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1 동서문화사 월드북 6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맹은빈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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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의 이도, 한 올의 머리카락도 없이 다 빠져버린 뒤에야

 

삐에르는 모스크바에서 유유히 여생을 보내고 있는, 수백 명이나 되는 퇴직 시종관 중 한 사람이었다.

 

7년 전 그가 외국에서 갓 돌아왔을 때에, 누군가 그에게 당신은 이제 아무 것도 찾거나 생각해낼 필요는 없다, 당신의 나아갈 길은 벌써 굳게 다져져서 영원히 정해져 있다, 아무리 당신이 몸부림치더라도 결국은 그와 동일한 처지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같은 것이 되고 만다고 말했다면 그는 얼마나 달랐으랴. 그런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때로는 러시아에 공화국을 만들려고 열망하기도 하고, 자신이 나폴레옹이 되기를 바랐으며, 때로는 철학자나 나폴레옹을 능가하는 전술가가 되려고 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죄 많은 인류를 다시 태어나게 하거나 자기 자신을 자기 완성의 최고 단게에까지 도달시킬 수가 있다고 보고, 열렬히 그것을 바라고 있던 삐에르가 아니었던가? 학교와 병원을 세우기도 하고, 농민을 해방하려고 한 것도 삐에르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러한 여러 가지 일 대신에 삐에르의 실상은ㅡ부정(不貞)한 아내를 가진 부자 남편이며, 먹거나 마시고, 옷을 풀어헤친 채 때때로 정부를 욕하기를 좋아하는 퇴직 시종관이며, 모스크바의 영국 그룹 회원이고, 모든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모스크바 사교계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그는 현재의 자기가 7년 전에 그토록 깊이 멸시하고 있던 모스크바의 퇴직 시종관 바로 그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을 오랫동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따금 그는 잠시 이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사람이 그저 잠시뿐이라고 하면서, 자기와 마찬가지로 이와 머리카락이 성했을 무렵에 이런 생활과 이 클럽으로 들어왔다가, 한 개의 이도, 한 올의 머리카락도 없이 다 빠져버린 뒤에야 여기서 나갔다는 것을 생각하고 무서운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742-743쪽)

 

 

그러한 문제를 잊기 위해


그는 많은 사람들, 특히 러시아 사람의 불행한 능력을 몸소 맛보고 있었다. 그것은 선과 정의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믿으면서도, 이제 인생에 진지하게 발을 들여놓을 수 있기 위해서는, 너무나도 뚜렷하게 인생의 악과 허위를 꿰뚫어보는 능력이었다. 어떤 일의 분야에서나 그의 눈으로 보자면 악이 허위와 결부되어 있었다. 무엇이 되려고 해도, 무엇을 하려고 해도 악과 허위가 그를 주저하게 만들고 모든 활동의 길을 막아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해결되지 않는 인생 문제에 짓눌려 있는 것은 너무나도 무서웠다. 그래서 그는 다만 그러한 문제를 잊기 위해 마음이 끌리는 일에 무턱대고 열중했다. 그는 모든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많은 술을 퍼마셨고 그림을 사 모으며 새 건물을 지었다. 특히 독서에 빠져들었다.(745쪽)



독서와 술

 

그는 닥치는 대로 무엇이든지 읽고 또 읽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하인이 외투를 갈아입히고 있는 동안에도 책을 들고 읽을 정도였다. 그리고 독서에서 수면, 수면에서 객실이나 클럽에서의 답담, 잡담에서 연회와 여자로, 연회에서 다시 잡담, 독서, 술로 옮겨갔다. 술을 마신다는 것은 그에게는 차차 육체적인 욕구와 동시에 정신적인 욕구가 되기도 하였다. 의사가 그와 같이 비대한 몸에는 술은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몹시 많은 술을 마셨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큰 입에 술을 몇 잔 들이켜 체내에 퍼지는 흐뭇한 따뜻함을 느끼고, 가까운 사람 모두에게 부드러운 애정을 느끼며, 모든 생각에 대해서 그 본질을 깊이 캐 보지 않고 표면적으로 응답하는 마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완전히 좋은 기분이 되는 것이었다. 술을 한두 병 다 마시고 나면 비로소 그는 이제까지 자기를 위협하고 있던, 저 복잡한 무서운 인생의 갈등이 자기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처럼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고 막연히 의식하는 것이었다. 저녁이나 야식 후 머릿속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을 느끼면서 지껄이고, 남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하면 그는 끊임없이 그 얽힘을, 어느 쪽이 되었던 간에 그 얽힘의 일면을 보았다. 그러나 술의 힘을 빌릴 때에 한해서 그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풀어 주겠다. 나는 이미 설명을 준비해 두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다. 나중에 천천히 생각하기로 하자!" 그런데 이 나중이라는 것은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아침이 되어 술이 깨면, 이제까지의 여러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무서운 것으로 여겨져 삐에르는 다급히 책을 손에 들고, 만약 누가 찾아오면 몹시 기뻐하는 것이었다.(745-746쪽)

 


오리가 항상 물에서 살도록 만들어진 것처럼


아나똘리는 자기의 지위와 자기 자신과 남에게 항상 만족하고 있었다. 자기는 지금과는 다른 방법으로는 살 수 없고, 자기는 태어난 이래 이제까지 나쁜 짓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본능적으로 믿고 있었다. 또 자기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자기의 이러저러한 행위가 어떤 결과를 낳게 될 염려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 품성이었다. 그는 마치 오리가 항상 물에서 살도록 만들어진 것처럼, 자기는 당연히 3만 루블의 수입으로 생활하고, 항상 사회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787쪽)


 

당신이 그토록 매혹적이라고 해서

 

아나똘리는 나따샤에게 왈츠를 청했다. 왈츠를 추는 동안에 그녀의 허리와 팔을 껴안고 손을 쥐면서 당신에게 나는 마음을 빼앗겼다고 말하고, 당신을 사랑한다고도 말했다. 나따샤가 또 아나똘리와 함께 춘 에꼬쎄즈 때 단둘이 있게 되자 아나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따샤는 왈츠를 출 때 그가 한 말은 꿈이었나 하고 의심했다. 첫 피겨가 끝나자 그는 다시금 나따샤의 손을 잡았다. 나따샤는 겁먹은 듯한 눈으로 쳐다보았으나 상대방의 상냥한 눈초리와 미소 속에 너무나도 자신에 찬 부드러운 표정이 담겨 있어, 그것을 보고 있으면 해야 할 말도 하지를 못했다. 그녀는 눈을 떨구었다.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나는 약혼 중입니다. 다른 분을 사랑하고 있어요." 그녀는 다급히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남자를 보았다. 아나똘리는 그녀의 말에 당황하거나 낙심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내게 무슨 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그는 말했다. "나는 미치도록, 미치도록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토록 매혹적이라고 해서, 내가 나쁜 것은 아니잖습니까? …… 우리는 이제 시작할 차례입니다."(794쪽)

 

 

그 눈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번쩍번쩍 빛나는 커다란 남성다운 눈이 자기 눈 바로 가까이에 있었으므로, 그녀는 그 눈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따샤?˝ 그의 음성이 물어보듯이 속삭였다. 그리고 누군가 아프도록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나따샤!˝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나는 아무것도 할 말이 없어요.‘ 그녀의 눈은 이렇게 말했다.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 순간, 그녀는 다시 자기가 자유롭게 된 것을 느꼈다.(7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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