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2 동서문화사 월드북 70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맹은빈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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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성과 본성에 위배되는 사건

 

1811년 말부터 서유럽의 군비 강화와 병력 집중이 시작되었다. 러시아의 병력도 이해부터 자국의 국경으로 집결되었고, 1812년에는 서구의 병력 수백만이(군대를 수송하거나 식량을 공급하는 사람도 포함해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러시아의 국경을 향해 이동하였다. 6월 12일, 서유럽의 병력이 러시아의 국경을 넘어옴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인간의 이성과 본성에 위배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서로 수많은 죄악과 기만, 배반과 절도, 위조 지폐 발행, 약탈, 방화와 살인을 자행하였다. 세계의 모든 재판 기록이 여러 세기가 걸려도 모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죄악을 범했으나, 그 시대에 그것을 저지른 자들은 그것을 범죄로 여기지 않았다.(837쪽)



역사의 소유물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개인적인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 자유를 행사하고 자기를 위해 살고 있으며, 자기는 지금 이러이러한 행동을 하거나 또는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마음 속으로 느끼고 있다. 그런데 그 인간이 그것을 행하면 곧, 시간의 흐름이 있는 일정한 시점(時點)에서 행하여진 그 행위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고, 그것은 역사의 소유물이 된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미리 정해진 뜻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841쪽)


 

역사의 노예


인간은 의식적으로는 자신을 위해서 살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 전 인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도구의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행하여진 행위는 되돌아오지 않고, 인간의 행위는 시간 속에서 다른 인간들의 무수한 행위와 결부되어 역사적인 뜻을 얻는다. 어느 인간이 사회의 상하관계에서 높은 위치에 있으면 있을수록, 많은 사람과의 관계를 가지면 가질수록 그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더욱 큰 권력을 가지게 되고, 그 일거일동이 미리 결정되고 필연적이라는 것이 더욱 명백해진다.


'황제의 마음은 오직 하느님의 손에 있다.'


황제는 바로 역사의 노예인 것이다.


역사, 즉 인류의 무의식적, 전체적, 군집적 삶은 황제들 생활의 온갖 순간을 모두 자기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자기를 위해 이용한다.(841-842쪽)


(나의 생각)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읽히는 대목이다. 이 소설의 많은 대목들에서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발견하지만 이 대목만큼 명백하면서도 직접적으로 표현된 대목은 드물다. 그만큼 인상적이다.

 

 

사건의 이름을 나타내는 한 라벨

 

사과는 익으면 떨어진다. 왜 떨어지는가? 지면을 향해 인력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인가, 꼭지가 말랐기 때문인가, 태양을 쬐어 건조되고 무거워지고 바람에 흔들리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으면 밑에 서 있는 사내아이가 그것을 먹고 싶기 때문인가?

 

그 어느 것도 원인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온갖 종류의 삶의, 유기적이며 불가항력적인 사건이 생기기 위한 여러 조건의 일치, 바로 그것인 것이다. 그리고 섬유소의 분해나 그 밖의 원인으로 사과가 떨어진다고 보는 식물학자는, 자기가 먹고 싶어서 떨어지도록 빌었기 때문에 떨어졌다고 말하는 나무 밑의 소년과 마찬가지로 옳고, 또 마찬가지로 잘못되어 있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로 향한 것은 그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며 그가 참패한 것은 알렉산드르가 그 멸망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수천만 톤의 산이 무너진 것은 마지막 노동자 한 사람이 곡괭이로 산 밑에 마지막 일격을 가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옳기도 하고 옳지 않기도 하다. 역사상의 사건에서 이른바 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그 사건의 이름을 나타내는 한 라벨에 지나지 않으며, 그와 마찬가지로 사건 그 자체와는 가장 관계가 적다.

 

자신들에게는 자유라고 여겨지는 그들 행동 하나하나가 역사적인 의미에서는 부자유이며, 역사의 과정 전체와의 관련 속에 있으며 영원한 옛날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843쪽)



‘사람을 파멸시키려면ㅡ그 이성을 빼앗아라(라틴어 격언)’(847쪽)



사람들과 자신감

 

쁘플은 절망적이며 변하지 않아 순교적일 정도로 자신(自信)을 가진 사람으로, 그러한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은 독일 사람뿐이었다. 왜냐하면 추상적 관념ㅡ학문, 즉 완전한 진리를 알고 있다는 환상을 바탕으로 자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독일인뿐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사람이 자신을 가지는 것은, 자기 자신이 머리나 몸으로 남성이나 여성을 꼼짝 못하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국 사람이 자신을 갖는 것은, 자기는 세계에서 가장 정비된 나라의 국민이며 따라서 영국 사람에 어울리게 자기가 할 일을 항상 알고 있고, 영국 사람으로서 자기가 하는 일은 모두 틀림없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사람이 자신을 갖는 것은 흥분하여 자신도 남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러시아 사람이 자신을 갖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무엇인가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완전히 알 수 있다고는 믿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 사람의 자신은 그 가운데에서 가장 나쁘고, 가장 강하기도 하면서 가장 추잡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독일인은 진리나 학문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진리는 자기 자신이 생각해 낸 것으로 자기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기 때문이다.(885-886쪽)

 


천재론이 그럴듯하게 날조되었다는 것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쁜가 하는 것은 일이 일어났을 때 비로소 명백해진다. 그러면서도 왜 모두가 군사적 천재라고 말하는 것일까? 때를 놓치지 않고 건빵을 가져다 주는 일이나, 어떤 자는 우로 어떤 자는 좌로 가라고 명령하는 인간이 과연 천재일까? 다만 군인이 화려함과 권력에 올라앉아 있기에, 저속한 속인들이 권력에 아첨하여, 원래 있지도 않은 천재라는 성질을 덧붙인 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장군들은 얼빠지고 멍청한 사람이다. 가장 훌륭한 것은 바그라찌온이다. 나폴레옹까지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그 나폴레옹 자신은 어떤가! 나는 아우스터리츠의 들판에서 자만심에 가득 찬, 답답한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 훌륭한 지휘관에게는 천재나 그 어떤 특별한 장점은 필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장 고상한 인간적인 자질, 즉 사랑, 시정(詩情), 상냥함, 철학적이고 탐구심이 풍부한 회의 등이 결여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뛰어난 사령관은 시야가 좁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확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그렇지 않으면 그는 견딜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용감한 지휘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그가 보통 인간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고 동정하고,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옳지 않은가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큰일이다. 그들이 권력이기 때문에 옛적부터 그들을 위해서 천재론이 그럴듯하게 날조되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전쟁의 승리에 기여하는 것은 이 친구들이 아니라, 대열 속에서 "당했다", 또는 "우라" 하고 외치는 인간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대열에서만 비로소 나는 쓸모가 있다고 하는 신념을 가지고 군무에 종사할 수가 있는 것이다!'891쪽)

 


전쟁 이야기를 할 때에는

 

니꼴라이는 아우스터리츠 싸움과 1807년의 전쟁을 겪어왔기 때문에, 전쟁 이야기를 할 때에는 자기가 그 이야기를 할 때 거짓말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자신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둘째로 그는 충분한 경험을 쌓고 있었으므로, 싸움터에서는 모든 일이 우리가 상상하거나 이야기할 수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895쪽)

 


어린이를 위로해 주는 것

 

그들이 유익하고 필요하며 없어서는 안 되었던 것은, 그들이 환자와 환자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정신적 요구를 만족시켜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을 때 맛보는, 편해지고 싶다는 영원불변의 인간적 욕구, 즉 동정을 받고 싶다, 무엇인가를 받고 싶다는 욕구를 채워주고 있었다. 그들은 저 영원불변의 인간적인 욕구ㅡ가장 원초적인 형태로 어린이에게서 볼 수 있는ㅡ인, 타박상을 입은 곳을 어루만져주기를 바라는 욕구를 채워주고 있었다. 어린이는 어딘가를 부딪치면 아픈 곳에 키스를 받거나 어루만져 주기를 바라고 곧 어머니와 유모에게로 달려간다. 그리고 아픈 곳을 어루만지거나 키스를 해주면 어린이는 편해진다. 어린이는 자기보다 강한, 지혜가 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아픔을 줄어들게 해주는 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등은 믿지 않는다. 편해질 것이라는 기대와 어머니가 혹을 쓰다듬어 줄 때의 동정의 표시가 어린이를 위로해 주는 것이다.(907쪽)

 


항상 변하지 않는 운명

 

알렉산드르 황제가 모든 교섭을 거부한 것은, 자기가 개인적으로 모욕을 당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바르끌라이 드 똘리가 그 이상 없을 정도로 훌륭하게 군을 통치하려고 노력한 것은 자기 의무를 다하고, 위대한 지휘관이라는 명성을 획득하기 위해서였다. 니꼴라이가 말을 달려 프랑스군을 공격한 것은, 평탄한 광야를 말로 달리고 싶은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전쟁에 참가한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개인적인 성질이나 습관, 조건, 목적에 따라서 행동한 것이다.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 그것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두려워하고, 허영을 구하고, 기뻐하고, 분개하고, 생각을 궁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은 모든 사람이 자유 의사가 없는 역사의 도구였으며, 그 사람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이해가 되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행동하고 있는 사람의 항상 변하지 않는 운명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 사회 안에서 높은 지위에 있을수록 자유는 적다.(944쪽)

 

(나의 생각)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가 『대중의 반역』에서 말했던 '거대한 갑옷' 이야기가 떠오른다.


우리는 풍요로운 세계에서 태어난 인생이, 결핍과 투쟁의 와중에 있는 인생보다 더 낫고 더 우수하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판단에는 매우 엄밀하고 근본적인 이유들이 있긴 하지만 지금 그것을 거론할 때는 아니다. 여기서는 그 이유들을 열거하는 대신, 모든 세습귀족의 비극에 등장하는 언제나 되풀이되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귀족이 뭔가를 상속한다는 것은 자신이 창조하지 않은, 따라서 자신의 개인적인 삶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지 않은 인생 조건들을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태어나면서 졸지에 영문도 모른 채 부와 특권을 소유한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그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래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 부와 특권은 다른 사람, 다른 인간, 곧 그의 조상이 남긴 거대한 갑옷이다. 그래서 그는 상속자로 살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다른 사람의 갑옷을 걸쳐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걸까? 세습 '귀족'은 자신의 삶을 사는 걸까, 아니면 선조 귀족의 삶을 사는 걸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그는 타인의 삶을 재현해야 하며, 따라서 타인도 자신도 아닌 운명을 짊어진 것이다. 그의 삶은 불가피하게 진정성을 상실하고 순전히 다른 삶을 재현하거나 꾸미는 것으로 변화한다. 그가 관리해야 할 과다한 재산은 자신의 개인적인 운명을 살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그의 삶을 위축시킨다. 모든 삶은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싸움이며 노력이다. 인생을 살아가며 부딪치는 어려움은 나의 활동과 능력을 일깨워 활용하게 해준다. 만일 대기가 내게 압력을 가하지 않는다면 내 몸은 이리저리 떠다니는 흐물흐물한 유령처럼 느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습 '귀족'의 인격은 삶의 노력과 활용 부족으로 점차 모호해진다. 그 결과 옛 귀족 가문 특유의 어리석음만이 남는다. 이는 아직까지 아무도 그 내부의 비극적 메커니즘 - 모든 세습귀족을 어쩔 수 없이 퇴보하게 만드는 - 을 그려낸 적이 없는 어리석음이다.(135쪽)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대중의 반역』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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