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 크루소』와 『모비딕』은 여성을 등장시키지 않고서도 탁월한 성공을 거둔 걸작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 순전히 오락용 책자로 이 소설을 읽었다. 그러나 나중에 나이 들어 재독해 보면 이 소설이 왜 불후의 명작인지 깨닫게 된다.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독서계획』중에서

 

 * * *

 

(밑줄긋기)

 

섬에 온 지 열흘 내지 열이틀이 지났을 때 책과 펜, 잉크가 없으니 날짜 계산을 못하고 심지어 평일과 안식일도 구분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일을 방지하려고 나이프로 커다란 나무 기둥에 대문자로 도착 날짜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그 기둥을 십자가 모양으로 만들어서 내가 처음 착륙했던 해변에 세워 놓았다. 나는 거기에 <1659년 9월 30일 처음 섬에 도착하다>라고 새겼다. 그리고 이 네모난 기둥 양 옆면에 매일 칼로 금을 새겨 날짜를 기록했다.(92쪽)

 

 - 대니얼 디포, 『로빈슨 크루소』중에서

 

 * * *

 

어떤 날씨에나, 낮이나 밤 어떤 시간에나 나는 시간의 홈을 활용하고 그 순간을 내 지팡이86에도 표시해두고 싶었다. 달리 말하면, 과거와 미래라는 두 영원이 만나는 점,87 요컨대 현재의 순간에 서고 싶었고, 현재라는 출발선에 발끝을 대고 서고 싶었다. (52쪽)


주석

86. 소로는 측량하기 위해 눈금이 새겨진 막대를 갖고 다녔지만, 여기에서는 대니얼 디포(Daniel Defoe, 1660-1731)의 로빈슨 크루소를 빗댄 표현이다. 크루소는 나무 기둥에 눈금을 새겨 시간을 기록했다. 소로는 일기에서도 "로빈슨 크루소가 막대기에 매일 표식을 했듯이, 우리는 매일 우리의 품성에 눈금을 매겨야 한다"(일기 1:220)라고 썼다. 소로는 자급자족하며 독립된 삶을 살았던 크루소에게 매력을 느꼈던지 「커타딘 산」과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에서 거듭 크루소에 대해 언급했다.

87. 토머스 모어(Thomas Moore, 1779-1852)가 동양의 화려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삼아 쓴 이야기체 시 「랄라 루크」에서 "과거와 미래-두 영원! / 두 끝없는 바다 사이의 이 좁은 지협"을 빗댄 표현으로 여겨진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주석 달린 월든』 중에서

 

 

 * * *

 

내 이성이 의기소침해져 있던 내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최선을 다해 나 자신을 위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처한 상황을 그보다 더 나쁜 상황과 구분하고, 내 불운한 상황을 그나마 다행스러운 상황과 견주기 시작했다. 나는 이 두 가지 상황, 즉 내가 겪은 비참한 불운과 내게 기쁨을 준 위안을 부기 장부의 차변과 대변처럼 매우 공평하게 열거해 보았다.

 

모든 걸 고려하면 이 장부는 나와 같은 비참한 처지는 세상에 다시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명서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런 내 처지에도 <부정적인> 면과 감사해야 하는 <긍정적인> 면이 모두 들어 있었다. 그러니 내 사례가 세상의 온갖 상황 중 가장 비참한 상황을 경험한 데서 나온 지침으로 사용되었으면 좋겠다. 늘 우리에게 뭔가 위안을 주는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지침, 그리고 행운과 불운 양쪽을 차변과 대변으로 나누어 설명해 놓은 회계 장부가 있다면 가급적 행운을 기록한 대변 쪽에 마음을 기울이라는 지침 말이다. (94∼95쪽)

 

 - 대니얼 디포, 『로빈슨 크루소』중에서

 

(나의 생각)

제임스 조이스가 『로빈슨 크루소』에 대해서 말한 '특징'이 작품 곳곳에 그대로 나타난다. 그의 말대로 '그에게는 남성다운 독립심, 무의식적인 잔인성, 불요불굴의 집요함, 느리지만 효율적인 지성, 성적 무감각증, 계산적인 과묵함 등 전적으로 앵글로-색슨족 특유의 기상이 넘쳐난다.'

 

 * * *

 

인간의 감정이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서, 혹은 알 수 없는 다채롭고 은밀한 샘물들에 의해서 얼마나 급하게 이리저리 떠밀려 내려가는가! 오늘 우리는 내일이면 우리가 증오하게 될 것을 사랑한다. 오늘 우리는 내일이면 우리가 회피하게 될 것을 찾아 나선다. 오늘 우리는 내일이면 우리가 두려워하게 될 것, 아니 그 두려움으로 몸조차 벌벌 떨게 될 것을 갈망한다. 바로 이 사실이 발자국 사건 당시의 나를 통해 상상 가능한 가장 생생한 방식으로 입증되었다. 내게는 인간 사회로부터 추방된 것 같다는 생각, 다른 사람들과 절연되어 내가 무언의 삶이라고 부르던 삶을 살도록 저주받았다는 생각, 끝도 없는 바다에 둘러싸여 외롭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유일한 걱정이었다. 나는, 하느님께서 살아 있는 다른 사람들과 섞여 살 만한 가치가 없는 놈, 다른 사람들 사이에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놈이라고 생각하시는 사람과 같았다. 그러니 그런 내가 나와 같은 종인 사람을 단 한 명이라도 보게 된다면 그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나 매한가지이든지, 아니면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최고의 축복인 구원 다음으로 위대한 축복처럼 여겨질 일이었다. 그런데, 말하자면 바로 그런 내가 사람을 보게 될지 모른다는 바로 그 두려움 때문에 지금 몸을 벌벌 떨고 있는 것이고, 섬에 사람이 발을 내디뎠을지도 모른다는 그림자처럼 희미한 가능성과 무언의 흔적 때문에 금방이라도 땅속으로 꺼져 버릴 것 같은 괴로움에 떨고 있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것이 들쭉날쭉 고르지 못한 인간 삶의 상황인 것이다. 이 생각은 이후 발자국 사건으로 인한 최초의 충격에서 조금 회복되고 난 후에도 내게 많은 상념을 제공해 주었다.(214쪽)

 

 - 대니얼 디포, 『로빈슨 크루소』중에서

 

 * * *

 

아아, 사람이란 공포감에 사로잡히게 되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이성이 제공하는 해결 수단마저 박탈해 버린다. (……)

 

이런 것들이, 집으로 돌아온 첫날 밤 온통 새로운 걱정 근심으로 가득 찬 내 머릿속 상념의 주제였다. 그리고 내 머릿속은 앞서 말한 것처럼 온통 침울한 망상들로 가득 찼다. 이처럼, 눈앞에 뻔히 존재하는 위험에 대한 가상의 공포감이 실제 위험 자체보다 천배는 더 무시무시한 법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걱정하는 불운한 재난보다 불안감이라는 부담 자체가 훨씬 더 괴롭다는 것을 잘 안다.(218쪽)

 

 - 대니얼 디포, 『로빈슨 크루소』중에서

 

 

 * * *

 

"불행으로 겪는 고통은 상상한 고통보다 덜 느껴진다"(퀸틸리아누스)고 한 말은 옛날의 어질고 사리에 밝은 한 작가에게서 실제로 나온 말이다.(1170쪽)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중에서

 

 *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