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ㅣ 책세상 니체전집 14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02년 2월
평점 :
누가 알겠는가?
위대한 것은 모두 그것을 인류의 마음속에 영원한 요구로 새겨 넣기 위해서, 우선 섬뜩하고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흉한 얼굴로 지상을 방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독단적 철학, 예를 들면 아시아의 베탄타Vedanta 이론과 유럽의 플라톤주의가 이런 흉한 얼굴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철학의 은혜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온갖 오류 가운데 가장 나쁘고 지루하며 위험한 것은 독단론자들이 저지른 오류, 즉 플라톤의 순수 정신과 선 자체의 고안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이 오류를 극복하고, 유럽이 이러한 악몽에서 벗어나 안도의 긴 숨을 내쉬며 적어도 좀더 건강한 숙면을 즐길 수 있게 된 지금부터 우리의 과제는 깨어 있음 그 자체이며, 우리는 이러한 오류와 투쟁함으로써 엄청나게 단련된 힘을 모두 상속받은 것이다. 플라톤이 그랬던 것처럼, 정신과 선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확실히 진리를 전복하고 모든 생명의 근본 조건인 관점주의적인 것을 스스로 부인함을 의미했다. 우리는 의사로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병은 어디에서 고대에 가장 아름답게 자라난 존재인 플라톤에게로 옮겨왔는가? 사악한 소크라테스가 그마저도 타락시켰던 것일까? 소크라테스야말로 청년들을 타락시킨 자가 아닐까? 그 스스로 독배를 받을 만했던 것은 아닐까?" ㅡ 그러나 플라톤에 대한 투쟁, 또는 대중을 위해 좀더 이해하기 쉽게 말한다면, 수천 년에 걸쳐 지속되어온 그리스도교 교회의 억압에 맞서 한 투쟁은 ㅡ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이기 때문이다 ㅡ 유럽 내에서 아직까지 없었던 화려한 정신적 긴장을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이렇게 팽팽한 활을 가지고 이제부터 가장 먼 표적을 맞힐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유럽인은 이 긴장을 위기로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미 두 번씩이나 활의 시위를 풀고자 하는 대규모의 시도가 있었다. 한 번은 예수회 정신Jesuitismus에 의해서였고, 두 번째는 민주적 계몽주의에 의해서였다. 이 민주적 계몽주의는 실상 출판의 자유와 신문 구독 덕분에 정신 자체를 더 이상 그렇게 쉽게 '위기'로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회원도 민주주의자도 아니고 게다가 충분한 독일인도 아닌 우리, 선한 유럽인이며 자유로운, 대단히 자유로운 정신인 우리 ㅡ 우리는 여전히 긴장을, 정신의 온갖 곤경과 그러한 정신적 활의 긴장 전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마 화살과 과제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누가 알겠는가? 목표도 있는지……
오버엥가딘의 질스마리아에서
1885년 6월
- 니체, 『선악의 저편』,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