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인데, 역사상 사건에서 이른바 위대한 인물은 그 의미가 작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실로 비극적이고 방대한 사건들로 넘쳐나며, 우리에게 친근하고 다양한 구전이 아직 생생한 시대를 연구하는 가운데, 나는 역사상 사건의 원인에 우리의 이성적 이해가 미치지 않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1812년에 일어난 여러 사건의 원인이 나폴레옹의 침략 야욕이나 알렉산드르 황제의 애국심 때문이라는 말은 (이는 누구라도 간단히 생각할 수 있는데), 로마제국의 몰락 원인이 이런저런 야만인이 자신의 민족을 서쪽으로 이끌고 온 데다 이러이러한 로마황제의 국가 통치가 나빴기 때문이라든가, 파내려가던 거대한 산이 무너진 것은 노동자가 삽으로 마지막 일격을 가했기 때문이라는 말처럼 무의미하다.

 

수백만 명이 서로 죽이려 들었고, 그 가운데 오십만이 죽은 사건의 원인이 한 사람의 의지일 리 없다. 한 사람이 산을 파서 무너뜨릴 수 없듯이, 한 사람이 오십만 명을 죽게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원인일까? 일부 역사가는 그 원인이 프랑스인의 침략 야욕과 러시아인의 애국심이라고 한다. 또 다른 역사가들은 나폴레옹의 대군이 퍼뜨린 민주적 요소나, 러시아가 유럽과 연대해야 했던 점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도대체 왜 수백만 명이 서로 죽이기 시작하였으며 누가 그들에게 그런 명령을 내렸는가? 이 무의미한 사건의 원인에 대해 과거를 더듬어 무수한 사변(思辨)이 가능하며 그 작업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방대한 양에 이르는 설명과 그 모든 설명이 단 하나의 목적에 맞춰지고 있는 점은, 그 원인이 무수히 많아서 단 하나만 지적할 수 없음을 반증한다.

 

무엇 때문에 수백만 명이 서로를 죽였을까?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그것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악행임을 알면서도 …….

 

그것이 필연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은 가을이 될 무렵의 꿀벌처럼, 혹은 동물의 수컷들처럼 서로를 죽이는 저 자연의 동물학적 법칙을 실현했기 때문이다. 이것 말고는 이 두려운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없다.

 

이것은 명백한 진리로서 모든 사람이 선천적으로 그러하다. 만약 어떤 행위를 할 때마다 자신이 자유롭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또 하나의 감각과 의식이 인간에게 없었다면 이 진리는 증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전체적인 견지에서 역사를 고찰하면, 우리는 다양한 사건의 발생 원인인 태고의 법칙을 의심 없이 확신한다. 그러나 개인적인 견지에서 보면 우리의 믿음은 정반대이다.

 

타인을 죽이는 인간, 네만 강을 건너라고 명령하는 나폴레옹, 직원으로 채용해 달라고 청원하거나 손을 들었다 내렸다 할 때의 당신이나 나 ㅡ 우리는 모두 우리의 행위 하나하나가 이성적인 원인과 자유의지를 기초로 하며 어떤 행동을 할지 우리 나름대로 결정한다고 확신한다. 이 확신은 누구에게나 본질적이고 소중하여, 행위의 부자유성에 관한 확실한 논거나 범죄 통계 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의 자유로운 의식이 모든 행위에 미치게 한다.

 

이 모순은 해결할 수 없을 듯하다. 우리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어떤 행위를 한다고 확신한다. 이 행위를 전 인류의 생활에 참여하는 의미(그 역사적 의이)로 고찰하면 나는 그 행위가 미리 결정되었으며 필연적이었음을 확신한다. 어디에 잘못이 숨어 있을까?

 

발생한 사실에 적합하도록, 존재하지도 않는 수많은 자유로운 사변을 한 순간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억지로 갖다 붙이는 인간의 능력을 심리학적으로 관찰하면(이에 대해 나는 다른 곳에서 더 자세히 설명할 생각이다), 어떤 행위를 할 때의 인간의 자유로운 의식은 잘못되었다는 추측이 확실해진다. 그러나 역시 심리학적 관찰이 증명하는 바에 따르면, 자유로운 의식이 과거로 거슬러 오르는 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의심을 물리치는 다른 종류의 행위가 있다. 나는 의심 없이, 예컨대 유물주의자가 뭐라고 하든, 오직 나에게 관련된 행위라면 당장 그것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의심 없이 내 의지만으로 방금 손을 올리고 내렸다. 나는 당장 글쓰기를 중단할 수 있다. 당신은 지금 즉시 읽기를 중단할 수 있다. 의심 없이 내 의지 만으로 모든 장애를 넘어 지금 즉시 머릿속으로 미국에 갔다가 어떤 수학 문제를 떠올렸다. 나는 자유를 시험하면서 손을 올려 힘껏 우주로 내리쳤다. 나는 정말 그렇게 했다. 그러나 내 옆에 아이가 서 있다. 그 아이의 머리 위로 손을 치켜들어 방금처럼 아이에게 내리치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 아이에게 개가 달려든다. 나는 개를 향해 손을 치켜들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내가 전선에 서 있다면 연대의 움직임에 따를 수밖에 없다. 나는 전쟁터에서 연대와 함께 공격에 나설 수밖에 없고, 모두가 도망칠 때는 나도 도망칠 수밖에 없다. 내가 피고의 변호인으로서 법정에 서 있다면 말을 하지 않거나 내가 떠드는 말을 모르면 안 된다. 무언가가 내 눈앞을 스치면 눈을 깜박이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두 종류의 행위가 있다. 하나는 내 의지의 지배를 받고 다른 하나는 받지 않는다. 그리고 모순을 야기하는 잘못이 생기는 이유는 '자아', 즉 가장 고도로 추상화된 내 존재와 관련된 모든 행위에 당연히 뒤따르는 자유로운 의식이 나와 타인의 자유의지를 일치시키려는 행위에까지 잘못 미치기 때문임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와 부자유의 경계를 밝히기란 심히 어려우며, 그것이 곧 심리학의 본질적이고 유일한 과제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와 부자유의 조건을 관찰해 보면 우리 행위가 추상적일수록, 즉 타인의 행위와 결부되지 않을수록 자유에 가깝고, 반대로 우리의 행위가 타인과 결부되면 결부될수록 부자유에 가까워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도저히 떼어낼 수 없으며 답답하고 부단한 타인과의 결부는 타인에 대한 권력이라 일컬어질 뿐, 그 참된 의미는 단지 타인에게 가장 많이 속박되는 것이다.

 

집필하는 동안 시비를 불문하고 나는 이상과 같은 것을 확신했다. 이에 이 예정된 법칙이 가장 또렷이 나타나는 1807년, 특히 1812년의 역사적인 여러 사건의 묘사에 즈음하여, 사건을 지배하는 듯 보이지만 다른 관련자에 비해 자유로운 인간적 행위를 그다지 보여주지 못한 사람들의 행동에 의의를 부여할 수 없었다. 그들의 행동이 내 흥미를 끈 것은 역사를 지배하는 예정된 법칙의 예증이라는 의미, 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무수한 사변을 공상 속에 만들어내는 심리적 법칙의 예증이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더할 나위 없이 부자유스러운 행위를 하는 인간에게 나는 내 자유를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1714∼1717쪽)

 

 -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에 대한 몇 마디 말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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