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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2 ㅣ 동서문화사 월드북 70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맹은빈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우스꽝스러운 입장
한편, 황제 시종들의 뒤편에서는 장군과 원수들 사이에서 나직한 음성으로 소곤소곤 걱정스러운 상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대표단을 맞으러 간 사람들이 돌아와서 모스크바는 텅 비어 있고, 주민은 모두 나가버렸다고 알려온 것이다. 상의하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은 파랗게 질리고 불안에 싸여 있었다. 그들을 겁먹게 한 것은, 주민이 모스크바를 포기했다는 것이 아니었다. (이 일이 제아무리 중대하게 느껴졌다고 해도). 그것은 바로, 황제 폐하를 프랑스어로 ‘우스꽝스러운 입장’이라고 불리는 무서운 입장에 세우지 않고 어떻게 이 사실을 전할 것인가, 그가 이토록 오랫동안 헛되이 귀족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 술 취한 사람은 있어도 그 이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리면 좋은가 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하여간 누가 되었든 대표단 비슷한 것을 긁어모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 의견에 반대하여, 신중하게 잘 황제에게 마음을 준비하게 해서 진실을 말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198-1199쪽)
여왕벌이 없는 벌집
그러나 모스크바는 텅 비어 있었다. 거기에는 아직, 이제까지 있었던 시민의 50분의 1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죽어가는 벌집이 텅 비어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여왕벌이 없는 벌집은 이미 생명이 없는 것이지만, 겉으로 보면 그것은 다른 벌집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대낮의 뜨거운 햇살 속에서, 꿀벌들이 생명이 있는 다른 벌통과 마찬가지로, 여왕벌이 없어진 벌집 둘레를 즐거운 듯이 날아다니고 있다. 마찬가지로 멀리에서 꿀 냄새가 풍기고 있고, 꿀벌들이 그 속으로 드나들고 있다. 그러나 좀 더 주의해서 들여다보면, 그 벌집에는 이미 생명이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생명이 있는 벌통은 벌들이 나는 방법이 다르다. 향기도, 날개 소리도 다르다는 데에 양봉가는 놀란다. 병든 벌집 벽을 양봉가가 두들기면 이제까지처럼 순간적이고 일제히 일어나는 반응 대신에, 엉덩이를 움츠리고 날개를 허둥대며 생명력이 있는 공기 소리를 내는 수만 마리 꿀벌의 윙윙 거리는 소리 대신에, 텅 빈 벌집의 여기저기서 둔하게 울리는 제각각의 날개 소리가 날 뿐이다. 벌집 입구에서는 이제까지처럼 알코올 성분을 머금은 향기로운 꿀과 독소의 냄새가 나지 않고, 벌이 가득 찬 온기(溫氣)도 나오지 않고 꿀 냄새에 공허(空虛)와 부패의 냄새가 섞여 있다. 입구에는 지키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엉덩이를 높이 쳐들어 경보를 울리는 파수벌도 없다, 물이 끓는 소리와 비슷한, 저 완만하고 조용한 소리와 기세 좋게 노동하는 소리는 이제 없고, 고르지 않은 제각각의 무질서한 소음이 들릴 뿐이다. 꿀에 젖은 검고 가느다란 도둑벌이 남몰래 재빨리 벌집 속을 드나들고 있다. 그러한 벌은 쏘지도 않고 위험해지면 도망가 버린다. 이제까지는 반드시 꿀벌이 먹이를 가지고 들어왔다가 빈손으로 나갔는데, 지금은 먹이를 가진 벌이 나간다. 양봉가는 아래 뚜껑을 열고 벌집 밑 부분을 들여다본다. 이제까지처럼 검게 살찐 벌들이 서로 다리를 붙잡고 끊임없이 일하는 소리를 내면서 밀랍을 내며, 축축한 벌집 밑바닥까지 가지처럼 늘어져 있는 대신에, 마르고 졸린 듯한 벌이 벌집 바닥이나 벽을 정처없이 여기저기 헤매고 있다. 깨끗하게 아교를 촘촘히 바르고 날개로 깨끗이 쓸어낸 바닥 대신에, 밀랍 조각과 벌똥과 다 죽게 되어 발버둥치는 벌들이 완전히 죽은 벌들과 함께 아직 치워지지 않은 채 뒹굴고 있다.(1201-1202쪽)
사태가 본격적이고 역사적인 규모가 되었을 때
그러나 사태가 본격적이고 역사적인 규모가 되었을 때, 프랑스인에 대한 증오를 말로만 표현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전투를 통해서까지도 그 증오를 표현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모스크바의 문제에 관해서 자신이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전 시민이 마치 한 사람의 인간처럼 자기 재산을 내던지고 모스크바에서 나가고, 이 부정적인 행위에 의해서 자기들의 민중 감정의 힘을 남김없이 나타냈을 때ㅡ그때 라스또쁘친이 택한 역할은 갑자기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그는 문득 자신이 고독하고, 무력하고, 우스꽝스럽고, 발밑의 지반을 잃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1216-1217쪽)
폭풍이 일고 바다가 거칠어지고 배 자체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행정관은 누구나 안정된, 동요가 없는 시기에는 자기 지배하에 있는 주민 전체가 자기의 노력만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자기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의식 속에, 자신의 노고와 노력에 대한 최대의 보상을 느끼는 법이다. 위정자나 행정관은 역사의 바다가 잔잔할 동안에는, 불안한 작은 배를 타고 민중이라는 배에 삿대를 짚어 자기쪽이 움직여지고 있는데도, 그가 지탱하고 있는 민중의 배가 그의 힘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 것처럼 느낄 것이다. 이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폭풍이 일고 바다가 거칠어지고 배 자체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이제 그런 착각은 불가능하게 된다. 배는 혼자서 움직이기 시작하고, 삿대는 움직이기 시작한 배까지 닿지 않으며, 위정자는 갑자기 지배자나 힘의 원천이라는 자기 입장에서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약한 인간으로 바뀌고 만다.(1218-1219쪽)
그들은 이미 군대가 아니었다
프랑스 병들은 옷은 찢어지고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서 그 병력도 애초의 3분의 1까지 줄어들기는 했지만 아직은 정연하게 모스크바로 들어왔다. 그들은 극도로 지쳐 있기는 했지만 아직 전투력이 있는 무서운 군대였다. 그러나 그것이 군대였던 것은 이 군대의 병사들이 각기 숙사로 분산할 때까지였다. 각 부대의 병사들이 텅 빈 호화스러운 집으로 흩어지기 시작하자, 영원히 군대는 없어지고 주민도 병사도 아닌, 약탈병이라고 불리는 중간적인 것이 되고 만 것이다. 5주일 후, 같은 사람들이 모스크바에서 나갔을 때, 그들은 이미 군대가 아니었다. 그것은 약탈자의 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 각자가 값이 있거나 필요하다고 여기는 물건을 수레에다 산더미처럼 쌓거나 어깨에 메기도 했다. 모스크바를 나갈 때 그들 누구나가 가지고 있었던 목적은 이전과 같이 싸워서 가지는 것이 아니라, 약탈한 것을 지키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마치 목이 가는 병에 손을 집어넣어 호두를 한 주먹 잔뜩 쥐고, 모처럼 쥔 것을 잃지 않으려고 주먹을 펴지 않아 그 때문에 자신을 망쳐버린 원숭이와 마찬가지로, 모스크바를 나갈 때의 프랑스군은 약탈한 것을 메고 가는 결과로서 분명히 파멸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약탈한 것을 버린다는 것은 원숭이가 호두를 쥔 주먹을 펼 수 없는 것과 같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프랑스군의 각 연대가 모스크바 시내의 어느 구로 진주하여 10분이 지난 후에는, 이제 병사나 장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집들의 창문에는 웃으면서 방 안을 걸어다니는, 제복 코트에 군화를 신은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움과 지하실에서도 이와 같이 사람들이 식료품을 제멋대로 취하고 있었다. 뜰에서는 같은 패들이 헛간과 마구간의 문을 열기도 하고 부수기도 하였다. 부엌에선 불을 피우고, 소매를 걷어 올리고 굽거나 반죽을 하거나 끓였다. 혹은 여자와 아이를 위협하기도 하고, 웃기고 달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이 도처에, 가게에도 집에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군대는 어디에도 없었다.(1231쪽)
마른 땅위에 물을 부으면
물을 마른 땅 위에 부으면 물도 마른 땅도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굶주린 구낻가 풍요한 텅 빈 도시로 들어간 결과, 굶주린 군대는 없어지고 풍요로운 도시도 없어졌다. 그리고 진창이 생기고 화재와 약탈이 일어난 것이다.(1232쪽)
모스크바 화재의 원인
프랑스 사람은 모스크바의 화재를 라스또쁘친[모스크바 방위 책임자]의 광폭한 애국심 탓으로 돌리고, 러시아 사람은 프랑스군의 잔인성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 화재를 한 사람 또는 몇몇 사람의 책임으로 돌리는 뜻이라면 실제로는 그러한 원인은 없었고 또 있을 수도 없었다. 모스크바가 불탄 것은 시내에 130개의 허술한 소화 호스가 있었느냐 없었느냐에 상관 없이, 목조 도시라면 모두 불탈 것이라는 조건하에 놓였기 때문이었다. 모스크바는 주민들이 나가버린 결과 타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은 수일 동안 불똥이 계속 떨어진 산더미 같은 대팻밥이 당연히 타는 것과 마찬가지로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집에 주인이 있고 경찰이 있어도 여름에는 거의 매일 화재가 있는 목조 도시에서 주민이 없어지고, 파이프 담배를 피워대며, 대심원 광장에서 대심원 의자를 태워서 불을 피우고 하루에 두 번 음식을 취사하는 군대가 있다면 불타지 않을 수가 없었다.(1232-1233쪽)
톨스토이의 진실을 말하는 능력
러시아가 국토의 절반까지 점령당하여 모스크바 시민들도 멀리 여러 현으로 피난가고 민병대가 조국 방위를 위해서 잇달아 궐기했을 때에는, 러시아인은 모두 늙은이나 젊은이나 오직 자기 한 몸을 내던져 조국을 구하거나 또는 조국의 파멸을 한탄하고만 있었을 것이라고, 당시에 살지 않은 우리들은 흔히 그렇게 상상하기 쉽다. 당시의 일을 이야기하거나 묘사한 것은 예외 없이 러시아인의 자기 희생, 조국애, 절망, 슬픔, 영웅적인 활약만을 들추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에게 그렇게 여겨지는 것은, 우리가 지나간 일들 중에서 당시의 일반적인 역사적 관심만을 보고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개인적인 인간적 관심을 보지 않은 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실은 눈앞의 개인적 관심은 일반적 관심보다는 훨씬 중요하므로, 그것에 방해되어 일반적 관심은 결코 느껴지지 않는 (전혀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것이다. 당시 사람들의 태반은 전반적인 사태의 행방에는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고, 다만 눈앞의 개인적인 관심에 지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야말로 당시의 가장 쓸모 있는 활동가였던 것이다.
한편, 전반적인 사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자기 희생이나 영웅적인 행위로 여기에 참가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가장 쓸모 없는 사회의 구성원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거꾸로 보고 있었고, 그들이 유익하다고 생각해서 한 일은 모두 러시아의 마을들을 약탈한 삐에르나 마모노프의 민병대처럼, 또 귀부인들이 천을 풀어서 만들었는데도 부상자들에게까지 도달한 적이 한 번도 없는 붕대용 무명처럼, 실제로는 쓸모없고 부질없는 것들이었다. 똑똑한 체하고 자기 감정을 나타내는 것을 좋아하며 러시아의 현황에 대해 여러 설명을 하고 있던 사람들까지도 자신들도 모르게 자기 말 속에, 겉치레나 거짓말, 또는 아무런 책임이 있을 리가 없는 일로 책망 받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쓸데없는 비난이나 증오를 나타내고 있었다. 지혜의 나무 열매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역사상의 사건인 경우에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오직 무의식적인 행위만이 성과를 가져오는 것이며, 역사상의 사건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그 역사적 사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에 그 인간이 그 뜻을 이해하려고 시도한다면, 그것에 아무런 성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놀랄 것이다.
당시 러시아에서 진행되고 있던 사건의 의미는 어떤 인간이 거기에 가깝게 관련되어 있으면 있을 수록 눈에 띄지 않았다. 뻬쩨르부르그나 모스크바로부터 멀리 떨어진 현청 소재지에서는 귀부인들이나 민병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러시아와 수도의 비운을 탄식하고 자기 희생 등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스크바 밖으로 퇴각하는 군대에서는 거의 모스크바 이야기를 하거나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고, 모스크바의 화재를 봐도 누구 한 사람 프랑스군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다음 달 분의 봉급과, 다음 숙영지와, 주보(酒保) 마나님 여자 마뜨료쉬까 등을 생각할 뿐이었다. (1289-12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