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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ㅣ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평점 :
나는 디오니소스 신의 마지막 제자이자 정통한 자이다
저 위대한 은둔자가 가지고 있는 심정의 천재, 유혹하는 자인 신이며, 천성적인 양심의 유혹자, 그의 소리는 모든 영혼의 지하세계에까지 내려갈 수 있으며, 그가 던지는 말 한마디, 눈길 하나에도 유혹의 동기나 저의가 담겨 있지 않은 것이 없다. 그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대가의 실력에 속한다. ㅡ 이것은 그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더욱더 그에게 가까이 오도록 강요하기 위한, 더욱 내면적으로 철저하게 그를 따르도록 하기 위한, 강제 이상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 ㅡ 심정의 천재, 그는 시끄럽고 자만하는 사람들을 모두 침묵하게 만들며 경청하는 법을 가르치고, 거친 영혼을 지닌 자들을 잔잔하게 하고, 마치 깊은 하늘이 그들 위에 모습을 비추는 거울처럼 고요하게 누워 있고자 하는 새로운 갈망을 그들에게 맛보게 한다 ㅡ . 심정의 천재는 우둔하고 성급한 손에 망설이는 법을 가르치고 좀더 우아하게 붙잡는 법을 가르친다. 그는 감추어지고 잊혀진 보물을, 선의와 달콤한 정신성의 물방울을 흐리고 두꺼운 얼음 밑에서 찾아내며, 오랫동안 여러 가지 진흙이나 모래의 감옥 속에 파묻혀 있었던 모든 황금의 알을 찾는 마법의 지팡이다. 이 심정의 천재와 접촉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좀더 풍요로워져가는데, 이는 은혜를 받거나 놀라서도 아니고, 마치 미지의 재물에서 혜택을 입거나 억눌려서가 아니다. 오히려 억지로 열리게 되고,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 캐내게 하며, 아마 더욱 불확실하게 되어 더욱 부드럽고 깨지기 쉽고 부서진 것이 되었으나, 아직 이름도 없는 희망에 부풀고 새로운 의지와 흐름에 넘치고 새로운 불만과 역류에 넘쳐 자신에 대해 좀더 풍요로워지고, 그전보다 더 새로워지게 된다 …… 그러나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의 친구들이여? 나는 누구에 대해 그대들에게 말하고 있는가? 내가 그대들에게 한번도 그의 이름을 말한 적이 없을 정도로 스스로를 잊어버렸단 말인가? 그대들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칭찬받기를 원하는 이 의심스러운 정신이나 신이 누구인지 이미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면 말이다. 즉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돌아다니며 낯선 고장에 살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처럼, 나 역시 희귀하고 위험한 많은 정신과 부딪쳐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방금 말했던 정신과 부딪혔던 것이다. 이 정신은 언제나 다시 나타나는 바로 디오니소스 신이며, 그대들이 알다시피 내가 일찍이 은밀히 경외심을 가지고 내 처녀작을 바쳤던 저 위대한 양의(兩義)적인 신, 유혹자인 신이다. ㅡ 내가 생각하기에는 나야말로 그 신에게 희생을 바쳤던 마지막 인간이었다 : 왜냐하면 내가 그 당시에 했던 일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나는 이러한 신의 철학에 관해 많은 것을, 너무나도 많은 것을 배웠으며, 이것은 이미 말했듯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ㅡ 나는 디오니소스 신의 마지막 제자이자 정통한 자이다 : 나는 기어이 한 번쯤 내 친구인 그대들에게, 나에게 허락하는 한, 이 철학을 조금은 맛보게 하는 일을 시작해도 좋을 것이 아닌가? 당연히 반쯤 낮은 목소리로 말이다 : 왜냐하면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여러 가지 은밀한 것, 새로운 것, 낯선 것, 기이한 것, 섬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디오니소스가 철학자이며, 신들도 철학을 한다는 사실은 나에게는 위험이 없지 않으며 아마도 바로 철학자들 사이에서 불신을 일으킬 수도 있는 새로운 것처럼 생각된다. ㅡ 나의 친구 그대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너무 늦게 오게 되거나, 적당한 때 오지 않는다면 몰라도, 이미 저항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 왜냐하면 내게 은밀히 누설했듯이, 그대들은 오늘날 신과 신들에 대해 마지못해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또한 나는 내 이야기를 솔직히 할 때, 그대들 귀의 엄격한 습관에 항상 유쾌하게 울리는 정도를 넘어 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확실히 이미 언급한 신은 이와 같은 대화를 할 때 더 나아가 있으며 훨씬 멀리 나아가 있고, 항상 나보다 먼저 몇 발짝 앞서 있었다 …… 만일 인간의 풍습에 따라 그 신에게 아름답고 장엄한 장식의 명칭과 덕성의 명칭을 붙이는 것이 허용된다면, 나는 그의 탐구자로서의 용기나 발견자로서의 용기를, 그의 대담한 성실성과 진실성, 지혜에 대한 사랑을 대단히 칭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은 이러한 모든 귀한 잡동사니나 장식품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고 있다. "너와 너의 동료들이나, 그 밖에 그것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이러한 것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고 그는 말하고 싶어할 것이다. 나는 ㅡ 내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감출 이유가 없다!" ㅡ 사람들은 이러한 종류의 신이나 철학자에게는 아마 수치심이 없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ㅡ 언젠가 그 신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 "상황에 따라 나는 인간들을 사랑한다 ㅡ 이때 그 신은 그 자리에 있었던 아리아드네Ariadne를 넌지시 암시했다 ㅡ : 나에게 인간이란 지상에서 그와 비견될 만한 것이 없는 유쾌하고 용기 있고 창의적인 동물이다. 이 동물은 어떤 미궁에 있어도 여전히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찾아낸다. 나는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 : 나는 종종 현재의 그보다 어떻게 하면 그를 앞으로 진전시키고 그를 좀더 강하게, 좀더 악하게, 좀더 깊이 있게 만들 것인가를 숙고하곤 한다." ㅡ "좀더 강하고, 악하고, 깊이 있게라고?"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는 다시 한번 말했다. "그렇다. 좀더 강하고 악하고 깊이 있고, 또한 아름답게" ㅡ 그리고 게다가 유혹하는 자인 신은 마치 그가 방금 매혹적인 인사말이라도 한 것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여기에서 동시에 볼 수 있는 것은 이 신에게 없는 것이 수치심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ㅡ . 대체로 몇 가지 점에서 신들도 모두 우리 인간들에게서 배울 수도 있다는 것을 추측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 인간들이 ㅡ 더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9장> 고귀함이란 무엇인가?, 29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