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자들은 텍스트를 읽는 입장이라는 데 따르는 굉장한 힘을 깨닫고 그런 특권을 열광적으로 지키려 들었음에 틀림없다. 오만방자하게도 대부분의 메소포타미아 필사자들은 텍스트 말미를 이런 간기로 장식하곤 했다. "현명한 사람들이 현명한 사람들을 교육하도록 하자. 무식한 사람들은 볼 줄도 모를 테니까" 라고. 이집트에서는 B.C. 2300년경인 19대 왕조에 어느 필사자가 자신의 일을 찬양하는 노래를 이렇게 적었다.

 

필사자가 되려므나! 이 말을 그대 가슴에 각인하라.

그대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

두루마리는 돌새김보다 훌륭하느니라.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먼지가 되고,

그의 사람들도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니.

사람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책이니라

그를 읽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 * *

 

(밑줄긋기)

 

 

02_시


로버트 브라우닝(1812∼1889)


시란 들리는 게 아니라 엿듣는 것


나는 여러 해 동안 어디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의식하지 못한 채 '자기 엿듣기'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특별한 독창성이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글을 쓰다가 갑자기 테니슨과 동 시대인이며 철학자였던 존 스튜어트 밀의 글이 떠올랐다. 그는 「시란 무엇인가」라는 수필에서 모차르트의 아리아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엿듣는다고 상상한다" 밀은 "시란 들리는 게 아니라 엿듣는 것"이라고 했다.
















월트 휘트먼(1819∼1892)


휘트먼과 디킨슨이야말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시인들


테니슨, 브라우닝과 동 시대를 살았던 미국 시인은 월트 휘트먼과 에밀리 디킨슨이다. 두 시인 모두 독창적인 작가였기 때문에 영국적 전통과는 매우 느슨한 관계였다. 내가 주장하듯이 우리가 독서하는 이유가 자아를 강화시키는 데  있다면 휘트먼과 디킨슨이야말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시인들이다.


에머슨이 창시한 '자립'과 관련된 미국적 종교는 휘트먼과 디킨슨의 시에 서로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에머슨은 자기 신뢰를 설파했다. 그는 자기 밖에서 자신을 찾으려 하지 말라고 했다.


월트 휘트먼의 「나의 노래」는 에머슨의 가르침이 직접적으로 나타난 결과 였다. 한편 에밀리 디킨슨의 서정시들은 '자립'의 철학을 셰익스피어 이후 그 어떤 시보다도 높은 의식의 차원으로 고양시켰다.



"풀잎이 뭐죠?"



눈부시고 거대한 일출에도 나는 압도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나 언제나 내 안에서 그 일출을 내보낼 수 있으니.


우리도 태양처럼 눈부시고 거대하게 떠올라

동틀 녘의 고요와 서늘함 속에서 우리는 오 나의 영혼을 발견했다.


이 숭고한 일출 속에서 월트 휘트먼의 인격인 '나'는 영혼과 자아 일체인 '우리'가 된다. 모든 미국의 작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심지어 에밀리 디킨슨과 헨리 제임스를 능가하는 휘트먼은 자기 영혼이 결코 알 수 없는 것임을 알게 되는 한계까지도 넘어선다. 자연과 휘트먼 사이의 문제는 지배다. 바로 거기에서 시인은 결말에 이른다.


위의 구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지금이나 언제나"라는 표현의 대담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는 위대한 자립의 선언이기도 하다. 나에게 "왜 읽는가"라는 질문은 더욱 흥미로워진다.


인내심을 가지고 「나의 노래」를 깊이 읽으면 우리는 "그 무언가는 알 수 없는 것이다"라는 진실에 도달한다. 한 아이가 휘트먼에게 묻는다.


"풀잎이 뭐죠?"


시인은 대답하지 못한다.


"나는 그 아이만큼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시인을 자극해서 그는 다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멋진 비유적 표현을 쓰게 된다.



 
















에밀리 디킨슨(1830∼1886)


우리 안에 깊숙이 주입된 관습들을 단절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에밀리 디킨슨은 사회적으로 상류 계층에 속해 있지만 그녀의 대표적인 시들은 서구 사상이나 문화의 계속성과는 단절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가장 위대한 동 시대 미국 작가인 휘트먼과 대조를 이룬다. 휘트먼은 그의 스승인 에머슨의 뒤를 이어 형식이나 시적 태도 면에서 근본적인 혁신을 일궈 냈다.


반면 디킨슨은 셰익스피어나 윌리엄 블레이크처럼 모든 일을 혼자 힘으로 해 냈다. 따라서 디킨슨의 작품을 읽으려면 그녀의 독창적 인식을 파악해야 한다. 그 보상은 독특하다. 디킨슨은 우리가 보다 창조적으로 사고하고 우리 안에 깊숙이 주입된 관습들을 단절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인식하게 해 준다.



이 시가 지닌 가장 큰 힘은 비상한 '자립' 정신


그대 떠나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으려니

제 아무리 절대적이어도 나는

그대가 지나 온 길을 바라보려네ㅡ


죽음은 종말이어라,

처음 일어나는 일이라도.

이 순간이여 멈추어라

죽음을 넘어서서


살아 왔음의 의미를

새로이 발견했음은

신이라 할지라도

파괴할 수 없으리니


영원, 추정

그 순간 나는 깨닫는다

그대, 존재였으나

이제 사는 법을 잊었노라ㅡ


"현재의 삶"은 이렇게 되리라

내가 몰랐던 어떤 것ㅡ

거짓된 낙원

그대의 왕국이ㅡ


"미래의 삶"은, 내게,

너무도 소박한 집

내 구원자의 얼굴에서

내가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대 자신의ㅡ


그가 나와 맞바꾸려는

의심 많은 불멸성과

그대의 어두운 얼굴로

그 외의 모든 것을 박탈당한 채


천국과 지옥에 대해 나는 또한

비난의 권리를

이 얼굴을 그의 귀중한 친구와

교환하려는 아무에게나 주고자 하네.


그가 인정하듯 만일 "신이 사랑이라면"

울는 그러함이 틀림없으리라 생각하리라

왜냐하면 그는 "질투심 많은 신"이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듯


그에게 있어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한다면

그가 시인하듯이

그는 결국 우리에게 반환하리라.

우리의 빼앗긴 신들을ㅡ



그녀는 죽어가는 자기 연인에게 그 시를 쓰는 순간 "멈추어라/ 죽음을 넘어서"라고 요구한다. 그녀는 죽음이나 신과 다투는 게 아니라 이제 떠나려는 연인과 다투는 것으로 이어서 상실을 위로하는 전통적인 지혜와 맞서게 된다.


이 위대한 시(「시 1260」)를 큰 소리로 읽으면 디킨슨의 신비로운 힘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설익은 위안을 거부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시가 지닌 가장 큰 힘은 비상한 '자립' 정신에 있다. 이 점에서 디킨슨과 휘트먼의 스승인 에머슨에 필적할 만하다. 파괴적 신의 힘을 넘어서서 마치 찬송가처럼 위의 「시 1260」은 네 줄로 된 10개 연들을 통해 사랑이 찾아 낸 것을 보여주고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


햄릿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말은 세익스피어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뜻


보르헤스가 이야기했듯이 세익스피어는 모든 사람인 동시에 그 누구도 아닌 까닭에 그의 소네트 역시 자전적이면서도 보편적이고 개성적이면서 비개성적이며, 아이러니컬하면서도 열정적이고, 양성애적이면서 동시에 이성애적이고, 상처입었으면서도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더욱 쓸모없는 문학적 도그마, 즉 한 편의 시를 말하는 '나'는 한 인간이기보다는 언제나 가면 혹은 페르소나라는 믿음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에 증장하는 '나'는 극작가이면서 배우인 셰익스피어, 폴스타프, 햄릿, 로잘린드, 이아고, 클레오파트라 등의 인물을 창조한 세익스피어 자신이다. 그의 소네트를 읽으면 우리는 햄릿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어떤 극적인 목소리를 듣게 된다.


햄릿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말은 세익스피어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뜻이다. 아무리 작가라 해도 자신이 완전한 창조물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네트 속의 셰익스피어와 햄릿, 폴스타프 사이에는 유사성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셰익스피어는 자기 모습을 완전하게 느러내지는 않아도 대충이나마 자신을 보여 준다.



이 시의 맹렬한 에너지는 계속되는 욕망과 욕정의 파멸을 예언한다.


「소네트 129」에서 분노는 통제된 열정으로 나타난다. 소네트에 등장하는 이름 없는 거무스름한 여인의 배신을 암시하는 개탄의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황폐한 수치심 속에 소모된 정신은

끓어오르는 육욕의 결과; 그처럼 끓어오르기 전에는

거짓되고, 살인적이며, 잔인한 수치덩어리.

야만적이고, 극렬하며, 무례하고, 잔인하며 믿을 수 없는 것;

즐기자마자 멸시받는 것;

정신없이 쫓다가 잡자마자,

정신없이 미워지는 것, 삼킨 자 더욱 미치게 하려고

일부러 놓아 둔 미끼를 삼킨 것처럼;

쫓을 때도 미친 짓, 얻고 난 후에도 마찬가지;

차지했을 때, 차지하고 있을 때, 차지하려 할 때, 언제나 극렬한 것;

할 때는 황홀경, 하고 난 뒤에는 비애감.

전에는 눈앞의 행복, 후에는 허망한 꿈.

이 세상 사람들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것은

남자를 이 지옥으로 이끄는 천국을 피하는 일.


이 시의 맹렬한 에너지는 계속되는 욕망과 욕정의 파멸을 예언한다. 시에는 등장하는 인물이 없다. 잘생긴 젊은이는 먼 곳에 있고 거무스름한 여인은 암시에 의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 소네트에서는 욕망이 암흑의 정신을 지닌 주인공이자 악당인 셈이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 부분에 지옥에 대한 남자들의 욕망을 묘사하는데, 지옥Hell은 엘리자베스와 자코비언 시대에는 여성의 성기인 '질'을 뜻하는 은어였다.



















존 밀턴(1608∼1674)


밀턴은 우리에게 명상을 요구한다. 그는 학식 있고 암시적이며 심오하다.


사탄은 혼재된 에너지와 활력의 화신이지만 둘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외친다.


"신이여 그대가 악이오!"


우리는 이단적 프로테스탄트의 환상적이고 급진적인 종파에 속했던 밀턴이 교묘하게도 사탄을 영웅적이며ㅡ고전적인 방법이 아닌 셰익스피어적인 방식으로ㅡ동시에 인간적이고 천사적 본성에 대한 저열한 관점을 지닌 교활한 교황주의자로 만들 것을 기대할지 모른다. 이 멋진 사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거대한 과학 소설로 보일지도 모른다. 영화로 만들어진 <실낙원>을 보는 핵심이다. 러시아의 위대한 영화 감독 세르게이 마카일로비치 에이젠스타인은 「실낙원」이 얼마나 예언적인 작품인가에 대해 지적했다. 아주 멋지게 몽타주 기법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나는 『실낙원』을 열정적으로 사랑하지만, 오날날의 시각 정보화 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걱정이 앞선다. 지금 시대는 셰익스피어와 디킨스, 제인 오스틴만이 텔레비전과 영화로의 변화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밀턴은 우리에게 명상을 요구한다. 그는 학식 있고 암시적이며 심오하다.


밀턴의 『실낙원』은 우리 시대의 제임스 조이스와 보르헤스처럼 바로크적 언어의 풍부성과 시각적 명료성을 자극하는 데 도움을 주긴 했지만, 두 개의 특성을 쉽사리 스크린으로 전환시킬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 시대 영화의 희미한 몽타주들은 『실낙원』을 수용하기 힘들 것 같다.


밀턴은 다른 어떤 작가보다도 독자들에게 근본적인 명상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셰익스피어적인 색채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나 제인 오스틴의 작품에서처럼 인식 가능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디킨스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기괴함을 나타내지도 않는다.


그 인물들은 신이나 천사, 이상화된 사람, 예를 들면 아담, 이브, 삼손 등이다. 이곳에는 가장 인상적인 모습의 사탄이 있다. 사탄은 지옥의 불타는 호수에서 깨어나 겁먹고 상처입은 추종자들에 둘러 싸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탄은 그들과 더불어 천국의 전쟁에서 그리스도에게 패했다.


밀턴의 그리스도는 마치 패튼 장군처럼 장갑차로 무장한 천사 군단을 이끌고 현대 이스라엘군의 머카바 전차라고 할 수 있을 아버지 하느님의 불타는 전차에 올라 불과 분노로 반역의 찬사들을 심연으로 몰아넣었다. 불 붙은 그들이 바닥에 떨어지면 그 충격으로 지옥이 더 불타올라 혼돈의 영역으로 변한다.


만일 독자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사탄과 파멸한 그의 군단과 함께 눈을 뜨면 어떤 느낌이겠는가?



그대가 혹 그라면 ㅡ 아 그러나 어찌 떨어졌느냐.

어찌 변했느냐! 행복한 광명의 세계에서

그대는 찬란한 섬광의 옷을 떨쳐 빛났거늘.

만일 그라면 일찍이 서로 손을 잡아 생각과 뜻을 한데 묶어

한 희망과 모험 속에서 영광의 큰 계획을

일찍이 함께 나누었건만 지금은 비참한 재난이

똑같은 파멸로 우리를 함께 묶어 놓았구려.

어느 구렁으로 어느 높이에서 그대 떨어졌는지를 그대는 안다.

그토록 그는 천둥을 가지고

자기의 위력을 보여 주었다. 그러기 전에야 그의 흉한

무기의 힘을 뉘 알리오? 그렇다고 그 때문에

아니 또는 강대한 승리자가 노하여 달리

또 벌을 가할 것 같기에 내가 뉘우침도 아니오.

또 겉모양은 변했을망정 이내 굳은 마음

내 상한 공적 때문에 드높은 모욕의 뜻은 더욱 변하지 않았도다.

이런 뜻 있어 내 감히 전능자와 힘을

겨루었고 무섭게 힘을 겨루어 싸우기에

수없이 많은 정령의 군세가 무장을 갖추어

합세했으니 이들 역시 그의 지배를 싫어하고 나를 따라

반항의 위력으로 그의 지상의 세력을 거슬러

하늘의 벌판에서 승산 모를 전화를 일으켜

그의 옥좌를 흔들었도다. 그렇거늘 패전인들 어떠리?

모두를 잃은 건 아니로다 ㅡ 난공불락의 의지.

불타오르는 복수심에, 식을 줄 모르는 증오,

또 여기 굴하지도 넘어가지도 않는 용기가 있도다.

그 무엇에도 결코 정복되어지지 않을.

이 영예는 그의 분노도 또 위력도 감히

내게서 빼앗지 못하리. 애걸하여 무릎을 꿇고

엎드려 은사를 빌다니, 조금 전에는 이 팔의 위력으로

그의 지상의 권세마저 위태롭게 했던

그의 힘을 우러러보다니 ㅡ 참으로 비루할진저.

이는 이 추락의 수모보다도 더 수치스럽고

또 창피한 일. 원래가 신들의 세력과 영적인

본질은 멸하지 않음이 운명 아닌가.

또 이 거창한 대사의 경험을 통해 배운 바 있도다.

즉 우리가 무력에 뒤지지 않고 또 선견에도 앞섰기에

다시금 성공의 희망을 걸고 결의할 수 있는 것은

힘이나 또는 속임수로 영원한 전쟁을 걸어

위대한 적에게 결전의 판가름을 할진저.

그는 지금 승리에 취하여, 기쁨을 가누지 못하고

하늘의 독재를 도맡아서 행세하고 있는 모양.


(나의 코멘트)


이 시의 앞부분을 찾아보기 위해 밀턴의『실낙원』을 펼쳐 봤다. 내가 가진 책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후에 팔레스타인에서 바알세붑(블레셋 사람의 신)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그자에게, 하느님의 적장, 하늘에서 사탄이라고 불리는 자, 대견스러이 무서운 침묵을 깨뜨리고 이렇게 지껄이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헤럴드 블룸이 인용한 시구절은『실낙원』의 주인공인 '사탄'이 방금 하늘에서 '감히 당신께 싸움을 걸어온 그를 불붙여 무서운 타락과 파멸을 가하여 바닥 없는 지옥으로 거꾸로 내던진' 직후에, 쫒겨난 사탄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나서 부하 장군에게 말을 붙이는 장면인 셈이다.



우리가 밀턴의 진정한 독자라면


그의 장엄한 화법 중 최상의 것들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또 여기 굴하지도 넘어가지도 않는 용기가 있도다.

그러니 무엇인들 극복하지 못할 것인가?


다시 말해 비록 전투에는 패했지만 여전히 용기는 남아 있으므로 굴복을 인정하지 않는 한 문제가 될 게 무엇인가? 만일 우리가 밀턴이 그려낸 신의 지지자라면 사탄의 영웅주의를 절대 부정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밀턴의 진정한 독자라면 아마도 그것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밀턴 스스로도 사탄이 "허풍스럽게 떠벌리고 있다"는 말을 했지만, 또한 그 배교의 천사가 고통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사탄의 "상한 공작"이라는 표현은 이아고보다 더 비웃음을 살 일은 아니다. 사탄은 이아고가 가진 천재성은 없지만 보다 큰 범주에서 볼 때, 그는 장군 한 사람이 아닌 인류 전체를 파괴하려 했다.


앞서 이야기한 대로 『실낙원』을 보다 완벽하게 이해하려면 독자들에게는 명사잉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실행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는 대단히 슬픈 일이며 엄청난 문화적 상실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왜 어렵고 현학적인 시를 읽는가? 단지 역사적 측면에서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단테가 가톨릭의 중심 예언자였던 반면에, 밀턴은 신교의 주요 시인이다.


오늘날 미국은 우리의 문화, 감각, 심지어 종교까지 많은 면에서 탈신교적인데, 이것들은 명료한 신교 정신에 대한 인식이 없으면 이해할 수 없다. 바로 이 신교 정신이 『실낙원』에서 극치를 이룬다. 의욕적인 독자라면 어렵더라도 진지하게 이 위대한 시를 읽어보기 바란다.


















윌리엄 워즈워스(1770∼1850)


시의 숭고성은 독자가 쉬운 즐거움을 버리고 어려운 즐거움을 택하도록 설득하는 경험


시를 제대로 읽으려면 인내와 이해가 필요한 한편, 아울러 즐거움의 훈련도 필요하다. 워즈워스의 제자라 할 수 있는 셸리는 "시의 숭고성은 독자가 쉬운 즐거움을 버리고 어려운 즐거움을 택하도록 설득하는 경험"이라고 정의했다. 최상의 시와 단편 및 장편소설, 희곡을 읽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텔레비전이나 영화, 비디오게임 등 시각 매체가 제공하는 의미들보다 훨씬 어려운 즐거움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볼 때, 셸리의 정의는 커다란 중요성을 갖고 있다.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1772∼1834)


셰익스피어의 이아고나 밀턴의 사탄이 늙은 수부의 조상


콜리지 이전의 문학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이아고나 밀턴의 사탄이 늙은 수부의 조상이라 할 만하다. 콜리지와 카프카 사이에는 포우의 핌, 멜빌의 에이허브, 도스토예프스키의 스비드리가일로프와 스타브로긴 등이 있다.


콜리지의 이 놀라운 웅변적 발라드가 이유 없는 범죄를 다룬 서구의 문학적 전통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카프카 이후에는 앙드레 지드, 알베르 카뮈, 보르헤스 등의 작가들을 들 수 있다. 내 생각과는 다르지만 콜리지는 이아고의 행위를 "동기 없는 악행"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늙은 수부가 탄 배는 폭풍에 밀려서 남극 쪽으로 가다가 얼어붙은 바다에 갇히게 된다. 그때 거대한 바닷새 알바트로스가 그들을 구출하러 오고 선원들은 환호하며 새에게 먹이를 던져 준다. 마술과도 같이 얼음이 갈라지고 선원들은 구조된다.


온순한 알바트로스가 배를 뒤따라오는데, 늙은 수부는 아무 이유 없이 석궁을 쏴서 은혜의 새를 죽이고 만다. 이후 수부와 선원들은 지옥의 고통 속을 헤매게 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요약은 예술적 독창성으로 가득한 이 작품의 시적 중요성을 훼손할 뿐이다.


















시_요약


시를 암송하는 일은 매우 즐겁고 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현대 시인들 중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하트 크레인을 좋아한다. 그는 서른두 살에 카리브 해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원래 의도하지는 않은 듯한데 죽음에 대한 그의 시 가운데 자기 연민으로 가득 찬 「무너진 탑」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시의 한 연은 내가 열 살이 된 그해 이후 거의 60년 동안 매일같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나는 무너진 세계 속으로 들어갔다.

환영 속의 사랑하는 친구들을 찾으러, 그 목소리

잠시 바람 속에서 (어디로 불어가는지 나는 모른다)

잠시 동안 매 순간의 필사적인 선택을 취하고자.


이 시는 놀라운 미학적 품위를 지녔다. 크레인이 자신의 위대한 마법의 힘으로 우리를 주문 속에 가두었기 때문인데, 이는 시가 지닌 분명한 힘의 하나다. 무너진 세계로 들어선다는 것은 자아의 창조이며 하나의 탄생을 의미한다.


그래서 크레인은 평생 동안 사랑하는 친구들을 추적하고 묘사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크레인에게 그 환영 속의 친구들은 블레이크이고 셸리였으며 키츠였다. ……


크레인의 시는 다른 어떤 시보다도 암송할 때 그 비밀과 가치를 잘 깨달을 수 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시를 암송하는 일은 매우 즐겁고 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기억 속에 붙잡아 둠으로써 시가 우리를 소유하고 우리가 시를 더욱 가까이 하여 읽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시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며, 또 우리에게 주는 보상이기도 하다.


크레인의 시를 처음 읽으면 아름다운 소리와 리듬이 몰려드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내용을 이해하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다.


「무너진 탑」혹은 「시:브룩클린 다리에게」를 반복해서 읽으면 우리는 그 시를 영원히 소유하게 된다. 나는 끊임없이 시를 암송하면서 시가 나를, 내가 시를 소유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그로써 삶에 도움을 얻은 많은 사람을 알고 있다. 에밀리 디킨슨도 우리에게 그런 도움을 주는 시인이다. 그녀의 지적인 독창성은 독자들의 내부에 깊이 침투된 상투적인 반응들로부터 절연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셰익스피어의 사도다.



일종의 폭력


휘트먼의 전성기 작품을 읽으면 우리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시는 그 최상의 상태에서 우리에게 소설에서는 시도되거나 성취될 수 없는 일종의 폭력을 가한다. 낭만주의 시인들의 경우는 이것을 시의 적절한 작용으로 이해했다. 즉 놀라게 함으로써 우리를 죽음과 같은 잠에서 깨워 삶에 대한 더 큰 깨달음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시를 읽고 또 읽어야 하는 이유로 이보다 더 큰 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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