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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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한다"

 

'직접적인 확실성', 예를 들면 "나는 생각한다" 라든가, 쇼펜하우어의 미신이었던 "나는 의지한다"와 같이 '직접적인 확실성'이 존재한다고 믿는 천진한 자기 관찰자가 아직까지도 존재한다. 마치 여기에서 주체나 객체의 측면에서 왜곡됨 없이, 인식이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물자체Ding an sich'로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직접적 확실성'은 '절대적 인식'과 '물자체'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 안에 형용 모순eine contradictio in adjecto을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백 번이고 반복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마침내 이 용어의 유혹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인식이란 끝까지 아는 것이라고 대중들은 믿지만, 철학자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해야만 한다 : "나는 사유한다"라는 명제 속에 포함된 과정을 분석해가면, 나는 그 명제가 논증하기 어려운, 아마 불가능한 일련의 대담한 주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ㅡ  예를 들면, 나는 생각하는 존재이며, 일반적으로 무엇은 생각하는 존재이어야만 한다. 사유란 그 원인으로 생각되는 한 존재의 측면에서 보자면 하나의 활동이요 작용이다. 하나의 '나(자아, Ich)'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리고 마침내 사유라고 표기할 수 있는 것이 이미 확정되어 있다. ㅡ 즉 사유가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다. 결국 만일 나 자신의 경우에 내가 그 점을 미리 확정할 수 없다면, 바로 지금 일어나는 것을 아마 '의지의 작용'이거나 '감정의 작용'은 아닌지 무엇에 따라 측정해야만 하는가? 어쨌든 저 "나는 생각한다"는 진술은 나의 상태를 확정하기 위해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다른 상태들과 나의 현재의 순간적인 상태를 비교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와 같이 다시 되돌아가 다른 관점에서의 '지식'과 관계하기 때문에, 이 현재의 순간적인 상태는 어쨌든 나에게는 직접적인 '확실성'을 주지 못한다. ㅡ 이 경우에 대중이 믿을 수도 있는 저 '직접적 확실성' 대신 철학자는 일련의 형이상학적 물음을 손에 넣게 된다. 이것은 진정 본래의 형이상학적 물음이며, 다음과 같은 것이다 : "사유라는 개념을 나는 어디서 얻게 되는가? 나는 왜 원인과 결과를 믿는가? 나에 대해, 더구나 원인으로서의 나에 관해, 그리고 결국에는 사유의 원인으로서의 나에 관해 나에게 말할 권리를 주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적어도 참이고, 현실이며 확실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행위에서처럼, 일종의 인식의 직관에 의존하여 저 형이상학적 물음에 바로 대답하는 용기를 내는 사람은, 오늘날 한 사람의 철학자에게서 하나의 웃음과 두 개의 의문부호를 이미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철학자는 아마 그에게 다음과 같이 암시할 것이다. "선생님, 당신이 틀리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대체 왜 절대적으로 진리만이 있어야만 합니까?? ㅡ

 

니체, 『선악의 저편』, <제1장> 철학자들의 편견에 대하여, 제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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