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산문의 신비, 산문의 아름다움을 향한 소설의 길 위에서, 플로베르는 거대한 한 걸음을 내디뎠다.

 - 밀란 쿤데라, 『배신 당한 유언들』중에서

 

 * * *

 

오늘날 압도적인 기세로 쏟아져 나오는 문학 장르는 단연 소설이다. 기나긴 문학의 역사 위에서 보면 가장 오랫동안 명함도 제대로 못 내민 장르가 바로 소설이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소설의 홍수 시대'는 분명 문학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어느 나라를 불문하고 옛날 옛적에도 '이야기'는 끊임없이 입에서 입으로, 거북이 등껍질이나 양피 가죽 혹은 파피루스 종이 위로도 끊임없이 옮겨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 형식은 주로 시(詩)였다. 그게 설화시(說話詩)가 되었든 서사시(敍事詩)가 되었든 서정시(敍情詩)가 되었든. 어쨌든 시로 노래하듯 '이야기'를 전달했던 것이다.

 

영원한 인류의 고향으로 대접받는 고대 그리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숱한 신화들이 음유시인들의 암송으로 '노래처럼' 불려졌다. 소포클레스나 아이스퀼로스가 지어낸 '오이디푸스 왕'이나 '아가멤논 왕'의 비극도 모두 시였고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조차도 모두 시로 불렸다. 중세의 이름난 문학 작품들 가운데 시(詩)로 쓰인 작품이 많았던 것도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단테가 100곡에 걸쳐 노래한 Divina commedia는 말 그대로 신곡(神曲)이다.

 

이런 전통은 셰익스피어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는 문학장르 상으로는「희곡」을 많이 썼지만, 작품들마다 상당 부분을 '노래처럼' 운율을 갖춘 시(詩)로 썼다. 대략 40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수많은 이야기들은 대부분 이처럼 '노래하듯이' 전달되어 왔던 셈이다. 물론 여기에도 예외가 없었던 건 아니다. 『겐지 이야기』나『천일야화』같은 작품들은 시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문학'은 꽤나 오랫동안 소수의 천재들이나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영역이었다. 이야기를 노래로 전달하는 능력은 시인이 아니라면 결코 아무나 쉽게 창작할 있는 기술이 아니었으니까.

 

숱한 이야기를 시보다 훨씬 더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 문학 형태인 '소설'을 제쳐 주고 왜 옛날 사람들은 그토록 어려운 '시의 형식'을 택했을까. 오랜 문학적 전통 말고는 달리 설명하기 어렵다. 중세의 암흑 시대를 '뿌리 깊은 기독교 전통' 말고는 달리 마땅히 설명할 길이 없듯이 말이다. 이런 답답한 문학적 전통에 반기를 들고 맹렬한 기세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새로운 문학 형식이 바로 소설이었다.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기폭제 역할을 떠맡았다.

 

소설에서는 거의 모든 제약이 갑자기 사라진다. 주제든, 형태든, 구성이든, 화자(話者)든, 시점(視點)이든, 길이든. 라블레와 세르반테스가 근대소설의 서막을 열었다면 플로베르는 『마담 보바리』로 현대소설의 등장을 알렸다. 결국 이들로부터 심대한 영향을 받은 후세의 작가들은 온갖 형태와 구성을 갖춘 다양한 소설을 쏟아냈다. 이제 와서는 '소설의 형식' 마저도 무너진 소설을 쓰고 있다. 제임스 조이스는 어떤가? 보르헤스는? 밀란 쿤데라의 몇몇 소설은 에세이와 구분하기 어렵다. 소설 속에 문득 작가 자신이 불쑥 등장하기까지 한다. 그래도 그 작품들은 탁월한 소설로 대접받는다. 모름지기 소설은 '이야기'일 뿐이고, 이제 '이야기의 전달 방식'은 하등 문제될 것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소설『마담 보바리』는 어느날 갑자기 등장한 '걸작 소설'이 결코 아니었다.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먹고 살 걱정이 별로 없었던 플로베르는 아버지의 끈질긴 권유로 '법학도'가 되지만 결국 '발작'을 일으킨 끝에 문학으로 전향한다. 그에겐 법학 공부가 몸에 너무나 맞지 않는 옷이었던 셈이다. 어릴 때부터 『돈키호테』에 심취했었고, 이미 여러 차례 습작을 썼던 플로베르는 작심하고 완성한 첫 작품을 주변 사람들에게 선보였지만 혹독한 비판에 직면한다. 그가 문단에 몸담은 친구들로부터 들었던 평가는 참으로 가혹했다.

 

"원고를 불에 태우고 다시는 입 밖에도 내지 말라!"

 

<루앙 옆, 크루아세 지방의 센 강가> 샤를 알베르 르부르(1849∼1928, 프랑스), 오르세 미술관

 

그는 『마담 보바리』에도 자주 등장하는 '루앙'은 제쳐 두고, 그 근처 센 강가의 크루아세에 거처를 마련하고 은둔에 들어갔다. 무려 4년 반을 절치부심 문장과 싸운 끝에 내놓은 소설이 '현대 소설'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제친 『마담 보바리』였다.

 

“나는 읽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세르반테스를 다 암송했다”고 뻥(?)을 쳤던 플로베르가 '통속 소설'이나 다름없는 진부한 소재와 주제의 소설을 썼음에도 그토록 높은 '문학적 가치'를 획득한 이유는 무엇인가.

 

플로베르가 『마담 보바리』를 두고 "나의 이야기이지만 또한 돈키호테 이야기"라고 고백한 데서 중요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이야기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이야기를 담는 그릇에 하나의 혁명을 시도했다. 문학에서 언제나 중요한 건 둘 중의 하나다. '이야기' 이거나 '이야기의 전달 방식' 이거나. 플로베르는 바로 '이야기의 전달 방식'에서 '새로운 이상'을 꿈꿨고 그 꿈을 이뤄냈다. 그는 어찌보면 진부한 이야기에 불과한 '간통 소설'에 자신만의 '스타일'을 불어넣기 위해 '단말마적 고통'을 겪었다. 돈키호테가 늙은 로시난테를 타고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모험에 나서는 동안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는 숱한 고통을 겪었듯이.

 

"이 빌어먹을 보바리 때문에 나는 괴롭다 못해 죽을 지경이다 …… 나는 지겹고 절망적이다 …… 기진맥진한 상태다 …… 보바리가 나를 때려눕힌다 …… 태산을 굴리는 듯 지겹다 …… 정말이지 보바리는 따분해서 견딜 수가 없다."

 - 1852년 6월에 쓴 <편지> 중에서

 

그는 '소설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깊숙히 내려갔다. 친구들로부터 '작가로서의 파산 선고'를 받았던 그가 바닥까지 추락한 뒤에 마침내 발견한 탈출구가 바로 그 질문 속에서 희미한 빛을 던져주고 있었던 셈이다. '소설의 형식과 내용은 어떻게 다른가?' 그가 『마담 보바리』를 쓰면서 천착했던 질문이 바로 그런 데로 모아졌다. 그는 궁극적으로 '외부 세계와 의 접착점이 없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마치 이 지구가 아무것에도 떠받쳐지지 않고도 공중에 떠 있듯이 오직 스타일의 내적인 힘만으로 저 혼자 지탱되는 한 권의 책, 거의 아무런 주제도 없는 아니 적어도 주제가 거의 눈에 뜨이지 않는 한 권의 책 말이다. 가장 아름다운 작품들은 최소한의 소재만으로 된 작품들이다. 표현이 생각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어휘는 더욱 생각에 밀착되어 자취를 감추게 되고 그리하여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 <플로베르가 루이즈 콜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이쯤에서 소설 속 보바리 부인이 살았던 동네 근방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자.

 

『마담 보바리』에서 '사건들'은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엠마의 이야기 속에서도 숱한 사건들이 일어나고 등장 인물들은 격렬한 변화를 겪는다. 하지만 그런 '격변' 조차 소설 속에서는 '음악적 고조' 이상으로는 격앙되지 않는다. 이 소설은 많은 장면들에서 마치 '세밀화'를 들여다 보는 듯한 이미지 묘사로 가득하지만, 그 저변을 잔잔히 흐르는 선율은 도리어 '음악'을 닮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마치 제1주제와 제2주제가 번갈아 등장했다가 차츰 사라지고, 일정한 변주가 울리고, 빠르게 흐르던 주제에서 벗어나 잔잔한 안단테의 평화롭고도 고요한 악장이 연주되고, 그런 장면들이 다 끝나면 어느새 다시 '격렬하게' 제1주제와 제2주제가 숨가쁘게 빠른 속도로 치솟듯 연주되다가, 마침내 피날레에 이르고 난 뒤의 긴 침묵과 잔잔한 여운으로 끝나는, 그런 음악을 닮았다는 느낌을 준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루앙 근처 시골에서 평범하게 자란 샤를르 보바리는 간신히 '의사 면허 시험'에 합격한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동네 근처 시골에서 '의사'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다. 어느 날 그는 60리나 떨어진 마을 베르토로 급히 왕진을 떠나게 된다. 시골에서 제법 번듯한 농가를 꾸리고 사는 루오 영감이 다리를 심하게 다쳤기 때문이다. 그 영감은 '문학적 낭만'으로 머리 속이 가득 찬 꿈 많고 아름다운 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왕진이 거듭 되자 샤를르는 환자의 딸인 이 시골 처녀에게 점점 이끌리지만 부모의 권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돈많은 과부'와 결혼한다. 다행히(?) 돈은 별로 없고 나이만 많았던 과부가 일찍 죽는 바람에 샤를르는 운 좋게도(?) 루오 영감의 딸 엠마에게 청혼할 기회를 다시 얻게 되었고, 엠마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시골 의사의 부인으로 '신혼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엠마 보바리는 '꿈 많은 처녀'에서 '시골 의사 부인'으로 바뀐 자신의 처지에 차츰 실망한다. 따분한 일상을 견디지 못하는 아내 엠마는 어느새 '병든 닭'처럼 시들어 간다. 이 원인 모를 병세를 치유하기 위해 샤를르는 조금 더 큰 마을인 '용빌'로 이사를 간다. 그곳에 도착한 첫날 저녁부터 그녀는 읍내 공증인 사무실의 서기로 일하는 순박한 청년 레옹에게 끌린다. 갑자기 반한 엠마는 그와의 '로맨스'를 꿈꾸지만 그 둘의 관계는 그야말로 싱겁게 끝나고 만다. 새로 이사를 온 의사 마누라의 미모가 뛰어나다는 풍문을 들은 홀로 사는 돈 많은 후작이 어느 날 하인을 데리고 의사 보바리에게 '진찰'을 받으러 온다. 엠마를 직접 한 번 살펴봐야 했기 때문이다. 엠마는 이내 로돌프의 노련한 공작에 넘어가고 둘은 '불륜'에 빠진다. 시골 의사 샤를르는 그런 사정을 새까맣게 모르고 있다. 도리어 어느 날 갑자기 활기를 되찾고 행복에 겨워 하는 아내의 모습 때문에 자신마저도 행복에 젖는다.

 

보바리와 로돌프의 '밀회'는 갈수록 대담해 지고, 엠마는 정부(情夫)에게 '둘 만의 머나먼 여행'을 제안한다. 그녀는 끊임없이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고픈 '환상'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 '보바리슴' 환자이다. 점덤 더 부담으로 다가오는 유부녀의 도발을 견디다 못한 로돌프는 '이별 편지'를 보내고 갑자기 도망치듯 사라진다. 엠마는 비탄에 빠져 삶의 의욕을 상실한다. 오랜 실의를 딛고 간신히 기운을 차리기 시작한 엠마를 결정적으로 되살린 사람은 '루앙 시내 극장'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레옹이었다. 3년 동안 '파리에서 법학 공부'를 하고 돌아온 그는 어느새 '유부녀를 농락할 정도'의 세련된(?) 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날이 갈수록 보바리 부인과 레옹의 밀회는 잦아지고 대담해 진다. 엠마는 차츰 '외박'까지 일삼는다. 시골 의사는 걱정이 태산이지만 '아내의 부정'을 결코 의심하는 법이 없다. 오로지 '그녀의 안위'만 걱정한다.

 

레옹과의 밀회가 거듭될수록 모든 게 거꾸로 뒤바뀐다. 남편과 어린 딸아이는 차츰 뒷전으로 밀려나고 모든 평범한 일상들이 점점 더 엉망이 된다. 불륜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안 엠마의 씀씀이도 갈수록 헤퍼진다. 노련한 마을 포목상 뢰르가 엠마의 허영과 사치에 부채질을 한다. 마침내 엠마는 자신의 주체하기 힘든 소비욕 때문에 밀린 결제대금을  '어음'으로 돌려 막기에 이른다. 시골 의사의 보잘 것 없는 수입에 의존하는 그녀는 남편 몰래 환자의 '외상 진료비'까지 당겨 받아 쓴다. 마침내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을 상환할 의욕마저 포기한 채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아가던 중 법원의 '차압 명령'이 들이닥친다. 절망 끝에 사방팔방으로 돈을 구하러 다니고, 레옹은 물론이고 이미 헤어진 옛 애인 로돌프까지 찾아가지만 도움을 거절당한 그녀에게 더 이상의 탈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마침내 맞닥뜨린 '절망' 앞에 처절하게 무너져 내리면서 음독 자살하고 만다.

 

보바리 부인이 느끼는 일상에 대한 권태는 한편으로는 누구나 보편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감정의 하나일 수 있다. 일상이 따분하지 않고 늘 새롭고 재미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누구나 때로 극심한 권태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삶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게 보바리 부인이 지닌 결정적인 문제다. 그녀는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다. '현실' 보다 '소설 속 이야기'를 더 갈망한다. 그래서 그녀가 선택한 탈출구는 '소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상황 뿐이다. 그녀가 선택한 남편 이외의 남자와의 외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런 외도가 결국은 자신의 파멸을 재촉한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그 시절은 얼마나 행복했던가! 얼마나 많은 자유! 희망! 얼마나 풍성한 환상에 차 있었던가! 지금은 이미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그녀는 처녀 시절, 결혼, 연애, 이렇게 차례로 모든 환경들을 거치면서 갖가지 영혼의 모험들에 그걸 다 소비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제2부 제10장)

 

이 소설을 쓴 플로베르는 "엠마 보바리는 바로 나 자신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은 무척이나 다의적이다. 작가 자신이 결코 '현실'에 만족할 수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가 그만큼 소설 창작에 있어서 '낭만주의'에 깊이 빠져 있었고, 거기서 부단히 탈출하기 위해 애를 썼다는 말이기도 하고, 바로 그런 결과가『마담 보바리』라는 작품이 되었다는 뜻기이도 하다.

 

『마담 보바리』는 한편으로는 페미니즘의 시각에서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엠마는 결혼하기 전까지 온갖 희망에 들뜬, 모든 가능성에 온전히 열려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과 함께 이내 '시골 의사 부인'으로 한정되고, 집안의 가구 하나, 정원에서 자라는 나무 한 그루, 남편의 출퇴근 시간에 구속받는 존재로 지극히 한정된다. 그녀는 '외출'할 기회도 이유도 찾지 못한 채 점점 자신의 방으로 틀어박힌 채 '소설 읽기'에 빠진다. 따분하고 고리타분하기만 한("샤를르가 하는 말은 거리의 보도처럼 밋밋해서 거기에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뻔한 생각들이 평상복 차림으로 줄지어 지나갈 뿐 감동도, 웃음도, 몽상도 자아내지 못했다.") 남편에게 실망한 끝에 곧 태어날 '사내 자식'에게 기대를 건다. '사내아이를 갖는다는 생각은 지난날의 모든 무력함에 대하여 희망으로 앙갚음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로 태어나면 적어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온갖 정념의 세계, 온갖 나라를 두루 경험할 수 있고 장애를 돌파하고 아무리 먼 행복이라 해도 붙잡을 수가 있다. 그러나 여자는 끊임없이 금지와 마주친다. 무기력한 동시에 유순한 여자는 육체적으로 약하고 법률의 속박에 묶여 있다. 여자의 의지는 모자에 달린 베일 같아서 끈에 매여 있으면서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거린다. 여자는 언제나 어떤 욕망에 이끌리지만 어떤 체면에 발목이 잡혀 있다.(제2부 제3장)

 

이 소설 속에는 독자가 쉽게 알아채지 못하는 수많은 장치들이 가득 숨겨져 있다. '우리들'로부터 시작했다가 '샤를르 보바리'에게로 건너가고 다시 '엠마 보바리'로 건너가는 시점(視點)의 변화는 마치 '영화 카메라'를 따라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멋진 풍경화를 세밀하게 들여다 보는 듯한 장면 묘사에서도 어디선가 자연스레 들려오는 온갖 '음향들'은 끊임없이 독자들의 청각을 자극한다. 로돌프가 엠마를 유혹하는 '농업 공진회 장면'에서 '마이크'를 통해 들리는 참사관의 연설과 로돌프의 유혹하는 대사에 끼어드는 온갖 주변의 잡다한 소음들은 마치 독자들이 바로 그곳에 함께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생생하다. 루앙의 대성당 앞에서 질주하는 마차의 행진은 또 어떻고.

 

오늘날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는『마담 보바리』가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아가멤논』에서도 발견되는 '오래된 진부한 주제'를 다뤘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사에서 그토록 끊임없이 언급되고 재조명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가운데 하나는 분명 이 작품 속에 숨겨져 있는 온갖 '소설이 지닌 놀라운 가능성과 탁월한 예술성'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사실주의'로 불리든,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로 불리든, 혹은 작품 전부에 짙게 깔린 '음악성이'나 '미술성'이나 심지어 '아이러니'로 불리든 그게 무슨 상관일까.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현대의 소설들이 단순히 '이야기'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전달 방식'에 그토록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 또한 연원을 따지고 보면 플로베르가 최초였다. 비록 그는 이 소설을 발표하자 말자 '도덕과 종교를 문란하게 한 혐의'로 곧장 재판정에 불려 나가 자신을 변호하기에 바빴지만 말이다. 하필 보들레르도 똑같은 해에 똑같은 일을 당했다. 『악의 꽃』으로. 지금으로부터 160년 전, 1857년의 일이었다.

 

 * * *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gkim 2017-07-22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이네요. 저는‘성 앙뚜안느의 유혹‘을 재밌게 봤어요.

oren 2017-07-22 23:28   좋아요 0 | URL
『성 앙투안느의 유혹』을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무척 놀랍습니다!
무려 32 시간에 걸쳐 친구들에게 낭독해 줬다가 저 끔찍한 평을 들었다는 바로 그 작품을 재밌게 읽으셨군요!

bgkim 2017-07-23 0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친구분들이 부럽군요.귀한 친구를 가졌으니까요.

oren 2017-07-23 13:05   좋아요 0 | URL
친구가 쓴 작품을 들어줄 만한 ‘귀‘를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친구들이죠.

bgkim 2017-07-23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친구들 바쁘다고 전화도 씹어요 언감생심 문학얘기 꺼냈다간 귀퉁배기 돌아 갈걸요?
너 요새 시간이 남아도냐면서요

oren 2017-07-23 23:19   좋아요 0 | URL
ㅎㅎㅎ 암튼 재미있는 친구분들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