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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초상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평점 :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너에게 거룩한 의도를 밝히시도록 내일 아침에 내가 미사를 올리도록 하겠다』교장이 말했다. 『그런데, 스티븐, 너의 주보성인이신 최초의 순교자께선 하느님에게 아주 유력한 분이란다. 네가 그분께 9일 기도를 올려 하느님께서 네 마음을 계몽하시게 해주마. 하지만 나중에 너에게 성소가 없었음을 알게 된다면 끔찍한 일이 아니겠니, 그러니 우선 성소가 있다는 것부터 먼저 확인하도록 해라. 한번 성직자가 되면 영원히 성직자로 남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라. 교리문답에서도 배웠잖니, 신품(神品)의 성사는 오직 한 번밖에 받을 수 없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 성사가 영혼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정신적 표지를 찍어놓기 때문이니라. 그러니 네가 심사숙고해야 하는 것도 그전이라야지 그 후는 안 된단다. 스티븐, 네 영원한 구제가 달려 있는 문제이므로 엄숙히 다뤄야 하느니라. 하지만 우리는 함께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게 될 것이다』
그는 무거운 홀 문을 열고 이미 신앙 생활의 동료가 된 사람을 대하듯이 손을 내밀었다. 스티븐은 계단 위의 널찍한 공간으로 빠져나와 온화한 저녁 공기가 그를 어루만져 주고 있음을 의식했다. 핀들레이터 교회 쪽으로 네 명의 젊은이들이 서로 팔을 끼고 리더가 연주하는 6각 손풍금의 경쾌한 멜로디에 보조를 맞춰 머리를 흔들며 활보하고 있었다. 갑자기 듣는 음악의 처음 몇 소절이 으레 그렇듯이 그 멜로디도 그의 마음속에 쌓아놓은 환상적인 구조물을 스쳐가면서, 마치 갑작스레 밀려온 물결이 아이들의 모래성을 허물어뜨리듯이, 아무 고통도 주지 않으며 조용히 그 구조물을 허물어뜨렸다. 그 보잘것없는 곡조에 미소를 지으며 그는 눈을 들어 교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 저무는 날을 침울하게 반영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교장의 동료 의식에 맥없이 묵종하고 있던 손을 살그머니 빼냈다.
그가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때 그의 어지러운 자기 성찰을 지워버리는 인상이 있었으니 그것은 학교 출입구에서 저무는 날을 반영하고 있던 어떤 침울한 가면의 인상이었다. 그러자 이 학교 생활의 그늘이 무겁게 그의 의식을 스쳐갔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엄숙하고 질서정연하고 열정이라고는 없는 삶이요 물질적 걱정도 없는 삶이었다. 그는 수련원에서 첫날 저녁을 어떻게 보내게 될 것이며, 기숙사에서의 첫 아침에 잠이 깨면 얼마나 불안할 것인지 궁금했다. 클롱고우스 학교의 긴 복도 냄새가 그에게 다시 괴롭게 회상되었고 불타는 가스등의 조용한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 자기 존재의 모든 부분에서 한꺼번에 솟은 불안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이어 열에 들뜬 맥박이 점점 빨라졌고, 아무 의미도 없는 말들이 소움이 되어 그의 정돈된 생각들을 여기저기로 어지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마치 덥고 습하고 몸에 해로운 공기를 마시고 있는 것처럼 그의 허파는 늘어났다 오므라들었다 했다. 그리고 클롱고우스의 목욕탕 속에서 맥빠진 토탄 빛깔의 물 위에 감돌던 그 덥고 습한 공기를 다시 한번 냄새 맡는 기분이었다.
이런 것들을 기억하자 교육이나 신심보다도 더 강한 본능이 잠에서 깨어났고, 그가 그런 생활에 가까이 가려고 할 때마다 그의 마음속에 미묘한 적대적 본능을 발동시키면서 묵종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 생활의 냉기와 질서가 그에게 혐오감을 주었다. 그는 추운 아침에 일어나서 다른 수련자들과 함께 줄을 지어 새벽 미사에 나가서 기도함으로써 뱃속의 허기를 극복하려고 헛되이 노력하고 있을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학교 공동체 구성원들과 함께 식사하고 있을 자신의 모습도 보았다. 그렇다면 낯선 집에서 먹거나 마시는 일을 꺼리는 그의 뿌리 깊은 수줍음은 도대체 어떻게 되어버렸을 것인가? 또 어떤 질서 속에서도 자기야말로 다른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존재라고 생각하게 하던 그 오만한 정신은 또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예수회 소속 신부 스티븐 디덜러스.
그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그 자신의 이름 글자들이 눈앞에 튀어 올랐고 뒤이어 확실한 윤곽도 없는 얼굴과 얼굴 색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그 색은 흐려졌다가 마치 엷은 벽돌 색이 변하면서 이글거리듯이 강렬해졌다. 그게 혹시 겨울 아침에 사제들의 면도한 턱밑 살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그 생경하게 이글거리던 불그레한 색인가? 그 얼굴에는 눈이 없었고, 씁쓸하고 경건한 표정에 분노를 억누르고 있듯 홍조가 감돌기도 했다. 그게 혹시 어떤 애들이 랜턴 조스라 부르고 다른 애들은 폭시 캠블이라 부르던 예수회 사제의 얼굴이 망령처럼 떠오른 것이 아닐까? (247-2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