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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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의 지적 양심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영혼과 그 한계,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도달한 인간의 내적 체험의 범위, 이러한 체험의 높이, 깊이, 넓이, 영혼에 관한 지금까지의 전 역사와 아직 다 고갈되지 않은 가능성 : 이것은 천부적인 심리학자와 '위대한 수렵'을 하는 친구에게는 예정되어 있는 수렵장이다. 그러나 그는 얼마나 자주 절망하며 이렇게 말해야만 하는가? "나는 혼자다. 아, 단지 혼자일 뿐이다. 그런데 이처럼 거대한 숲과 원시림이 있구나!" 그래서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사냥감을 쫓기 위해 그들을 인간 영혼의 역사 안으로 몰아갈 수 있는 수백 명의 몰이꾼들과 예민하게 훈련된 사냥개를 원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헛된 일이다 : 바로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든 것 중에서 몰이꾼과 사냥개를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는 철저하게 쓰디쓰게 되풀이해서 확인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용기, 현명함, 예민함이 필요한 새롭고 위험한 사냥터에 학자를 보내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은 '큰 사냥'이, 그러나 큰 위험도 시작되는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예민한 눈과 코를 상실하게 된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종교적 인간homines religiosi의 영혼 속에서 지와 양심의 문제가 어떤 역사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추측하고 확인하려는 사람은 아마 파스칼의 지적 양심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그만큼 깊고 상처받고 거대해야 할 것이다 : ㅡ 그런 다음에는 위험하고 고통에 찬 체험의 혼란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정리하고 형식화할 수 있게 하는, 밝고 악의에 찬 정신성의 저 드넓게 펼쳐진 하늘이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ㅡ 그러나 누가 나에게 이러한 봉사를 하겠는가? 그러나 그러한 봉사하는 자를 기다릴 만한 시간이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ㅡ 그러한 사람의 출현은 분명 너무 드물며, 그러한 사람은 어느 시대에도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결국 사람들은 몇 가지를 알기 위해서 스스로 모든 것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 이는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ㅡ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종류의 호기심은 이제 모든 악덕 가운데 가장 기분 좋은 것으로 남는다. ㅡ 용서를 빈다! 진리에 대한 사랑은 그 보답을 하늘에서와 이미 지상에서도 얻게 된다는 것을 나는 말하고 싶었다. ㅡ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4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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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의 신앙

 

원시 그리스도교가 요구했고 드물지 않게 이르렀던 그 신앙, 여러 철학 학파들의 수세기에 걸친 긴 논쟁을 과거에도 당시에도 경험하고, 더욱이 로마제국이 베푼 관용의 교육을 받았던, 회의적이고 남국의 자유정신의 세계의 한가운데 나타났던 신앙 ㅡ 이 신앙은 루터나 크롬웰 같은 인물이나 그 밖에 북부의 정신적 야만인들이 그들의 신과 그리스도교에 매달려왔던 저 순진하고 거친 신민(臣民)의 신앙이 아니다오히려 그것은 이성의 지속적인 자살과 끔찍할 정도로 유사해 보이는 저 파스칼의 신앙이며, ㅡ 이 것은 단 한 번에, 일격에 죽일 수 없는 끈질기게 장수하는 벌레 같은 이성이었다. 그리스도교적 신앙은 처음부터 희생이다 : 모든 자유와 긍지, 모든 정신의 자기 확실성에 바치는 희생이다. 동시에 이는 노예가 되는 것이며 자기 조소이자 자기 훼손이다. 연약하고 복잡하며 까다로운 양심에 요구되는 이러한 신앙에는 잔인성과 종교적인 페니키아주의가 깃들여 있다 : 이 신앙의 전제가 되는 것은 정신의 복종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는 것, 또한 그러한 정신에 '신앙'은 극도의 부조리한 것으로 대립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그러한 정신의 전 과거와 습관은 부조리에 반항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전문 용어 체계에 무감각한 현대인들은, '십자가에 매달린 신'이라는 형식의 역설이 고대의 취미에서는 전율할 정도로 최상의 것으로 느껴졌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어느 곳에서도 이 형식처럼 전도된 상태에서의 그와 같은 대담성, 그만큼 무서운 것, 문제시되는 것, 의혹이 가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 이는 고대의 모든 가치의 전도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ㅡ 이러한 방식으로 로마에 대해, 그 고상하지만 경솔한 관용에 대해 로마적인 산앙의 '카톨릭주의'에 복수를 한 것은 동방이며,  깊이 있는 동방이고, 동방의 노예였다 : 노예로 하여금 주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원인은 언제나 신앙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 즉 신앙의 진지함에 대한 반쯤은 금욕적이고 반쯤은 냉소적인 무관심이었다. '계몽주의'는 반란을 일으킨다 : 즉 노예는 절대적인 것을 바라는 것이다. 그는 도덕에서조차 단지 포학한 것만을 이해할 뿐이다. 그는 미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고하게 심층에 이를 때까지 고통스러울 때까지 병이 들 정도로 사랑을 한다. ㅡ 감추어진 그의 많은 고통은 고통을 부정하는 듯 보이는 고상한 취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다. 고통에 대한 회의, 근본적으로는 단지 귀족 계급의 도덕적 태도에 대한 회의는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최후의 거대한 노예 반란이 일어나는 데도 적지 않게 기여했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4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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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돌리고 떠나야 할 때

 

지상에서 지금까지 종교적 신경증이 등장했던 곳에서 우리는 그것이 고독, 단식, 성적 금욕이라는 세 가지 위험한 섭생 규정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ㅡ 그러나 여기에서는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 또는 여기에 원인과 결과의 관계라는 것이 도대체 있는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 확실하게 단정할 수 없다. 끝까지 의심할 때 당연히 나오는 결론은 조야한 민족이나 온순한 민족의 경우, 가장 갑작스럽고 방탕하며 관능적인 쾌락은 또한 바로 종교적 신경증의 가장 일반적인 증상에 속하며, 이는 곧 마찬가지로 갑자기 참회의 경련이나 세계 부정과 의지 부정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 이 두 가지 증상은 아마 가면을 쓴 간질병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해석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어떤 유형의 인간 주변에도 지금까지 그렇게 불합리와 미신이 가득 차 무성했던 적이 없으며, 지금까지 인간에게, 심지어는 철학자들에게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ㅡ 여기에서 바로 어느 정도는 냉정해지고 신중함을 배우고 이를 더 잘 표현한다면, 눈을 돌리고 떠나야 할 때인 것이다. ㅡ 가장 최근에 나타난 철학, 즉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배경에도 종교적 위기와 각성이라는 이러한 의문부호가 거의 문제 그 자체로 나타난다. 의지의 부정이란 어떻게 가능한가?성자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는 실제로 쇼펜하우어가 철학자가 되게 했고 철학을 시작하게 만든 문제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의 가장 충실한 신봉자(아마도 독일에 관한 한, 그의 마지막 신봉자이기도 하다ㅡ), 즉 리하르트 바그너R. Wagner는 자기 자신의 필생의 작품을 바로 여기에서 마지막까지 완성했고, 또 마침내는 저 무서운 영원한 인간유형으로 육화된 살아 있는 인간형인 쿤드리Kundry를 무대에 올려 상연했다는 것은 진정 쇼펜하우어의 진정한 귀결이었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3장> 종교적인 것, 제4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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