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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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잔인성을 다시 배워야만 하고 눈을 떠야만 한다

 

인간성을 자랑하게 되는 최근의 시대에도 '사납고 잔인한 동물'에 대한 공포와 공포의 미신이 많이 남아 있어, 그것을 극복하게 되었다는 것이 좀더 인간적인 시대의 긍지를 이룬다. 그래서 명백한 진리마저도 저 사납지만, 결국 죽어버린 동물을 도와 다시 소생시킬 수도 있다는 추측 때문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여러 세기 동안 입에 올리지 않은 채 있다. 나는 아마도 그러한 진리가 나에게서 살그머니 빠져나가게 하는 그러한 일을 감행하고자 한다 : 다른 사람들은 그 진리를 다시 잡아, 그것에 '경건한 사유방식이라는 우유'를 충분히 마시게 하고 마침내 조용히 잊혀진 채 그것이 전에 있었던 낡은 구석에 뉘여놓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잔인성을 다시 배워야만 하고 눈을 떠야만 한다. 예를 들어 비극에 관해 고금의 철학자들이 사육해왔던 그러한 뻔뻔하고 비대한 오류가 더 이상 고결한 듯 주제넘은 모습으로 돌아다니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마침내 인내를 저버리는 것을 배워야만 한다. 우리가 '더 높은 문화'라고 부르는 거의 모든 것은 잔인함이 정신화되고 심화된 데 바탕을 둔 것이다. ㅡ 이것이 내 명제이다. '사나운 동물'은 전혀 죽지 않았으며 살아 있고 번성하며, 스스로를 단지 ㅡ 신성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비극이라는 고통스러운 쾌락을 만드는 것은 잔인함이다. 이른바 비극적 동정에서 근본적으로는 심지어 가장 높고 가장 섬세한 형이상학의 전율에 이르기까지 모든 숭고함 속에서 쾌감으로 작용하는 것은, 감미로움을 오직 거기에 혼합되어 있는 잔인함의 요소에서 얹은 것이다. 투기장에서의 로마인, 십자가의 황홀함 속에 있는 그리스도교인, 화형이나 투우를 보고 있는 스페인, 비극으로 돌진하는 오늘날의 일본인, 피비린내 나는 혁명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파리 변두리의 노동자, 의지가 풀린 채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를 '참으면서 보고 있는' 바그너광 여자들 ㅡ 이 모든 이가 즐기고 비밀스러운 욕정에 휩싸여 마시려고 노력하는 것은 '잔인함'이라는 위대한 마녀의 약초술이다. 이 경우 우리는 물론 잔인성이란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어리석은 심리학을 추방해야만 한다 : 자기 자신의 고통, 자기 자신을 스스로 괴롭힌다는 것에도 풍부한, 넘칠 정도의 풍부한 즐거움이 있다. ㅡ 그리고 페니키아인이나 금욕주의자에게서처럼, 오직 인간이 종교적인 의미로서의 자기 부정이나 자기 훼손을 하도록, 또는 일반적으로 관능과 육체를 부정하고 참회하도록, 청교도적인 참회의 발작, 양심의 해부, 파스칼적인 지성을 희생하도록 설득되는 경우 그는 자신의 잔인함에 의해 자기 자신을 향한 저 위험한 잔인성의 전율에 은밀히 유혹되고 앞으로 내몰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인식하는 사람 자신도 정신의 성향에 반하여 그리고 가끔은 자신의 마음에서 원하는 소망에 거슬리면서까지 인식하는 것을ㅡ즉 스스로가 긍정하고 사랑하고 숭배하고 싶어하는데도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을ㅡ스스로의 정신에 강요함으로써 잔인함의 예술가와 변용자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미 그렇게 깊이 철저하게 파고들어 생각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가상과 표면적인 것을 향하고자 하는 정신의 근본 의지에 대한 폭력이며 고통을 주고자 함이다.ㅡ이미 모든 인식의 의욕에는 한 방울의 잔인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7장> 우리의 덕, 제22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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