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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초상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평점 :
그의 앞에는 한 소녀가 개울 가운데 혼자 서서 가만히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술에 걸려 신기하고 아름다운 바다새의 모습으로 변모한 듯한 소녀였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 길고 가냘픈 다리는 학 다리처럼 연약했고, 한 줄기 녹색 해초가 살갗에 새겨 놓은 징표처럼 붙어 있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순결해 보이기만 했다. 보다 충만하고 부드러운 상앗빛을 띤 허벅지는 엉덩이까지 드러나 있어서 드로워즈의 하얀 가장자리는 부드럽고 하얀 솜털 깃으로 장식되어 있는 듯했다. 대담하게 허리까지 걷어올린 검푸른 색 치마는 비둘기 꼬리처럼 뒤로 내밀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은 새가슴처럼 부드러웠지만 보잘것없었고, 검은 깃의 비둘기 가슴처럼 보잘것없지만 부드러워 보였다. 그러나 그 긴 금발머리는 소녀답게 보였다. 그녀의 얼굴 또한 소녀다웠고 경이로운 인간적 아름다움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혼자 가만히 서서 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자기 앞에 와서 숭배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자 그녀의 눈은 그를 향했고 조용히 그의 응시를 받아들이면서도 부끄러워하거나 경망스러운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실로 오랫동안 그녀는 그의 응시를 받아들이고 있다가 조용히 눈을 떼어 개울물을 내려다보면서 발로 점잖게 몸을 이리저리 헤쳤다. 조용하게 출렁이는 희미한 물소리가 처음으로 정적을 깼다. 나지막하고 흐릿하고 속삭이는 듯한 물소리는 잠결에 듣는 종소리처럼 희미했다. 이리저리, 이리저리 물이 출렁이는 소리. 그러자 그녀의 뺨에서는 어렴풋한 불길이 떨리기 시작했다.
오, 이럴 수가! 독신(瀆神)적인 환희의 폭발 속에서 스티븐의 영혼은 절규했다.
그는 갑자기 그녀에게서 몸을 돌리고 둑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그의 뺨이 화끈거리고 몸은 불덩이 같았으며 사지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그는 멀리 모래밭을 활보하면서 바다를 향해 미친 듯이 노래했고, 그 동안 그를 향해 소리치고 있던 삶이 임박해지자 그것을 맞이하기 위해 외쳤다.
그녀의 이미지는 영원히 그의 영혼 속으로 옮겨갔고, 그가 거룩한 침묵 속에서 느끼던 황홀경을 깨는 언어는 없었다. 살며, 과오를 범하며, 타락해 보고, 승리하고, 삶에서 삶을 재창조하는 거다! 한 야성의 천사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필멸(必滅)의 인간적 젊음과 아름다움을 갖춘 천사요 삶의 아름다운 궁정에서 보내온 사자(使者)인 그가 황홀한 순간에 그를 위해 과오와 영광의 길로 통하는 문을 모두 활짝 열어젖히려 하고 있었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거다! (264-2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