(物自體)다. 개체가 시간적·공간적으로 어디에 흩어져 있더라도 영원히 동일한 것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또한 내가 다른 말로 '살려는 의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생명의 존속을 요구하며 죽음이 손대지 않고 남겨두는 힘이다.

 - 쇼펜하우어, 『인생을 생각한다』중 '사랑의 형이상학'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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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세계문학전집 22_마의 산』에 실린 사진. 유럽에 처음 갔을 때 밀라노를 거쳐 쮜리히에서 하룻밤 묵은 뒤 이튿날 인터라켄을 거쳐 알프스의 융프라우까지 올랐던 추억이『마의 산』을 읽는 동안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학원세계문학전집 22_마의 산』에 실린 사진. 이 서재에서도 쇼펜하우어와 니체의 책들이 토마스 만의 손때가 묻은 채 오래도록 사랑받았으리라는 생각을 하니 왠지 다르게 보이고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렇게 해서 '호흡이 터지는 듯한 기분'을 가까스로 정리해 봤다. 아직도 『마의 산』을 다 오르기에는 까마득한데, 반가운 친구를 만난 듯한 기분에 도취되어 너무 오래 쉰 듯싶다. 이제 호흡이 터졌으니 '발결음도 가볍게' 『마의 산』을 계속 힘차게 올라가 보자. 토마스 만이 보여줄 더 멋진 경치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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