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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2 ㅣ 동서문화사 월드북 70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맹은빈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안간힘
1812년에 프랑스군이 괴멸한 원인은 무엇이었던가. 우리는 지금 그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괴멸한 원인은 겨울철 원정 준비도 없이 여름이 끝나갈 무렵에 러시아 안쪽 깊숙이 침입했다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러시아의 모든 도시를 불태워 러시아 민중에게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게 한 전쟁의 성격에 있었다는 것은 아무도 반론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최고의 지휘관에 의해 통솔된 세계 최고의 80만 군대가 경험이 없는 지휘관들에 의해 통솔된, 반밖에 되지 않는 러시아군과 충돌해서 괴멸할 가능성이 있었다고 한다면, 이러한 경과를 밟지 않으면 안 되었으리라는 것을(지금은 명백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누구 한 사람 꿰뚫어본 사람이 없었다. 누구 한 사람 꿰뚫어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군 쪽에서 한 모든 노력을 러시아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방해하는 방향으로만 나아갔고, 프랑스군 쪽에서는 나폴레옹의 풍부한 경험과 이른바 군사적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그 노력은 모두 여름이 끝날 무렵 모스크바까지 전선을 연장시키기 위해, 그야말로 자신을 틀림없이 멸망시키게 되는 일을 하는 데에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945쪽)
우리는 보리가 필요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들어주시겠습니까? 우리는 보리가 필요 없습니다."
"어째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내던지라는 거죠? 싫습니다, 정말 싫습니다……. 찬성할 수 없습니다. 아가씨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가세요, 혼자 떠나가시란 말입니다. 혼자서……." 군중 속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시 이 군중의 모든 얼굴에는 같은 표정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확실히 호기심과 감사의 표정이 아니라, 적의에 찬 결의의 빛이 있었다.(1007쪽)
(…)
"찬성할 수 없습니다. 적이 빼앗으려면 빼앗으라지! 당신 보리 같은 것은 필요없습니다. 찬성할 수 없습니다!"
마리야는 다시 군중 속에서 누군가의 시선을 잡으려고 애썼지만, 그녀에게 집중되고 있는 시선은 하나도 없었다. 어느 눈도 분명히 그녀를 피하고 있었다. 그녀는 쑥스럽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봐, 제법 설교를 잘 하고 있군 그래. 자기를 따라와서 노예가 되라는 거야. 집을 버리고 노예가 되라는 거야! 어이가 없군. 보리를 준다지 않아!" 군중 속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1007-1008쪽)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어떻게 해서 셰바르지노와 보로지노 부근에서 전투가 시작되어 여기에 응전했는가? 무엇 때문에 보로지노 전투가 있었는가? 이 전투는 프랑스군이나 러시아군에 아무런 뜻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이 전투의 직접적인 결과로 생긴 일, 또 당연히 생겨야 했던 일은, 러시아군에는 모스크바의 파멸이 가까워졌다는 것(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던 일)이고, 프랑스군에는 전군의 파멸이 가까워졌다는 것(이것도 그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이와 같은 결과는 그 당시 이미 너무나 명백했는데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이 전투를 걸어왔고, 꾸뚜조프는 여기에 응전했던 것이다.
만일 쌍방의 사령관이 이성적인 이유에 따라서 행동을 했더라면, 2000㎞나 깊이 들어와서 전군의 4분의 1을 잃을 공산이 큰 전투를 벌인다면 틀림없이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쯤은 나폴레옹도 명백히 알았을 것이다. 또 싸움에 응해서, 역시 전군의 4분의 1을 잃을지 모를 모험을 감행한다면 틀림없이 모스크바를 잃게 된다는 것도 명백했을 것이다. 꾸뚜조프에게 이것은 수학적으로 명백한 일로, 그것은 마치 장기를 둘 때 내 쪽 말이 상대방보다 하나 적은데도 서로 빼앗기를 하면 반드시 진다, 따라서 빼앗기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 명백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상대방의 말이 열여섯 개이고 이쪽이 열네 개라면 이쪽은 상대방보다 8분의 1이 약할 뿐이지만, 만약 열세 개의 말을 서로 빼앗아 버린다면 상대방은 이쪽보다 세 배나 강해지는 것이다.
보로지노 전투가 있기 전까지 아군과 프랑스군의 병력은 거의 5대 6이었지만, 전투 후에는 1대 2가 되고 말았다. 즉 전투 전에는 10만 대 12만이었던 것이, 전투 후에는 5만 대 10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현명하고 경험이 풍부한 꾸뚜조프가 전투에 응했던 것이다. 한편 천재적인 지휘관이라고 일컬어지는 나폴레옹은 전쟁을 걸어 군의 4분의 1을 잃고, 게다가 더욱 자군의 전선을 확대해 가면서 도전했다. (⋯)
보로지노의 전투를 걸고 이 전투에 응함으로써 꾸뚜조프와 나폴레옹은 자기의 의지에 의하지 않고 무의미한 행동을 하였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세계 여러 사건의 의지를 갖지 않은 도구 중에서 가장 노예적이고 자유 의사가 없는 사람들인 지휘관들의 선견지명이나 천재성을 증명하는 증거를 교묘하게 날조하여, 이미 생긴 사실에 그것을 후에 적용시키고 있다.(1041-1042쪽)
우리는 여전히 익숙하지 못하다
고대 사람들은 영웅 서사시의 전형(典型)을 우리에게 남겼다. 그 속에서 영웅이 역사의 모든 흥미를 형성하고 있다. 그 때문에 현대의 인간적인 시대에 이런 종류의 역사는 뜻을 갖지 않는다는 것에 우리는 여전히 익숙하지 못하다.(1042쪽)
집단에서는 반대로 두 번째 소리에 따른다
적이 모스크바로 가까이 옴에 따라, 자기들의 상황에 대한 모스크바 시민들의 생각은 심각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반대로 닥쳐오는 큰 위험을 눈앞에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항상 볼 수 있는 것처럼 한층 경박(輕薄)해지고 말았다. 위험이 닥치면 반드시 두 가지 목소리가 다 같이 강하게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들리는 법이다. 한쪽 목소리는 위험의 성격 그 자체와 그것을 피하는 수단을 잘 생각하라고 실로 이치에 맞는 말을 한다. 다른 한쪽 목소리는 모든 것을 예견하고 전체의 흐름에서 빠져나오기란 인간의 힘에 겨운 일이고, 위험이 닥쳐온다는 것을 생각하기란 괴롭고 쓰라린 일이므로, 따라서 괴로운 일이 닥쳐올 때까지 그것으로부터 딴 데로 눈을 돌리고 즐거운 일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한층 더 이치에 닿는 말을 한다. 혼자의 경우에는 인간은 대체로 첫 번째 소리에 따르지만, 집단에서는 반대로 두 번째 소리에 따른다. 지금 모스크바의 주민들의 경우가 그러했다. 이때처럼 모스크바에서 사람들이 즐겼던 일은 오랫동안 없었다.(1030-1031쪽)
인생 전체가
내일의 전투를 위한 명령은 이미 내려졌고, 그는 이미 그것을 받고 있었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더할 나위 없이 단순명쾌하고 그 때문에 무서운 생각이 그에게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는 내일의 전투가 이제까지 자기가 참가한 어느 전투보다도, 틀림없이 가장 무서운 것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난생 처음으로 실생활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또 그것이 남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생각도 없이 다만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 영혼에 대한 것으로 생생하고 거의 의심할 여지없이 노골적으로 무섭게 떠오른 것이었다. 이제까지자기를 괴롭히고 붙잡고 있었던 모든 것이 이 상상의 절정에서 갑자기 차가운 백일(白日)에 노출되어, 그림자도 원근도 윤곽의 구별도 없어지고 말았다. 인생 전체가 이제까지 오랫동안 렌즈를 통해서 인공적인 조명 아래에서 보고 있던 환등처럼 그에게는 느껴졌다. 지금 그는 갑자기 렌즈를 통하지 않고, 밝은 대낮의 광선 밑에서 조잡하게 마구 그려진 그림을 본 것이다. '그렇다, 그렇다. 이것이 내 마음을 흔들고 기쁘게 하고 괴롭현던 환상인 것이다.' 그는 자기 인생의 환등의 주요 장면을 하나하나 회상하고는, 지금은 그것을 죽음에 관한 명백한 생각이라고 하는 밝은 낮의 햇볕에 대고 바라보면서 마음 속으로 말했다. '이거다, 조잡하게 그린 바로 이 그림인 것이다. 무엇인가 훌륭하고 신비스럽게 여겨졌던 것은 명예, 공공의 복지, 여자에 대한 사랑, 조국 그 자체였다. 이러한 영상이 나에게는 실로 위대하게 여겨졌었다. 실로 깊은 뜻에 차 있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그리고 나를 위해 밝아오기 시작하는, 아니 밝아오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아침의 차가운 백일을 받으면 그것은 모두 매우 단순하고, 퇴색하고, 조잡한 것이다.' 그의 인생의 세 가지 큰 슬픔이 특히 그의 마음에 걸렸다. 여자에 대한 사랑, 아버지의 죽음, 러시아의 반을 빼앗은 프랑스의 침공. '사랑!…… 신비스러운 힘에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나에게 여겨졌던 그 아가씨. 용케도 내가 그런 아가씨를 좋아하게 됐던 거야! 나는 사랑과 그녀와의 행복에 대해서 여러 가지 로맨틱한 계획을 세웠었다. 참 귀여운 철부지다!' 그는 증오스러운 듯이 입 밖으로 외마디 소리를 냈다. '용케도, 나는 내가 없는 만 1년 동안 나를 위해 그녀가 틀림없이 정절을 지켜줄 것이라고, 무엇인가 이상적인 사랑의 힘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 속에 나오는 상냥한 작은 비둘기처럼, 그 아이는 나와 헤어져 있는 동안에 야위었어야 했어. 그러나 이런 일은 모두 훨씬 단순하다…… 이런 일은 모두 무서우리만치 단순하고 추잡한 일이다!'(1063-1064쪽)
(나의 생각)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스며든 대목이자, 결국 작가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안드레이를 통해 작가의 내면을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 충분히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드는 '아주 인상깊은'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