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자들은 텍스트를 읽는 입장이라는 데 따르는 굉장한 힘을 깨닫고 그런 특권을 열광적으로 지키려 들었음에 틀림없다. 오만방자하게도 대부분의 메소포타미아 필사자들은 텍스트 말미를 이런 간기로 장식하곤 했다. "현명한 사람들이 현명한 사람들을 교육하도록 하자. 무식한 사람들은 볼 줄도 모를 테니까" 라고. 이집트에서는 B.C. 2300년경인 19대 왕조에 어느 필사자가 자신의 일을 찬양하는 노래를 이렇게 적었다.
필사자가 되려므나! 이 말을 그대 가슴에 각인하라.
그대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
두루마리는 돌새김보다 훌륭하느니라.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먼지가 되고,
그의 사람들도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니.
사람을 기억하게 하는 것은 책이니라
그를 읽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 * *
(밑줄긋기)
01_단편소설
이반 세르게비치 투르게네프(1818∼1883)
허구적 인물의 네 가지 유형
셰익스피어와 단테를 사랑했던 투르게네프는 모든 인류를 '햄릿형'과 '돈 키호테형'으로 나누었다. 존 폴스타프(셰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희극적 인물)나 산초 판자(『돈 키호테』에 나오는 인물)까지 포함한다면 허구적 인물의 네 가지 유형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과 운명의 취약성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왜 「베진 초원」을 읽는가? 우리의 현실과 운명의 취약성을 잘 이해하고, 투르게네프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솜씨, 겉으로 드러나는 그의 초연함 등을 미학적으로 음미하기 위해서 읽는다. 그의 글에 아이러니가 있다면 그것은 풍경이나 아이들, 사냥꾼 자신만큼이나 순수한 운명에 대해서일 것이다.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1860∼1904)
체호프와 톨스토이에 대한 가장 훌륭한 평론
지금까지 내가 읽은 글 중에서 체호프와 톨스토이에 대한 가장 훌륭한 평론은 막심 고리키의 『회상들』에 나온다:
"체호프가 있는 곳에서는 누구나 단순해지고 진실해지며 보다 더 본연의 자신이 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욕망을 느끼게 된다."
왜 최고의 작품만을 읽어야 하는가
나는 내면적 삶의 기록이 알려진 모든 작가 가운데 체호프와 베케트가 가장 친절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내면적 삶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그의 희곡을 읽으면 셰익스피어가 체호프, 베케트와 더불어 세 번째 친절한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폴스타프, 햄릿, 로잘린드(셰익스피어의 『좋으실 대로』에 등장하는 인물)라는 인물들을 창조한 셰익스피어는 더욱 본연의 나 자신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게 한다. 이것이 우리가 독서를 해야 하는 이유며, 왜 최고의 작품만을 읽어야 하는가를 말해 준다.
체호프의 위대한 힘
고리키는 체호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체호프는 평범의 바다에서 비극적 유머를 드러냈다."
체호프의 위대한 힘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의 작품을 읽는 동안 일상적 불행과 비극적 환희가 끊임없이 혼재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진실을 느끼게 해 준다. 셰익스피어는 비극적 환희라는 점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만, 그의 익살맞은 패러디와 소극에서조차 체호프의 평범함을 찾아 볼 수 없다.
기 드 모파상(1850∼1893)
평범함을 표현하는 법
체호프는 모파상으로부터 평범함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모파상은 평범한 표현을 포함한 모든 것을 구스타프 플로베르에게서 배웠다. 하지만 모파상은 이야기꾼으로서 체호프나 투르게네프의 천재성에 비할 바는 못 된다.
모파상은 대단히 '인기 있는' 작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파상은 대단히 '인기 있는' 작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오 헨리보다도 뛰어나며 혐오스러운 인기 작가 애드거 앨런 포우도 그에 비견될 만한 작가가 못 된다. 대중에게 인기 있는 작가가 되는 것은 그 자체로도 괄목할 만한 성취다. 오늘날 미국에는 그런 작가조차 없는 실정이니까.
쇼펜하우어의 렌즈
모파상은 플로베르로부터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이른바 '긴 인내가 재능이다'라는 사실을 배웠다.
모파상은 독자들이 그가 없었으면 보지 못했을 무언가를 보게 해주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셰익스피어나 체호프의 천재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또한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많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모파상 역시 모든 것을 '생의 의지'로 주장하는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다. 쇼펜하우어의 렌즈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안경과 거의 비슷하게 모든 것을 확대 왜곡시킨다.
왜 모파상의 작품을 읽는가?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독자를 사로잡을 줄 안다. 그리고 독자는 그의 목소리를 충분히 받아들인다. 절대 다수는 아니겠지만 그의 작품은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특히 모파상보다 훨씬 탁월하고 미묘한 글을 쓰는 작가들이 전해 주는 난해한 즐거움의 기초가 되고 있다.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1899∼1961)
헤밍웨이는 작품에서 가장 야심적일 때 셰익스피어적이었다.
헤밍웨이는 작품에서 가장 야심적일 때 셰익스피어적이었다. 이는 작가의 자전적 작품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잘 드러난다. 헤밍웨이는 이 작품의 주인공인 실패한 작가 해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너무 많이 사랑했기에 너무 많은 것들을 요구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탕진하고 말았다."
이는 헤밍웨이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경애하는 '리어 왕'에 대한 뛰어난 비평적 언급일지도 모른다. 헤밍웨이는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킬리만자로의 눈」이라는 짧은 글에서 비극을 시도해서 그 뜻을 달성했다. 행위의 묘사보다는 죽어가는 한 인간에 대한 명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헤밍웨이의 가장 강렬한 자기 응징으로, 내 생각엔 그러한 양식에 경도되었던 체호프도 감명받았으리라 여겨진다.
「킬리만자로의 눈」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만일 '표범의 시체'를 ㅡ상실되었지만 아직 조금은 남아 있는 ㅡ해리의 작가로서의 야심 혹은 미학적 이상과 동일시한다면, 이는 헤밍웨이의 작품을 거짓 감상했거나 괴기스러운 것으로 비하하는 것이다. 「노인과 바다」에서는 헤밍웨이가 그런 오류를 범했지만 「킬리만자로의 눈」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플래너리 오코너(1925∼1964)
"작가가 아닌, 이야기를 믿으라."
뛰어난 단편소설 작가 D.H.로렌스는 간결한 단 한 줄로 독자들에게 영원한 지혜를 제공했다.
"작가가 아닌, 이야기를 믿으라."
내가 볼 때 이 말은 헤밍웨이 이래 미국 작가들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작가로 평가되는 플래너리 오코너의 작품을 읽는 근본적인 원리라고 생각한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1889∼1977)
에머슨의 '투명한 눈동자'
나보코프의 「베인 가의 자매들」은 짧지만 에머슨의 '투명한 눈동자'*와 콜리지의 '폴록에서 온 사람'* 등에 대한 문학적 암시로 가득 차 있다. 또한 강령술 모임에 나타난 듯한 오스카 와일드, 톨스토이의 생생한 체현들, 그리고 문학적 괴팍스러움의 일반화된 기분을 엿볼 수 있다.
* 에머슨의 저서 「자연」중 '나는 투명한 눈동자가 된다. 나는 무無다. 나는 모든 것을 본다. 우주의 존재의 흐름이 내 몸 속을 순환한다"라는 문장에 나오는 말.
* 콜리지의 대표적인 시 「쿠불라 칸」의 구성을 방해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
문학의 살아 있는 미로
보르헤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그에 앞섰던 모든 작가들의 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교훈이 된다. 그것이 보르헤스를 체호프와 비교할 때 재미나 계몽적인 면을 감소시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보르헤스를 매우 다른 존재로 부각시킨다. 보르헤스에게 셰익스피어는 전부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문학의 살아 있는 미로다.
체호프는 셰익스피어를 강박적일 정도로 햄릿의 작가로 인식한다. 그리고 왕자 햄릿은 체호프가 항해하는 배다. 체호프의 이름으로 출반된 최초의 단편 「바다에서」처럼 말이다. 보르헤스의 상대론은 절대적이며 체호프의 상대론은 조건적이다.
체호프와 그의 제자들에 매료된 독자는 이야기에 대한 개인적 관계를 누리지만, 보르헤스는 독자를 매혹시켜 비개성적인 영역으로 이끈다. 여기에서 셰익스피어의 추억은 거대한 심연이고 독자들이 이야기에 빠지면 남아 있던 자아의 전부를 상실하게 된다.
이탈로 칼비노(1923∼1985)
우리가 왜 책을 읽고 어떠한 방법으로 읽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1974년 윌리엄 위버가 번역한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을 제대로 평가한다면 우리가 왜 책을 읽고 어떠한 방법으로 읽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은 마르코 폴로가 이야기꾼으로 등장해 중국 원나라의 시조 쿠빌라이 칸 앞에서 이야기를 해 나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상상의 도시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각각의 이야기는 불과 한두 페이비밖에 안 되잠,ㄴ 체호프적은 아니라도 보르헤스나 카프카적인 면에서는 단편소설이라 할 만하다.
마르코 폴로가 말하는 도시들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할 수 없는 곳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자들은 원한다면 그곳을 여행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 나오는 열한 개의 집단은 한 곳에 있는 게 아니라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다. 추억, 욕망, 신호, 눈, 이름, 죽은 자, 하늘의 도시, 얇은 도시, 무역 도시, 연속의 도시, 숨은 도시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 모두를 마음에 담으려면 혼란스럽겠지만 도시 하나하나가 실제 같은 장소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지도에 노선을 그릴 수 없거나 착륙 날짜를 정할 수 없기 때문
쿠빌라이와 마르코 폴로 사이의 마지막 대화는 이렇다:
쿠빌라이가 약속의 땅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또한 뉴 아틀란티스, 유토피아, 태양의 도시, 뉴 하모니 그리고 다른 모든 구원의 땅들에 대해서는 왜 언급하지 않는가 묻는다. 마르코 폴로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러한 땅들에 대해서는 지도에 노선을 그릴 수 없거나 착륙 날짜를 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황제는 지도를 뒤적이다가 바빌론, 야후랜드, 용감한 신세계 등 '악몽과 저주'의 도시들을 발견한다. 절망에 빠진 늙은 황제는 결국 항해의 끝은 '지옥의 도시'일 뿐이라는 허무감을 드러낸다. 쿠빌라이의 이 마지막 한탄은 마르코 폴로에게 전해지지만 그는 독자들을 향해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우리는 "삶의 지옥"에 빠져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미 그것을 받아들이고 의식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더 나은 길은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이탈로 칼비노의 작가적 지혜다:
"(…)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이 아닌 자는 누구이며 무엇인가를 인식하고자 노력하고 그것들을 지속적으로 만들며 그것들에 공간을 제공한다."
칼비노의 충고는 우리가 책을 어떻게 읽고 왜 읽는가에 대해 다시 한 번 말해 주고 있다: 주의하라, 그리고 선善의 가능성을 이해하고 인식하며 그것이 지속될 수 있게 하고 우리의 삶에 그것들에 대한 공간을 제공하라.
단편소설_요약
전통적으로 희곡은 행위를 모방하지만 단편은 그렇지 않다.
훌륭한 단편은 반복해서 여러 번 읽을수록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다. 헨리 제임스는 단편을 "시가 끝나고 현실이 시작되는 미묘한 지점"에 위치한다고 말했다. 결국 단편소설은 시와 장편소설 중간에 있으며, 등장 인물은 헨리 제임스의 말대로 "매력적이고 특별하지만, 또한 인식 가능할 만큼 일반적"이다. 전통적으로 희곡은 행위를 모방하지만 단편은 그렇지 않다.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미국 작가라 할 수 있는 유도라 웰티는 어디에선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D.H.로렌스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들의 언어를 서로 대화처럼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대신 분수처럼 뿜어 내고 달처럼 빛을 뿌리며 바다처럼 몰려온다. 그리고 심술궂은 바위처럼 침묵한다."
체호프는 진실을 추구하고, 카프카-보르헤스는 전도된 진실을 추구하기 때문
왜 단편소설을 읽으며 또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마치고자 한다.
체호프-헤밍웨이적 양식과 보르헤스적 양식은 어느 쪽이 더 낫다고 판단할 수 없다. 독자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 전자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며, 후자는 현실을 넘어서 보이는 세계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갈증을 느끼는가를 가르쳐 준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가지 양식에 대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체호프는 진실을 추구하고, 카프카-보르헤스는 전도된 진실을 추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