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 1 동서문화사 월드북 6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맹은빈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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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지니는 삶 이상의 부질없음

˝아, 자네였나, 젊은이?˝ 그는 말하였다. ˝기분은 어떠시오, 나의 용사?˝

5분 전만 해도 안드레이는 자기를 운반해 준 병사에게 두서너 마디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시선을 골똘히 나폴레옹에게 박은 채 잠자코 있었다…… 그에게는 이 순간, 나폴레옹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모든 관심이 실로 부질없이 여겨지고, 보잘것없는 허영과 승리의 기쁨에 사로잡힌 이 영웅의 모습이, 자기가 보고 이해했던 저 드높고 공평하고 선량한 하늘에 비하면 몹시 시시하게 여겨졌다ㅡ그래서 그는 나폴레옹에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출혈로 인한 쇠약, 고통, 죽음을 가깝게 각오했기 때문에 그의 마음 속에 불러일으켜진 준엄하고 장중하게 구성된 생각에 비하면, 모두가 무익하고 쓸모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안드레이는 나폴레옹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면서, 위대함의 부질없음과 아무도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부질없음에 대해서, 그리고 또 살아 있는 자는 누구 한 사람 그 뜻을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죽음이 지니는 삶 이상의 부질없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403쪽)


한 판만 더


그는 마음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나쁜 짓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내가 누군가를 죽이거나, 모욕하거나, 불행을 바란 일이 있었던가? 어째서 이토록 무서운 불행에 부딪혔을까? 대체 이 불행은 언제 시작됐을까? 조금 전이다. 100루블 벌어서 어머니의 생신 축하를 위해 귀중품 상자라도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갈 작정으로 이 테이블에 다가섰을 때이다. 그때 나는 그토록 행복했고, 자유롭고, 쾌활했었는데! 그러나 나는 그때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몰랐다! 그 행복은 언제 끝났고 이 새로운, 무서운 상태가 언제 시작되었는가? (중략)


˝왜 그러나, 더 안 해? 나는 굉장한 카드를 가지고 있는데.˝ 마치 자기가 가장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게임 그 자체의 즐거움이라는 듯이 말했다.


‘모든 것은 끝났다, 나는 파멸이다!/ 그는 생각했다. ‘이렇게 되었으니 이젠 이마에 총알 한 발ㅡ남은 것은 그것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즐거운 듯한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자, 한 판만 더 하세.˝(467-468쪽)



제각기 자기식으로


˝어쩌면 자네는 자네로서 옳을지도 몰라.˝ 그는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제각기 자기식으로 살아가고 있어. 자네는 자신을 위해서 살아왔고 그 때문에 하마터면 평생을 망칠 뻔했으나, 남을 위해 살려고 했을 때 비로소 행복을 알았다고 말하고 있어. 그런데 나는 그 반대의 경험을 했지. 나는 명예를 위해서 살았어. 명예란 뭔가? 역시 남에 대한 사랑이 아닌가. 남에게 무엇인가 하고 싶다는 마음, 남의 칭찬을 받고 싶다는 마음이 아닌가. 즉 나는 남을 위해서 살아왔고, 하마터면이 아니라 완전히 내 인생을 못쓰게 만들고 말았어. 그리고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게 되면서 마음이 안정되었지.˝(528쪽)



떡갈나무


봄날의 따뜻한 빛을 받으면서 그는 포장마차에 앉아, 지금 막 싹이 트기 시작한 풀, 자작나무의 잎, 맑게 갠 푸르른 하늘을 흘러가는 하얀 초봄의 구름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마냥 즐겁고 부질없이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1년 전에 삐에르와 이야기를 나누던 나루터도 지나갔다. 질퍽질퍽한 마을, 탈곡장, 겨울 보리의 새싹, 다리 근처의 눈이 남은 비탈길, 녹은 눈에 씻긴 진흙의 언덕길, 그루터기만 남은 밭, 군데군데 파릇파릇한 덤불을 지나 길 양쪽에 우거진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섰다. 숲 속은 오히려 더울 정도였고 바람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작나무는 온통 끈적거리는 푸른 새싹으로 덮여 까딱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묵은 낙엽 밑에서는 낙엽을 쳐들고 풀과 엷은 자주색 꽃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자작나무 숲 속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어린 전나무는, 볼품없는 상록으로 겨울을 되새겨주고 있었다. 숲 속에 들어서자 말들은 콧김을 내기 시작하고 눈에 띄게 땀을 흘렸다.


하인 뾰뜨르가 마부에게 무슨 말을 하자 마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뾰뜨르는 마부의 동감만으로는 불만이었던지 마부대에서 주인 쪽을 돌아다보았다.

 

"나리, 정말 마음이 홀가분해집니다!" 그는 공손하게 미소짓고 말했다.


"뭐라고?"


"홀가분합니다, 나리."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안드레이는 생각했다. ‘그렇지, 봄 얘기군, 아마,‘ 그는 사방을 둘러보면서 생각했다. ‘그렇지, 이미 완전히 푸르군…… 참 빠르다! 자작나무도, 체류무하도, 오리나무도 벌써 파래졌어…… 그러나 떡갈나무가 보이지 않는데, 아, 저기 있다. 저게 떡갈나무다!‘


길가에 떡갈나무가 서 있었다. 숲을 이루고 있는 자작나무보다 열 배도 더 연륜이 많은 듯한 이 자작나무는 어느 나무보다도 굵고, 키도 배는 높았다. 그것은 두 아름이나 되는 거대한 떡갈나무로서, 오래 전에 꺾인 듯한 가지와, 역시 상처투성이인 낡은 딱지가 생긴 껍질을 가진 거목이었다. 커다랗고 볼품없는, 고르지 않게 내뻗은 손과 손가락을 가진 이 고목은 마치 화를 잘 내고 남을 깔보는 늙은 추한 인간처럼, 미소짓고 있는 자작나무 사이에 서 있었다. 오직 그만이 봄의 매혹에 몸을 맡기려 하지 않고 봄도, 태양도 보려고 들지 않았다.


‘봄, 사랑, 행복‘ 그 떡갈나무는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희들은 용케도 싫증을 내지 않는구나. 늘 똑같은, 부질없고 무의미한 속임수에 말이야. 봄도, 태양도 행복도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저 봐. 저기 짓눌려 죽은 떡갈나무가 웅크리고 있지 않아? 언제나 같은 모양으로 말이야. 그리고 봐, 꺾여서 껍질이 벗겨진 손가락을 펼치고 있다. 그것이 어디서 나든ㅡ등이건 옆구리건 상관 없어. 솟아나면 난 대로 그대로 서 있다. 너희들의 희망과 속임수에 누가 속을 줄 알고?‘(576-5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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