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젊은 시절에 소설과 시를 즐겨 읽는 경향이 있다. 왜? 이런 장르는 열다섯 살과 쉰다섯 살 사이에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문제인 사랑을 많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중년에 접어든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점점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도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기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게 되고, 어떤 통찰을 얻지 않을까 싶어서 그 사촌격인 역사와 철학도 뒤적거리게 된다.
- 마이클 더다, 『고전 읽기의 즐거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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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머슨의 글은 '곡진하게 체험하지 않으면' 쉽사리 와 닿지 않는 문장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그만큼 독자들로부터 쉽사리 외면받기도 쉽다. 그의 책을 세 권이나 읽어도 가슴에 탁 와닿지 않는 문장들을 도대체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평생독서계획』을 쓴 클리프턴 패디먼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에게는 격찬을 퍼부었지만(가령 "소로는 살아생전에는 자기 자신을 상대로 무수히 많은 독백을 했다. 그러나 사후에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상대로 말하고 있다. 어쩌면 수억 명의 사람들을 상대로 호소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에머슨에겐 좀 더 냉혹한 평가를 내리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와 소로우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 가는 동안, 그의 친구인 에머슨의 영향력은 감소하고 있다. 객관적인 사실을 더 대담하고 더 확실하게 파악한 소로우는 이제 기다란 그림자를 던진다. 에머슨의 특징은 다음 셋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그는 허풍과 반복에도 불구하고 19세기의 핵심적 미국 사상가들 중 한 사람이었다. 둘째, 영구히 미국적인 것으로 굳어진 태도를 형성한 사람이다. 셋째, 작가로서 좋은 글을 쓸 때에는 힘과 재치와 생기와 신선함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특히 그는 영어 경구의 대가였다. 이런 특징 때문에 우리는 그의 글을 읽는다. 하지만 그의 글을 너무 많이 읽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때때로 그는 독창적 아이디어가 아니라 번드레한 말만 늘어놓고, 또 자신이 다루는 방대한 자료들을 잘 조직하거나 압축하지 못한다.(235쪽)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독서계획』, <69. 랄프 왈도 에머슨> 중에서
그런데 좀 더 알고 보면 소로우는 에머슨에 비하면 여러모로 불쌍한(?) 사람이었다. 에머슨과는 한 동네에 살았고, 같은 대학을 나온 선후배 사이였지만 나이도 열네 살이나 어렸고 처지도 한참이나 달랐다. 소로우의 집은 가난해서 매 학기마다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걱정할 처지였고, 소로우는 학창 시절 내내 푸른 코트 한 벌로 지낼 정도였다. 거기에 비하면 에머슨은 대저택에 하인들까지 여럿 두고 살 정도로 형편이 몹시 넉넉했다.
그렇지만 에머슨에게도 '아픔'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는 꽃다운 나이의 아내를 폐결핵으로 잃었고, 정신질환을 앓던 동생도 잃었고, 2년 후에는 막내 동생도 잃었고, 재혼 후에 얻은 첫 아들은 성홍렬로 잃었다. 그런 '경험'들이 <경험>이라는 에세이에 담겨 있는 것이다. 뼈에 사무치는 슬픔이 담담한 붓끝에서 뚝뚝 떨어져 흘러내린 듯한 문장들을 겉만 훑으며 빠르게 지나쳐 읽는 사람들이 그의 글을 충분히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다고 해서 나무랄 수도 없는 노릇이다.
1832년 3월 29일 에머슨은 1년 2개월 전에 죽은 아내 엘렌 터커의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열어보았다. 그 동안 19세의 어린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간 아내의 무덤을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찾았지만, 그는 아내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일기에서 여전히 아내에게 말을 건네고 시를 써보내고 그녀를 위하여 기도를 드렸다. 그들이 결혼하였을 때, 엘렌은 시인을 꿈꾸는 아름답고 총명한 18세의 소녀였고 그는 카턴 마더 일가가 개척한 유서 깊은 보스턴 제2교회에서 시무하는 장래가 촉망되는 27세의 목사였다. 신혼의 꿈에 젖을 사이도 없이 이내 악화되기 시작한 엘렌의 폐결핵은 그들의 결혼 생활을 불과 1년 6개월 만에 마감케 하였던 것이다. ……
죽음은 에머슨의 삶의 길목에 숨어 있는 복병과 같은 것이었다. 엘렌의 죽음은 그 복병이 기습 공격을 시작한 것일 뿐이었다. 엘렌과의 사별의 충격에서 겨우 벗어난 1834년, 에머슨은 이번에는 바로 손아래 동생인 에드워드를 폐결핵으로 잃는다. 이어 1년 반 뒤인 1836년에는 뛰어난 재능으로 주위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에머슨도 수월성의 한 기준으로 삼아 아끼고 사랑하였던 막내동생 찰스마저 폐결핵으로 쓰러진다.(216∼217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신문수 옮김,『자연』, <역자 해설, 초월주의자의 길> 중에서 -
에머슨의 〈경험〉은 그나마 다른 수필들에 비하면 훨씬 이해하기 쉬운 편이다. 우리도 충분히 공감할 만한 내용들이 제법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바위처럼 단단하거나 암초처럼 전모를 헤아리기 어려운 문장들도 수두룩하다. 가령 다음의 문장을 처음 읽는 사람들은 이 대목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좋은지 잠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인생은 염주처럼 기분들의 연속이다. 우리가 그 기분들을 하나씩 겪어나갈 때, 그들은 그 자신의 색깔로 세상을 칠하는 다채색 렌즈라는 것을 드러낸다. 기분은 각기 초점에 잡힌 것만을 현시하기 때문이다.(175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신문수 옮김,『자연』, <경험> 중에서
이 대목을 다른 책에서는 이렇게 번역해 놓았다.
인생이란 한 줄에 꿰인 염주와 같은 마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연속인 것이다. 우리가 이들을 하나하나 통과하며 지나갈 때, 이들은 모두 각기 독특한 빛깔로 세상을 물들이고, 각기 자기의 초점 속에 들어오는 것만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형형색색의 만화경의 렌즈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47쪽)
- 랄프 왈도 에머슨, 이창기 편역, 『자신감』, <경험> 중에서
두 권의 책에서 똑같은 구절을 '다른 번역'으로 읽어 봤지만 여전히 뭔가 아리송하기만 하다. 손아귀에 단단히 붙들리는 것이라곤 거의 없다. 아무리 움켜쥐더라도 자꾸만 모래알처럼 스르르 빠져나가는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을 더 받기 쉽다. 이 문장들 속에 담긴 함의를 나는 엉뚱한 책에서 기어이 찾아냈다. 이미 절판된 책이어서 구할 수도 없었는데 마침 동네 도서관에서 발견한 책 속에 그 구절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인생이란 유리구슬을 꿰듯 여러 감정mood을 줄줄이 엮어가는 것이다. 살면서 느끼게 되는 감정은 저마다 그만의 색조로 세상을 비추고 그만의 초점으로 세상을 보여주는 다채로운 빛깔의 렌즈와 같다. 우리는 구슬을 꿰듯 그 갖가지 감정들을 하나씩 통과해 간다.
에머슨의 에세이 <경험>에 나오는 글귀다. 그해 봄 일기에 이 에세이를 써내려가던 에머슨은 아들을 잃은 비통한 심정에 젖어 있었다. 전적으로 '정직하게만' 인생을 묘사하기로 맘먹고 예전과는 완전히 딴판인 그림을 그려나갔다. 곡진하게 체험하면 어떤 확신을 갖게 되듯이, 인생무상의 세계관으로 삶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전나무의 나뭇가지에 감겨 있듯, 죽음은 살아가는 동안 매순간 우리 눈가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둥둥 떠다니다 차츰 흐릿해지고 만다."
그는 아무 의문을 품지 않고 삶을 그냥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만족할 만한 인생이 찾아온다고 씁쓸하게 결론지었다.(117쪽)
- 하몬 스미스 지음, 서보명 옮김, 『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 <에머슨 가족의 한 사람이 되다> 중에서
에머슨의 '경험'은 <보상을 생각해 본다>에도 여기저기에 깊이 배어 있다. 그 에세이의 마지막 대목에서 에머슨의 쓰라린 아픔들을 짚어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재난의 보상은 또한 오랜 시일이 지난 뒤엔 인간의 이해력에도 뚜렷이 알려진다. 질병 · 상해 · 잔혹한 실망, 재산 손실 · 벗의 사별 등이 그때에는 보상되지 않는, 그리고 보상될 수 없는 손실로 생각된다. 그러나 어김없는 세월은, 모든 사실의 밑바닥에 깔린 깊은 구제의 힘을 드러내 보인다. 친한 친구 · 아내 · 형제 · 애인의 죽음은 다만 상실로만 생각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자기의 안내자나 보호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이러한 재앙이 흔히 우리의 생활양상에 혁명으로 작용하고, 바야흐로 끝나려고 하고, 유년 또는 청년의 한 시기에 종지부를 찍고, 종래의 직업 · 가정 · 생활방식 따위를 버리고, 인격의 발전에 한층 편리한 새로운 것을 형성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새로운 지기(知己)를 만들고, 다음에 닥쳐 오는 세월에 가장 긴요한 새로운 세력을 받아들이도록 내버려 두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강요한다. 이리하여 담이 쓰러지고 정원사가 돌보지 않아서 멀리 뿌리를 뻗을 여지도 없고, 머리 위에 지나친 햇볕을 받으며, 그저 햇빛 잘 받는 정원꽃이 될 한 남녀가 도리어 숲 속의 보리수가 되어 널리 세상 사람에게 그늘과 과일을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308∼309쪽) ·
- 랄프 왈도 에머슨, 『위인이란 무엇인가/자기신념의 철학』, <보상을 생각해 본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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